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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모니우스, 그 독일남자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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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나소공
Sep 17. 2024
5. 부검 결과와 장례식 준비
내 입으로 부고를 전해야 하는 슬픔
부검은 다음 날 오후에 결정됐다.
경찰이 부검장에 가겠냐고 물었지만, 나는 부검장에 가지 않았다. 서울이 아닌 지방의 어느 도시에서 부검을 실시한다고 했다. 나는 부검장에 가서 부검을 볼 자신도, 맨 정신으로 기다릴 자신도 없었다.
집에서 부검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장례식 준비를 했다. 서울에 사는 조카들이 장소를 물색했다.
나는 오래전부터 매장의 문제점을 들어왔기에 화장을 선택했다. 봉안 장소가 문제였다. 조카들은 집에서 가까운 추모공원을 추천했다.
나는 망설였다. 솔직히 추모공원에 모시고 싶지 않았다.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우리 집, <하모니우스>에 모셔두고 싶었다. 그냥 화장된 재 그대로 집안에 놔두거나 아니면 그가 좋아했던 큰 단풍나무 아래에 묻어주고 싶었다.
친정 가족들이 반대했다. 나는 4남 2녀 중 막내였다. 큰 오빠는 2년 전 겨울에 세상을 떠났다. 남아있는 형제자매들 중 배를 타는 오빠 1명만 제외하고 모두 우리 집에 와 있었다.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르는 기라. 이 집에서 평생 살지도 모르는 데, 이 집에 유골을 뿌려서 우얄라 카노? 집안에 유골을 모신다는 것은 말도 안 되고!”
형부의 말이었다.
‘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른다
’는 말에 턱 걸렸다.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 아무도 몰랐던 대표적인 일이 남편이 갑자기 죽는 것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가족들이 모두 망연자실해했지만, 특히 우리 언니와 형부의 슬픔이 컸다. 다른 가족들도 우리 남편, ‘
크서방
’을 좋아했지만, 형부에게 남편은 유일한 동서였고, 다른 형제들보다 더 자주 만났기에 더 애틋했다.
남편은 겨우 한 살 더 많은 형부를 “
형님
”이라고 부르며, 형부와 삼겹살 먹고 소주 마시는 시간을 즐겼다. 형부는 영어가 서툴렀고, 남편은 한국말을 잘 못했으니, 두 사람이 깊은 대화를 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진지하고 자상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어쩌면 영혼의 결이 닮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늘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하고, 계속 챙겨 왔다. 한국으로 이사오기 전에는 한국에 방문할 때마다 언니와 형부를 찾아가 만났다. 남편 생일에도 형부와 언니는 꼭 불렀다. 이번 생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형부가 하는 말을 나는 흘려들을 수는 없었다.
남편이 사망한 지 3일째 되는 날 늦은 오후에 부검이 끝나고 시신이 양평 병원 안치실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밤늦게 그를 만나러 갔다. 형부와 언니가 동행했다. 딸아이는 데리고 가지 않았다.
시체 안치실로 내려가 관리인이 하얀 천을 벗겼다. 남편의 가슴과 복부가 보였다. Y자로 크게 그어져 듬성듬성 바느질한 모습.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입을 틀어막았다. 목이 아프고 눈이 뜨거워졌다.
그토록 병원에 가기를 꺼리더니, 결국 죽어서 이렇게 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을 당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미 혼을 벗은 몸이라, 고통이야 없었겠지만, 어쩌면 남편의 혼은 자신의 몸이 찢기는 것을 보고 고통과 후회에 몸부림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딸아이가 아빠의 이 마지막 모습을 보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평생 잔상으로 남아 트라우마가 될 뻔한 이 모습을.
내 대신 언니가 오열했다.
언니와 형부는 남편의 사체를 처음 보는 참이었다. 사망 당일 아침에 생일초대를 받고, 저녁에 어이없는 부음을 받고 바로 올라와 이틀을 기다려 본 첫 모습이 가슴에 Y자가 그어진 사체라니.
언니는 “크서방, 크서방, 자네 어쩌자고…”를 되뇌며 울고 또 울었다. 남편의 죽음 이후 나보다 더 크게 많이 운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우리 언니이지 싶다.
언니는 2007년 암으로 아들을 잃었다. 잘생기고 다정했던 스물일곱의 아들. 얼마나 한스러웠을까? 언니의 울음 속에는 그 슬픔까지 고스란히 담긴 듯했다.
형부는 고개를 돌렸다. 눈은 시뻘게져 있었다. “허어, 이 사람, 어찌 이리 허망하게…” 형부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갇혀 있던 눈물만 진득하게 흘러내렸다.
부검 결과는 ‘사인 미정, 타살 아님’이었다. 부검이라는 게 원래 타살여부를 알기 위함이 1차 목적인데, 타살이 아니라고 나왔으니, 나는 살인자의 누명을 벗은 셈이었다.
하지만 살인 누명을 벗었다고 해서 내 죄책감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가족이 사망하면 누구나 생전에 더 잘해주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고는 하지만, 내 경우는 그 죄책감을 절묘하게 뒷받침해 주는 사건들이 많았다.
어쨌거나 부검이 끝났으니 이제 구체적인 장례 일정을 논의해야 했다.
나는 그때까지 내 가족 외의 누구에게도 남편의 사망 사실을 알리지 않고 있었다.
부검 결과가 언제 나올지 몰라 장례 일정도 잡기 힘들었다는 점이 1차 이유였지만, 나는 내심 아무도 내 남편의 사망 사실을 몰랐으면 싶은 마음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 사실을 내 입으로 알린다는 것이 괴로웠다.
물론 독일에 사는 남편의 유일한 혈육인 시누이에게는 사망직후에 알렸다. 남편보다 4살이 어린 시누이. 잠시 말문을 닫을 정도로 황망해했다.
시누이는 남편 사망 이틀 전 크리스마스 때 긴 통화를 했다고 했다. 그때 남편은 시누이를 양평집으로 초대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내가 미안해하며 부검 사실을 알렸을 때, 시누이는 “괜찮다. 당연한 절차다”라며 이해하고 위로해 주었다.
당시 102세였던 시어머니는 거동이 불편한 상태로 요양원에 있었다. 정신도 말짱하지 않았다. 시누이는 시어머니한테는 사실을 알리지 않겠다고 했다.
문제는 남편의 전처소생 자식들이었다. 남편은 나와 결혼하기 전 전처와의 사이에서 1남 1녀를 두었다. 그들은 모두 미국에 거주하고 있었다.
남편 사망 직후 부검이 진행되는 과정에선 그들 생각까지는 못했다. 하지만 장례식엔 참가하는 게 순리라고 봤다.
하지만 그들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남편의 전화기, 이메일을 아무리 뒤져봐도 그들의 연락처는 없었다. 연락을 주고받은 흔적조차 없었다.
시누이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시누이조차 그들과 연락이 끊긴 지 오래돼 연락처를 모른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이 불참한 가운데 장례식을 진행해야 했다.
장례식은 사망 5일째인 12월 31일로 정했다. 조카가 다행히 신촌 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을 예약했다. 당시 연희동 집에서 가까워서 1순위로 선호한 곳이었다.
봉안시설도 정했다. 경기도 광주에 있는 분당 **추모공원. 양평 집에서 1시간 이내의 거리라 자주 찾아보기 좋겠다는 점이 고려됐다. 제법 고급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다음 순서는 부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내 가족 외에 누구에게 알릴까. 우리는 오랫동안 타이완에 살고 있었기에, 친구들의 애경사에 참가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알릴 사람이 많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다행인지, 당시 나는 중학교 동창 및 대학 동창들과 연결돼 몇 차례 모임에 참석했다. 그들 중 일부는 우리 양평집에 방문해 남편과 함께 바비큐를 즐기기도 했다.
내가 속한 퀼트 모임도 2개가 있었다. 당시에 나는 열심히 머신퀼트를 하던 시절이었다. 60세 환갑 기념으로 퀼트 전시회를 열자는 말에 남편도 좋아했던 기억이 났다.
나는 부음을 전할 대상자로 '남편과 나를 잘 아는 사람'이면서 최근에 만남을 이어간 사람으로 정했다. 남편이 마지막까지 함께 일했던 일부 직원들도 포함시켰다.
그런데 장례업자가 보내주는 공식적인 부고는 영 꺼려졌다. 사실은 그런 게 있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친구들에게는 대표 1명을 정해 그냥 전화로 알렸다. 그 친구가 밴드와 카톡으로 남편의 부고를 대신 전했다.
그리고 소소한 모임의 친구를 위해 내가 선택한 부고 방식은 카카오 스토리에 올리는 것이었다. 아무나 보는 게 싫어서 친구를 지정해 올렸다.
그때 올린 내용은 이랬다.
크**** 클****(남편 이름)
**년생 독일 남자.
18년 전 어느 날, 춥고 어둡고 막막했던 내 삶에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
내 인생을 온통 따스한 온기와 환한 빛으로 감싸 주었던 사람.
부인의 나라, 한국에 전원주택을 짓고,
평생 한국에서 여생을 보내고자 한 남자.
무너져가는 부인의 시골 친정집이 안쓰러워 통째로 지어 준 통 큰 사람.
부인의 행복이 존재 이유이자 최대의 관심사였던 바보 같은 남자.
다음 생애에 다시 태어나도 나랑 결혼하고 싶다던,
보잘것없는
내겐 너무나 과분했던 내 남편 크****,
12월 27일 저녁 6시
심장 마비로 세상을 등지다.
너무나 참담한 소식이라 차마 입에 올리기도 힘들어 그냥 부고를 전하지 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저와 남편을 알고 있는 분들께는 그 또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이렇게 부고를 알립니다.
그렇게 부고를 알리고 남편의 장례가 진행됐는데, 그 장례식장에서 뜻밖의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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