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싯 몸 장편소설 / 안진환 옮김 / 민음사
"내가 제안하는 삶이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얼마나 더 풍성한지 설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신적 세계를 추구하는 삶이 얼마나 즐겁고, 얼마나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는지 당신에게 알려 줄 수만 있다면...... 그건 정말 끝없는 즐거움이고, 말로 형언하기 힘든 행복이야. (중략) 세상 그 어떤 권력과 영예를 준다 해도 바꾸고 싶지 않지. 얼마 전에 데카르트를 읽었어. 그 평온함, 품격, 명석함이란!" (125페이지)
"사랑은 항해에 서투르기 때문에 바다에 나서면 약해지지. 이사벨과 래리 사이에 대서양이 놓이게 되면, 배를 타기 전에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만 같던 아픔도 실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 깨닫게 될 거야." (160페이지)
"난 단지 자기 확신이 얼마나 강력한 열정이 될 수 있는지 알려 주고 싶었을 뿐이야. 정욕도, 굶주림도 그 옆에서는 아주 하찮은 것이 되어 버리지. 자기 확신에 사로잡히면 그것으로 자신의 성격을 완전히 단정 짓게 되고, 그로 인해 스스로를 파멸로 몰고 갈 수도 있어. 그 확신의 대상은 중요하지 않아.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일 수도 있지. 어쨌든 그것은 그 어떤 술보다도 중독성이 강하고, 그 어떤 사랑보다도 사람을 지치게 만들고, 또 그 어떤 악덕보다도 강력하고 매혹적이야. 사람은 자신을 희생시키는 순간 하나님보다 훨씬 더 위대한 존재가 되지. 왜냐면 전지전능한 하나님도 자신을 희생시키진 못했으니까. 기껏해야 자신의 독생자, 그러니까 예수만 희생시켰지." (347~348페이지)
"어쨌든 사는 게 엿 같잖아요. 그걸 잠시나마 잊게 해 주는 무언가가 있다면, 당연히 누려야죠." (370페이지)
"세상을 등지고 은둔 생활을 하는 것은 제가 할 일이 아닌 듯했습니다. 그보다는 세상 속에 살면서 이 세상의 만물을 사랑해야 할 것 같았어요. 만물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존재하는 신을 말입니다." (460페이지)
"우리에게 돈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성공의 상징에 불과하죠. 우리 미국인들은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더 이상주의적인 사람들입니다. 엉뚱한 것에 대해 이상을 세웠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요. 저는 인간이 세울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이상이 자기완성이라고 생각하거든요." (464페이지)
아버지는 직업 군인이었고 화랑무공훈장 수훈자였다. 엄마는 아버지가 경상도 남자답게 원래부터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고 수도 없이 증언했지만, 말수가 적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한 마디도 하지 않는 날이 숱했다. 뉴스 외엔 티비도 보지 않으셨고, 특히나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며 웃어대는 우리들을 못마땅함을 넘어 경멸하셨다. 그땐 간과했다. 아버지가 6•25전쟁에 참전했었고 심지어 그 전쟁의 무공 수훈자였다는 사실을. 아버지는 그 전장에서 무엇을 마주했을까. 그건 아마 도저히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었으리라. 그리하여 그는 말 대신 묵묵히 행동으로만 살았고 티비 앞에서 킬킬대는 일반인으로 평생 돌아올 수 없었다.
소설의 주인공 래리는 세계 1차 대전에 항공기 조종사로 참전했다가 전우가 그의 목숨을 구해 주고 대신 죽는 참혹한 경험을 한다. 전쟁이 끝나고 미국으로 돌아온 래리는 전쟁 이전의 평범했던 삶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신과 생의 의미와 같이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사로잡힌 래리는 해답을 찾기 위해 책은 물론이고 세계 곳곳을 유랑하며 구도의 길을 모색한다. 그 시작점에서 안락한 삶과 부를 추구했던 약혼녀 이사벨과 파혼하고, 그 과정에서 재회한 소꿉친구 소피의 방탕한 삶의 구원자를 자처해 결혼을 결심하지만 결혼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소피는 쾌락을 좇아 아무런 설명 없이 사라진다. 어릴 적부터 래리와 함께 자라며 래리를 지극히 사랑해온 이사벨은 전쟁 후 생의 관조자로 변신한 래리와의 근본적인 간극을 시인하고 파혼을 결정한 뒤 오랜 시간 자신을 짝사랑해온 그레이와 결혼한다. 그레이는 당시 주식시장의 대성황을 이끈 집안의 후계자로 이사벨이 원하는 사교계 생활을 전폭적으로 지원할 재력을 갖춘 남자였다. 정신적인 삶을 추구하는 래리와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는 이사벨이 대비되는 과정에서 작가는 어느 쪽에도 치우침이 없다. 요컨대 선택의 문제이자, 그보다 앞서 본질의 문제인 셈이다. 말하자면 결코 움직일 수 없는 절대 진리라고나 할까.
6•25전쟁 참전자가 모두 아버지와 같지는 않았을 거다. 아버지는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못 견뎌 하셨다. 그 중에 인간을 제일 혐오하셨다. 퇴역 후 사업 사기를 당하신 후엔 더욱 심해지셨고, 이후 불교 교리에 심취하면서 더더욱 심해지셨다. 어린 시절 서당에 다니며 익힌 천자문 덕분에 불교 서적을 원서로 읽으셨는데 아버지의 깨달음이 너무 깊어서인지 우리의 배움이 너무 하찮아서인지 아버지의 말수는 더욱더 줄어들었다. 뒤늦게 새로 얻은 일터에선 격렬하게 일하시고, 집에 오면 안방에 혼자 틀어박혀 무언가를 읽거나 무언가를 쓰셨다. 나는 아버지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6•25전쟁 참전자가 모두 아버지와 같지 않다면, 굳게 닫힌 아버지의 입술 너머엔 아버지 본인조차 인식하지 못한 섬세한 감수성이 넘실댔던 게 아닐까, 이제 와서 생각한다. 원래부터 섬세한 감수성에 전장의 참혹함이 더께 져 세상과 닿을 때마다 통각으로 몸서리쳤지만 가족을 위해 세상에 발을 붙이는 대신 입을 봉인해버린 게 아닐까.
이게 소설이 아니라 화자의 말대로 작가가 직접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합리적으로 여겨질 만큼 스토리텔링과 인물들의 직조 기술이 빼어나다. 인물과 사건의 설정과 전개가 숨가쁘게 이어져 후일담이 궁금해서 책장을 덮을 수가 없다. 오랜만에 마주한 20세기 초반 소설은 요즘 주로 접했던 현대소설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무엇보다 스토리텔링이 강력하고 인물의 성격과 개연성이 뚜렷하다. 현대소설은 사건보단 심리, 인물의 성격보단 환경 변화에 따른 심리적 변화에 주력한다. 문학이야말로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기에 현대소설은 현대 그 자체인 셈이다. 하지만 소설의 요건들 중에 재미를 제일로 꼽는다면 현대소설은 아직 걸음마도 떼지 못한 유아기 같다. 그에 반해 19, 20세기 작품들은 내가 소설을 읽은 게 아니라 소설이 나를 끌고 간다. 그렇지, 이런 게 바로 소설이지, 싶다. 이야기와 행간이 공존하는 밀도 높은 짜임새에 탐복한다.
과묵하다는 건 타고난 성품이다. 아버지는 분명 원래도 과묵하셨을 거다. 하지만 세상을 향한 염세적인 시선과 인간을 향한 혐오적 감정, 그로 인해 굳게 닫혀버린 입술은 분명 혼자 감당해야 했던 전쟁 후유증이었을 거라고 이제 와 생각한다. 자라는 내내 아버지는 그냥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결코 외롭지 않은 고독한 사람이었을 거라고 이제 와 생각한다. 아버지에겐 독서가 있었으니. 가족 중에서 가장 많은 책을 읽는 나는, 아버지가 읽었던 수많은 도서들에서 얻은 깨달음의 기쁨을 나눌 사람이 없어 외로우셨을지언정 결코 혼자여서 외롭진 않으셨을 거라고 이제는 확신한다. 그래서 압도적으로 많은 시간을 혼자 보내시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이제 와 더 아프기도 하고 더는 아프지 않기도 하다.
빼어난 글솜씨의 [면도날]이 [달과 6펜스]보다 회자되지 못한 건 기시감 때문일 듯하다. 작가가 정밀한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사교계에 대한 묘사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래리의 수행 방법으로 택한 탄광 생활은 에밀 졸라의 [제르미날]이, 래리의 인도 수행 기행은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가 여울지며 하늘 아래 새로운 창작은 이미 20세기 이전에 끝났다는 말이 떠오른다. 게다가 [달과 6펜스]처럼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일컫는 현학적 상징의 제목이 [면도날]에서는 명징하게 작용하지 못한다. '면도날'이라는 제목과 래리의 속세 귀환을 좀 더 촘촘히 엮었다면 완성도가 훨씬 높았을 것 같은 개인적인 아쉬움이 크다. 마지막 책장을 덮은 뒤에도 "그래서 '면도날'이 어쨌다는 거지?"라는 의문이 들 확률이 높은 마지막 7장의 미적지근한 서술 때문에 앞서 400여 페이지 동안 열광했던 마음이 차가워지기 때문이다. 물론 작가는 인도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어 속세로 돌아갈 결심을 한 래리가 정확히 무엇을 깨달았는지 굳이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작가가 선택한 제목 '면도날'에서 이미 제시된 바와 같이, 산다는 건 날카로운 칼날을 끝없이 넘어서는 일이기에 래리가 해답을 구했던 구원 역시 오늘 자신에게 닥친 칼날을 넘어서기 위해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사벨은 사교계 생활로, 소피는 타락한 중독의 생활로, 래리는 구도의 생활로, 어쩌면 애초에 결정된 자기 자신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렇다면 혹시 '면도날'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