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 뮤익

by 글섬

론 뮤익을 보러 가기 전날 밤 11시까지 일했다. 그 전날엔 11시 반에야 퇴근했다. 누적된 피로에 연휴 시작의 기쁨보다 전신 근육통으로 아침 잠에서 깼다. 피로는 왜 그럴까. 피로 주제에 더 안 재운다. 더더 각성시킨다. 오전 6시에 잠에서 깨자 거의 욕이 나올 지경이었다. 연휴에 아픈 건 이미 지난 25년 동안 충분히 했다. 나한테 왜 이러는지 삿대질하는 대신,


기묘한 오기가 발동했다. 나도 연휴를 누릴 자격이 차고 넘친다고. 연휴 내내 누워 끼니마다 타이레놀 콜드를 먹으며 내 몸의 눈치를 보는 대신 세상 어딘가에 나도 끼어 있고 싶었다.


아마 그런 맥락으로 읽힌다. 근육통을 이고 지고 광화문행 버스에 오르기까지 의식의 흐름은.


비 내리던 휴일 아침에 광화문 시위를 예상치 못했던 나는 시청을 지난 버스 정류장에 버려지듯 내려졌다. 탄핵도 인용된 마당에 무슨 시위인지 알 길 없이 길 건너편 버스 정류장에서 20분 동안 영문도 모른 채 외국인들 틈에 끼어 버스를 기다렸다. 근육통의 몽롱함과 봄비의 형이상학적 모드가 아니었다면 상당히 짜증이 올랐을 법했지만, 노련한 택시 기사님 덕분에 근육통을 이고 지고 시청에서 국립현대미술관까지 걷는 무리수를 두지 않아도 되어 감사했다.

차량이 통제될 만큼 대규모로 시위하는 그들은 알까. 그들의 밤낮없는 광장 애국심보다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아내려 노력하는 택시 운전사의 소시민적 삶의 태도에 더 감사하는 민중의 마음을. 애국은, 아니 애국 아니라 뭐든, 거대한 함성보단 소소한 행위가 진실이다.


예정보다 1시간 늦게 도착해 만난 론 뮤익은 극사실주의라는 그 어떤 '규정' 저 너머에 있었다. 훨씬 더 저너머에.


극사실주의를 표방하는 그 어떤 예술도 접해본 적 없었던 나로선 아무 기대 없이, 그저 매일 근육통을 일으킬 정도의 업무 강도를 쓰다듬어줄 뭔가가 필요했을 뿐인데 론 뮤익은 이를 후울쩍 뛰어넘은 저 너머 어딘가에 고독하게 존재했다.



그의 작품은 조각도 예술도 아니었다. 우리 그 자체였다. 삶에 배반 당하고 오늘에 충실해서 상실한 표정들..


우주를 창조해내는 육아도,


자아를 재발견해낼 연애도,


궁극의 자아라고 믿고 싶은 노년도,


잃어버린 나를 찾아내줄 것만 같은 취미 활동도


심지어는 휴식까지도


오늘을 버텨 내일로 건너 가야만 하는 피로감만 가득하다. 어느 장소, 어떤 모습으로도 그들은 모두 그들 자신일 수밖에 없어 피로한 표정이다.

왜. 왜 나밖에 안 될까, 하는 질문들

에 갇힌 역력한 피로감만 읽히고 또 읽히다,

문제의 그 작품이 자잔, 드러난다.


아등바등 살아봐야 비바람에 흔들리는 창밖의 나뭇가지 한줌보다 못한 아름다움이라니.

참을 수 없었다. 어제까지, 바로 10시간 전까지 욕을 하며 하루를 버텼던 내가 부끄러웠다.

선 채 운다. 아름다운 굴복이다.

비바람에 흔들리던 창밖의 나뭇가지를 기억하겠다. 그를 외면한 채 앙상하게 해골만 남아 볼 품 없이 Mess가 되어가는 나의 얼굴을 돌아보겠다.


사는 데 무슨 의미가 있냐 하면 아름다움뿐이다.

무슨 아름다움이냐 하면 저마다 다르겠지만

나로선 존엄의 아름다움이다.

썪어 사라질지언정 해골이 되지는 않겠다.

애써 감정을 정리하고 들어선 다음 전시장에서


그는 다시 질문한다. 너 괜찮은 거 맞아?

이렇게 낡은 나룻배에 노도 없이 알몸으로 존재하는 중이라는 걸 알고 있는 거지?

자화상의 갸웃한 표정에, 금방이라도 침몰할 것 같은 나룻배의 노화에 나는 그만 무릎이 꺾인다.

어린 목숨을 위해 던져 버린 내 젊음의, 젊은 목숨을 위해 이를 앙다문 내 장년의 피로와 질문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암흑의 방에서 그는 나를 노려보며 엄중히 결론 짓는다. 이거 왜 이래, 아마추어 같이.

네가 그 어떤 생을 위해 너를 내놓을 위인이라고 믿는 거냐 정말. 다행히 너는 온건한 질문들로만 가득한 세상을 건너기 위해 오히려 다른 생을 질문 받았을 뿐.


아름다운 질문들 속에서 잃어가던 아름다움을 되품으며 내가 구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