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명 지음 / 동아시아
"내 너의 오만방자함을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
사극에서 이런 대사가 나오면 뭔가 통쾌하다. 어떤 방식으로 좌시하지 않을지 궁금해서라기보다는 좌시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천명하는 그 자체에 통쾌함이 있다.
일개 소설가가 전 세계 빅테크 기업들을 향해
"내 너의 오만방자함을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라고 천명한 이 책은,
시작은 서글프고 설복과 공감을 오가며 고양되다가 마침내 '인간'으로서 웅장해지게 만드는,
비문학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탁월한 기승전결의 표본을 갖춘 거의 완벽한 시대 고발서이다.
저자인 장강명은 활동 반경이 폭넓은 작가인데 우선 매일 읽는 신문에서 도서 추천글이나 에세이로 이미 익숙한 작가였다. 하지만 내가 주로 읽어 온 그의 글에는 이토록 현실적이고 다각적이면서도 철학적인 글을 만난 적 없었기에 기대 이상의 필력과 지력에 탐복했다. 게다가 이 책을 완성하기 위해 오랜 시간 취재했을 바둑 기사들의 직접적인 인터뷰 내용들은 저자의 성실함과 책임감을 고스란히 전달해주며 저자의 주장에 신뢰감을 높인다.
간혹 어떤 책들은 굳이 읽어보지 않고 책의 소개글만 읽어도 확신이 오는 경우가 있다. 이 책이 그러했다. 신문에 실린 소개글만 읽고 도서관이 아니라 인터넷 주문 창으로 직행한 몇 안 되는 책들 중 하나이다. 그리고 그 확신 이상의 것들을 책 속에서 만났고, 충만했다.
애초에 나는 빅테크 기업들이 쏟아내는 각종 현혹들에 상대적으로 강자다. 태생이 아날로그 인간이라 대부분의 문명과 기술을 대체로 등지고 산다. 그래서 더욱 무심했다. 빅테크 기업들이 무슨 짓을 하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랴. 장강명은 AI는 다른 문제라고 역설한다. 그의 논거는 확실하고 논리도 탄탄해 나 같은 수수방관자조차 빠져나갈 틈이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잊지 않았다. 이와 같은 시대, 기술 발전이라는 거대한 그림으로 포장되지만 실은 수익성 극대화를 위해 어지러이 내달리기만 하며 인간의 가치와 존엄을 왜곡해 가는 존재적 위기의 시대에 인문학에 몸 담은 그가 해야만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결코 잊지 않고 끝까지 천착했다. 몹시 어려운 일이었을 거로 감히 짐작된다. 무한한 박수를 보낸다.
요컨대 누구에게든 강력히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인간이라면 모두가 알아야 하고 생각해봐야 하고 고민해봐야 할 주제들을 발군의 필력으로 거침없이 정면돌파해 독자의 머리와 심장을 저격한다. 장강명 작가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부디 멀리, 부디 오래, 부디 더 많은 머리와 심장을 뚫고 지나길 기원해 마지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심오한 게 문학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기계는 그런 걸 구현할 수 없다'라고 자신 있게 주장할 수는 없다. 소설을 쓰는 데 필요한 게 창의성이든 문학성이든 뭐든 간에, 그걸 인간만 가질 수 있다고 말할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알파고가 주는 교훈이 바로 그것이다. (47페이지)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다. '인공지능이 그 분야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이다' 같은 고민은, 실제로 그 분야에서 쓸 만한 인공지능이 나오기 전까지만 할 수 있다. 인공지능은 모든 분야에서 게임 체인저가 된다. 인공지능이 등장하면 그 분야의 규칙 자체가 바뀌며, 그때부터 해야 하는 고민은 '이 인공지능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가 된다. 어쨌든 경쟁은 다른 사람과 하는 거니까. (79페이지)
도덕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 인간의 감성을 코끼리에, 이성을 기수에 비유한다. 이성은 자신이 감성을 조종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 위에 올라타 있는 것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하이트는 이성을 감성의 노예라기보다는 변호사라고 설명한다. 감성이 어떤 문제에 대해 옳고 그름을 결정하고 나면 이성은 그런 결정의 근거가 될 적절한 논리를 찾는다. (102페이지)
도스토옙스키의 시베리아 유형 체험을 바탕으로 한 중편소설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 화자는 유형수에게 완전히 무의미한 일을 시키는 게 가장 참혹한 형벌이라고 말한다. 벽돌을 만들고 땅을 파고 집을 짓는 일은 목적이 있고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을 시키면 죄수는 고되더라도 거기에 열중할 수 있다. 심지어 죄수는 그 일을 잘하고 싶어 한다. 도스토옙스키는 "감옥의 모든 죄수들은 자연적인 요구와 자기 보존의 감정 때문에 자기의 일과 기능을 가지게 된다"라고, 죄수 중 많은 사람이 "훌륭한 장인이 되어 세상에 나가곤 했다"라고 썼다. 그러나 흙더미를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쌓게 하고 다시 원래 장소로 옮기게 하는 것처럼 쓸모없는 일을 시키면 인간은 그 무의미함과 모욕과 수치를 견디지 못한다. 그는 그 일을 왜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으며, 잘해야겠다는 의지도 잃는다. (225페이지)
어떤 고통은 삶에서 제거해야 하는 얼룩이 아니다. 그 고통은 삶의 일부이며, 우리 삶은 순백이 아니다. 순백이어서도 안 된다. (298페이지)
어디에서나 외로움을 맞닥뜨리는 이에게, 어디로 도망치더라도 외로움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는 이에게 필요한 것은 더 빠르고 서비스 범위가 더 넓은 차세대 이동통신 기술이 아니다. 그에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힘이다. 외로움을 견디는 힘을 가진 사람은 외로움을 통해 성장하고 건강해진다. 외로움을 견디는 힘을 지닌 사람은 보다 좋은 삶을 살 수 있고, 외로움을 견디는 힘을 모르는 사람은 좋은 삶을 살지 못한다. 사실 좋은 삶을 살려면 어느 정도의 외로움이 꼭 필요하다. (299페이지)
그러는 사이 통신 기술은 외로움을 견디는 바로 그 힘과 다른 사람과 건강하게 연결되는 그 방식 자체를 훼손하고 왜곡한다. 통신 기술은 외로움이라는 개념을 변질시켰다. 외로움은 이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다고 해서 풀리는 문제가 아니다. 외로움은 이제 탁하고 막연하게 편재하는 문제다. 그리고 우리는 그윽하고 감미로운 고독을 잃어버렸다. (300~301페이지)
아무래도 우리는 좋은 삶이 뭔지 모르는 것 같다. 가치 없는 삶보다 가치 있는 삶이 분명 좋은 삶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 재미없는 삶보다는 재미있는 삶이 좋은 삶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바는 그 정도까지다. 우리는 가치가 뭔지, 재미라는 게 뭔지 잘 모른다. 당연히 좋은 삶에 대해서도 모른다. (301~302페이지)
(조지 오웰의 1936년작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서 발췌)
우리가 인간의 자질로 찬미하는 것 가운데 상당수는 사실 재앙이나 고통이나 어려움에 맞서는 과정에서만 발휘될 수 있다. 그런데 기계적 진보의 경향은 재앙이나 고통이나 어려움을 제거하는 것이다. 더 고려해볼 문제는 기계가 압도함에 따라 손상되지 않을 인간 활동이 '과연' 있겠느냐는 점이다. 이 세상을 기계화할 수 있는 한껏 기계화해보라. 그러면 사방 어디에도 당신이 일할 기회, 곧 살 기회를 박탈할 모종의 기계가 있을 것이다. (310페이지)
많은 사람이 그런 정보를 알고 싶어 할 것이고, 그런 정보 혹은 그런 정보를 알려주는 기기를 기꺼이 구매할 것이다. 나는 사람이 기술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파악하는 게 좋은 일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불확실성 역시 소중한 가치임을 우리가 너무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게 아닐까 우려한다. 사람은 불확실한 상태에서만 결단할 수 있다. 그리고 결단을 통해서만 성장하고 운명에 맞설 수 있다. 모든 정보를 아는 상태에서 최적의 해답을 고르는 것은 결단이 아니라 인지능력 테스트다. (324페이지)
여기서 더 나아가, 가치의 근원을 설명하고 우리가 그걸 다룰 수 있게 해주는 인문학이 필요하다. 인간성이 무엇인지, 가치가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으면서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 기술을 만들어달라고 기술자에게 주문할 수는 없다. 인간적인 과학기술을 만드는 것이 과학기술인의 임무라고 말하는 순간, 인간적인 과학기술을 규정할 권리를 과학기술인에게 넘기게 된다. 지금 많은 사람이 바로 그런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기술이 가치를 이끄는 게 아니라 가치가 기술을 이끌어야 한다. 그런데 가치란 대체 뭘까? 우리는 놀라울 정도로 모른다. (335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