내 변태 같은 삶에 건배
결국 가지 못했다.
썩 내키지 않은 걸 들켰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계약서는 쓰라는 주변의 충고에 꺼낸 계약이라는 단어, 그게 싫었던 건가. 임금협상이 문제였나. 내가 그냥 마음에 안 들었던 걸까.
차라리 잘되었다. 초긍정의 힘으로 이렇게 된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 나라를 떠나지 말고 잘 살라는 뜻일 거다.
아, 근데 이제 뭐하지.
우물 안 개구리는 싫다며 뜬구름 잡느라 학교를 뛰쳐나왔다. 돈도 없고 백도 없고 돌아갈 곳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반기는 이도 없었지만, 받아주는 이도 없었다. 이력서를 낼 곳이 없다. 무용과, 이과도 문과도 아닌 예체능 27살. 전공도 나이도 애매했다. 그래도 조교 경력이 있으니 대학교 사무 조교를 지원했다. 박사과정이니깐 일하다 다시 너네 학교로 돌아갈 거 아니냐고 한다. 말문이 막혔다. 면접관 얼굴에 대고 대놓고 대들며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다.
백화점 여성 의류 판매 직원 면접을 봤다. 다행히 합격. 본사 면접관과는 다르게 백화점 매장 매니저의 눈빛은 차갑고 무서웠다.
비서를 지원했다. 아, 또 그놈의 영어가 문제다. 이쯤 되면 공부할 법도 한데.
백화점 출근을 하루 앞두고 치과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고 연락이 왔다. 다행히 합격.
목구멍이 포도청이었는데 백화점과 치과를 두고 저울질을 하고 있었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는지 배가 덜 고픈 건가. 그나마 앉아서 있을 수 있고, 책이라도 한 장 읽을 수 있고, 근무 시간도 적당한 치과에 마음이 기울었다.
그렇게 외국으로 가려고 발버둥 치던 꿈도 개꿈으로 끝나고, 전혀 예상치 못한 사무직 생활이 시작됐다.
어쨌든 일자리를 찾았으니 출근을 하러 오라는 그 말 한마디가 너무나 감사했다. 출근을 하기도 전인데 첫 월급을 받으면 자취방 월세도 내고, 학자금 이자도 밀리지 않겠구나. 달달한 케이크도 좀 먹겠지. 단순하고도 훈훈한 상상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꽤 괜찮은 직장이었다. 1층 안내데스크에는 나 홀로 환자들을 맞이했고, 신환은 거의 없었다. 예약된 스케줄로만 환자들이 시간에 맞춰서 방문했고, 예약은 1시간에 1명. 6시면 칼퇴근하는 곳이었다. 점심시간도 2시간, 점심을 먹고 나면 룰루랄라 커피를 마셨다. 지금 돌이켜보면 꿀 보직이었다.
평범한 직장인의 삶을 느끼고 있었다. 9시에 출근하고, 6시에 퇴근하는 일정한 일상이 반복되었다. 그런데 너무 편했나 보다.
왜 항상 편한 삶을 거부하는가. 이 정도면 병인 것 같다. 편하고 안정적인 삶이 남의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점점 앉아있는 일이 지루했고, 딴생각이 들었다. 내 발로 내 복을 찬 건지도 모르겠다. 참을성이 없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배부르고 등 따시니 딴생각이 든 걸 수도 있다.
다른 일이 하고 싶었다. 내 전공도 아닌 일을 기계적으로 하고 있다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을 점령했다.
아. 나 이제 또 뭐하지?
내 변태 같은 삶에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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