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첫출발

풍속생활연구 - 사생활정경 제6권

by 글섬


작품 배경


애초 인생의 첫 출발(Un début dans la vie)은 1841년 9월, 《가족 박물관(Musée des familles)》이라는 한 잡지의 주문에 의해 시작되었다. 늘 빚에 쪼들리는 고달픈 처지에서 주문을 수락하긴 했지만 마땅한 소재를 찾지 못해 고민하던 발자크에게 여동생 로르 쉬르빌(Laure Surville)은 자신이 쓴 단편, 〈뻐꾸기 여행(Le voyage en coucou)〉의 초고를 넘겨준다. 발자크의 유년 시절 그의 유일한 친구였고 훗날 최초로 그의 전기를 쓰기도 한 로르는 ‘르리오’(Lelio)라는 필명으로 이미 여러 편의 동화를 발표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로르의 원고를 토대로 발자크는 단숨에 60장 분량의 소설을 써내려간다. 신분을 감춘 채 합승 마차에 탄 백작, 주인을 속이는 집사, 가짜 군인과 허풍쟁이 화가, 경솔한 청년, 들통 난 거짓말, 수년 후 마차에서의 재회 장면 등 많은 요소들이 로르의 단편에서 고스란히 따온 것들이다. 1842년 5월 발자크는 로르가 붙인 제목 그대로 〈뻐꾸기 여행〉을 마무리한다.


그러나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이유로 인해, 《가족 박물관》이 급작스레 작품의 게재를 포기하자, 그해 7월 발자크는 새로 창간된 《라 레지스라튀르(La Législature)》라는 잡지에 자신의 작품을 연재한다. 이때 그는 〈속임수의 위험(Le Danger des mystifications)〉으로 제목을 수정하고, 이미 썼던 분량, 다시 말해서 오스카르(Oscar)가 프렐르(Presles) 여행에서 집으로 쫓겨 오기까지의 과정을 아홉 개의 장으로 나눈 다음, 새로 다섯 장을 추가한다. 법률 서기의 생활과 플로랑틴(Florentine)의 주연 장면, 오스카르의 군대 생활은 이때 처음 구상된 것이다. 1842년 7월 26일부터 9월 4일까지 작품 연재를 마친 발자크는 이를 하나로 묶어 1844년 6월 〈인생의 첫출발〉이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판한다. 이것이 1844년 《뒤몽(Dumont)》 초판이다. 1844년 9월부터 발자크는 또 한 번의 손질을 가한 다음, 『인간희극』의 「사생활 정경」의 제4권에 작품을 편입시키면서 14장으로 나뉘어 있던 장의 구별을 없앴다. 이것이 1845년 《퓌른(Furne)》 판본이다.


발자크가 로르의 짤막한 단편에 살을 붙이고, 상투적인 소설 속의 정형화된 인물들에 단단한 현실감과 생기를 불어넣고, 또 뒷부분을 첨가하기는 했지만, 소설의 줄거리만을 따진다면, 발자크의 작품은 로르 작품의 ‘개정증보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물정 모르던 오스카르 위송(Oscar Husson)은 세상을 배우고, 건달 조르주(Georges)는 끝내 신세를 망친다는 소설의 결말 또한 애초 로르가 의도했던 교훈적 주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주제 자체가 ‘독창적’이지 않다는 것, 혹은 줄거리가 평범하다는 사실이 어쩌면 문제의 핵심으로 우리를 인도해주는 것일 수도 있다. 문제의 핵심이란,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그 자체나 사건들의 짜임새는 아니라는 점이다. 누이의 단편을 거의 그대로 뒤쫓아 가는 듯이 보이면서도, 발자크는 원래의 모델과는 전혀 다른 도착점에 이르게 된다. 하나의 소박한 교훈담이 발자크의 손에서 다시 빚어져 새로운 폭과 깊이를 갖게 되는 그 이채로운 변모의 과정은 어찌 보면 그 어느 작품보다 더 발자크 소설의 본질에 접근토록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단지 로르의 소설이 문제를 개인적 차원에서 그려내는 데 반해, 우리가 알다시피 발자크는 주인공이 당대 현실과 맺는 역사적, 사회적 관계에 주목하여 하나의 사회적 전형을 창조해냈다는 상식적 진술을 넘어선다. 물론 여기서도 발자크는 그의 소설이 늘 그러하듯, 그 어떤 사회 비평가보다도 더 날카롭게 당대의 사회를 비판, 분석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발자크에 의해 작품이 발표되고 12년 뒤인 1854년, 로르 쉬르빌은 마침내 작품에 자신의 이름을 서명한 뒤 그 서문에서 “〈뻐꾸기 여행〉은 〈인생의 첫출발〉의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는 각별한 영광을 누렸다. 명민한 연금술사의 손을 거치자 가짜 보석이 다이아몬드로 바뀌었다.”고 밝히고 있다. 로르의 겸양을 엿보게 하는 이러한 진술은 그러나 자신의 원본과 새로운 ‘복사본’ 사이에 생겨난 거리를 인식한 한 작가의 솔직한 고백이기도 하다.




드 세리지 백작(Comte de Sérisy)은 모두에게 속고 있다. 백작 부인은 부정을 저지르고 있고, 그의 영지인 프렐르(Presles)에서 집사 일을 맡고 있는 모로(Moreau)도 백작에게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에 땅을 팔기 위해 소작인 레제(Léger)와 공모하고 있었다. 이 소문을 접한 백작은 이를 확인하기 위해 신분을 위장하고 영지에 가보기로 결심한다.


파리(Paris)에서 릴라당(L’Isle-Adam)까지 가는 피에로탱(Pierrotin)의 시골 합승마차에 밀행 중인 백작을 비롯한 손님들이 하나둘 도착하기 시작한다. 여섯 시간이나 되는 여행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한 승객이 이야기를 꺼낸다. 그는 자신이 워털루에서 나폴레옹(Napoléon)과 함께 싸웠고, 동양을 떠돌며 모험을 하다 돌아오는 길이라고 떠들어댄다. 그러나 사실 그는 드 세리지 백작의 일로 심부름을 가는 공증인 사무소의 이등 서기일 뿐이다. 드 세리지 백작의 성관에 실내장식을 맡은 무명 화가 역시 이에 질세라, 유명한 화가의 이름을 사칭하며 그리스 여행 중에 눈이 맞은 한 여자 때문에 죽을 고비를 넘겼다며 허풍을 떤다.


이 두 입심 좋은 승객의 거짓 무용담은 보잘것없는 현실 속에서 지어낸 헛된 꿈이었을 뿐이지만, 처음으로 혼자서 여행길에 나선 19세의 오스카르 위송(Oscar Husson)은 그 이야기에 우매하게 몰입한다. 그는 자신의 초라함을 숨기고 으스대고 싶은 마음에서 자신이 드 세리지 백작의 아들과 막역한 사이라며, 백작의 치부를 드러내고 백작 부인의 바람기에 대해 떠들어댄다. 하지만 사실 그는 모로를 만나러 프렐르로 가는, 모로의 사생아일 뿐이었다. 이를 들은 백작은 분노하고, 그 와중에 집사와 소작인의 음모도 확인하게 된다. 결국 오스카르의 경솔한 입놀림은 집사의 파면을 불러온다.


오스카르는 용케 외삼촌의 도움으로 공증인 사무실의 견습생으로 들어간다. 혹독한 수련시기를 거쳐 드디어 정식 서기가 되려는 시점에서, 오스카르는 또 한 번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되풀이한다.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은 사교계의 향연에서 노름을 하다가 사무실의 공금을 잃고 쫓겨난 것이다.


결국 더 이상 오갈 데 없는 오스카르는 군에 입대한다. 앞서 프렐르 여행에서 그 가짜 동양의 이야기에 넋을 잃던 오스카르는 성년의 나이에 드디어 알제리(Algérie) 원정에 나서지만, 그러나 그 여행은 그가 꿈꾸었던 낭만적인 모험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알제리 전투에서 그는 한쪽 팔을 잃고 불구의 몸으로 돌아온다. 그 대가로 그는 서른 살에 레지옹 도뇌르(Légion d'honneur) 훈장의 수훈자가 되고, 시골 세리(稅吏)가 되어 돌아온다.


1837년 다시 프렐르로 돌아가는 오스카르는 피에로탱의 승합마차에서 첫 여행의 동행자들과 재회한다. 15년의 세월이 흐르는 그 사이에, 고작 마차 두 대를 부리는 영세한 운송업자였던 피에로탱은 ‘보몽(Beaumont)의 부르주아’로 성장했고, 소작농이던 레제 영감은 백만장자가 되었으며, 무명 화가 조제프 브리도(Joseph Bridau)와 레옹 드 로라(Léon de Lora)는 명성을 얻었고, 드 세리지 백작의 집사였던 모로는 ‘우아즈(Oise)의 국회의원’이 되었다. 얼치기 자유주의자로서 방탕한 생활 끝에 보험 행상인으로 전락한 조르주 마레(Georges Marest)를 제외하면, 부르주아 계층에 속한 인물 모두가 사회적 상승을 경험한 셈이다. 이제 드 세리지 백작의 시대는 끝이 났고 부와 명예는 ‘재능과 투기’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투기와 책략, 이익을 쫓는 예민한 행동을 통해 획득된 그들의 신분 상승은 장엄함, 위대함과는 참으로 거리가 먼 것이다.





분석


발자크의 소설은 그 첫 줄에서부터 로르 쉬르빌의 단편에서 벗어난다. 발자크는 여행의 여정을 자신이 잘 아는 파리-릴라당 노선으로 정하고, 곧 소멸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장비’인 시골 합승마차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물론 현대 소설 발생기의 작가답게, 그리고 체질적으로 수다스러운 작가답게 발자크는 작품의 서두에서 19세기 대중교통 수단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행하며, 상황을 제시하고, 인물들을 소개하기도 하는데, 다른 어떤 소설에서보다 이 소설의 경우 그러한 사전 준비 작업이 소설의 줄거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머지않은 장래에 철도로 인해 어떤 업종들은 멸종될 것이고, 또 다른 몇몇은 그 면모가 일신될 것”이라는 소설의 첫 문장은, 근대화의 촉매로서의 철도가 가져올 격변에 대한 예언으로 읽힌다. 발자크는 소설의 초입에서 자신의 작품이 사라져가는 시대를 증명하는 ‘고고학적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라 했지만, 오히려 이 작품은 미래에 대한 예언자적 안목으로 인하여 더 큰 가치를 부여받는 듯하다. 따라서 〈인생의 첫출발〉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구체제의 종말, 대혁명, 나폴레옹의 제1제정, 부르봉 왕가(Maison de Bourbon)의 왕정 복귀와 같은 과거 속의 사건들이라기보다는, 산업혁명이 바꿔놓기 시작한 새로운 프랑스의 모습이다. 새로운 교통수단인 기차의 등장, 강력한 자본의 집중과 경쟁, 기술의 발달과 같은 자본주의의 거침없는 진전은 근대적 시간으로의 편입과 더불어 낭만적 영웅주의의 종언을 고하는 것임을 발자크는 탁월한 직관으로 읽어낸다.


서두의 장황한 설명이 끝나면, 피에로탱의 손님들이 하나둘 도착하기 시작한다. 마차가 출발하기 전 발자크는 피에로탱과 드 세리지 백작, 클라파르 부인(Madame Clapart), 모로의 과거사를 설명한다. 발자크는 평면적 성격을 가진 로르의 작중 인물들에게 각각의 과거와 미래를 부여하며 하나하나의 인물들을 살려낸다. 가령 로르 쉬르빌의 이야기 속에서 마차꾼인 티에리(Thierry)는 소설의 서두에서 새로 장만해야 할 마차에 대해 아주 잠깐 언급하지만, 그것은 막연한 꿈일 뿐이고 그에 대한 언급은 두 번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반면에 발자크의 마차꾼인 피에로탱은 경솔하게 주문한 마차 때문에 계약금마저 잃게 될 처지에서 안절부절못하다가 드 세리지 백작의 후한 사례 덕택에 궁지에서 벗어나게 된다. 피에로탱의 개인적 근심과 백작의 개인사가 서로 이어지게 되는 셈이다. 이렇듯 발자크는 사건들 사이사이에 연결의 끈을 만들어내고, 개인사 속에 역사적 사건들을 끼워 넣는다. 드 세리지 백작, 클라파르 부부, 모로, 조르주 마레 모두 역사적 사건과 밀접한 개인사를 갖고 시대의 전반적인 흐름에 이끌려간다.


발자크는 소설을 끝낼 무렵 오스카르의 ‘수련’ 과정이 갖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프렐르 여행의 모험은 오스카르에게 신중함을 주었고, 플로랑틴의 파티는 그의 청렴성을 강화시켰으며, 군대 생활의 혹독함은 그에게 사회적 위계와 운명에 대한 순종을 가르쳐주었다. 현명하고 유능해진 그는 행복했다.” 오스카르 위송은 『인간희극』에서는 보기 드문, 자신의 범용함만으로 자기실현에 성공하는 인물이다. 애초부터 그에게는 세상과 반목하는 젊은 주인공이 갖추어야 할 그 어떤 진정성이나 숭고함이 결여되어 있다. 세상과 닮고, 세상과 통한다는 점에서 그는 철저히 통속적이다. 이러한 통속성은 오스카르에게 극적인 성공이나 열정적인 사랑의 이야기를 마련해주지도 않지만 비극적 운명의 구렁텅이를 비껴가도록 하는 안전장치가 되기도 한다. 요컨대 오스카르는 현실과 불화함으로써 현실의 희생양이 되거나 혹은 현실의 불합리함을 조롱하는 우월한 위치에 서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스카르가 반성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터득하게 되었다는 ‘중용’은 많은 것을 설명해주는 요소이다. “오스카르는 평범하고 온화하며 젠체하지 않고 겸손하며, 당시의 정부가 그러하듯 언제나 중용을 지키는 인물이다. 그는 시기심도 경멸감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요컨대 그는 현대적인 부르주아이다.” 발자크는 대혁명과 나폴레옹에 의해 일깨워진 모든 긍정적인 에너지가 소멸된 사회와 모든 것을 비루하게 만들어버리는 사회적 순응주의를 비관하기 위해 오스카르 위송을 하나의 전형으로 삼는다. 오스카르 위송은 기회주의적 부르주아지의 대변자로서 우연에 몸을 맡기며 다가오는 기회를 탐색한다. 역사적 전망이 닫혀버린 사회에서의 혁명은 도박이나 다를 바가 없다. 복고 왕정의 장교로 근무하던 오스카르가 1830년 7월, 민중의 편으로 돌아섰을 때, 그의 행동을 결정지은 것은 어떤 정치적 신념이나 주의주장이 아니라 귀족에 대한 열등감이었다. 오스카르의 우연한 선택은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가져다준 반면, 조르주 마레는 이 일시적인 모험, 이 역사적 우연 덕분에 재산을 탕진한다.


발자크가 이 소설에서 그려내고자 한 것은 오스카르라는 한 범용한 개인의 성장과 일생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1830년 이후의 젊은이들의 인생에 관한 이야기, 미래에 득세하게 될 ‘중용적 부르주아’의 모습이다. 이 소설에서 발자크는 오스카르가 인생을 터득해가는 과정을 통해 현대 부르주아지의 존재 형태를 매우 비판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1830년 이후 기득 세력으로 변모한 부르주아지의 기회주의와, 점차 한심한 모습으로 축소되어가는 사회의 전형으로서의 오스카르는 현대 소설의 핵심적 형상들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감정 교육(L'Education Sentimentale)〉의 프레데릭 모로(Frédéric Moreau)를 준비한다.




▶ 이 글의 줄거리는 제가 번역한 내용이 아니라, 〈인생의 첫출발〉(발자크 저, 선영아 역, 문학과 지성사 대산세계문학총서, 2008)의 내용을 제 나름대로 압축해 줄거리 형태로 요약한 것입니다.

▶ 볼드 처리된 문장은 〈인생의 첫출발〉의 역자가 번역한 표현을 그대로 인용한 문장입니다.

▶ 작품 배경 및 분석은 〈인생의 첫출발〉의 역자가 제공한 내용을 발췌, 편집한 내용입니다.

(고전문학이기에 독자의 이해를 돕는 데 필수적인 내용으로 판단되어 굳이 발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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