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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빛 눈의 여인

풍속생활연구 - 파리생활정경 제4권

by 글섬

작품 배경


〈13인당 이야기〉의 세 번째 에피소드인 〈황금빛 눈의 여인(La Fille aux yeux d'or)〉은 1834년 4월경에 1부가 소개된 후, 2부와 3부는 그 이듬해인 1835년 5월에 발표되었다. 이 소설은 동성애 혹은 양성체라는 대담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발자크가 이 소설을 쓸 당시 1834년경에는 이러한 주제가 상당히 인기 있는 주제였다. 당시 파리 사교계에서 여성 동성애의 실례가 심심찮게 존재했었는데, 발자크는 아마도 1833년경, 조르주 상드로부터 버림받고 절망에 빠져 있던 쥘 상도에게서 조르주 상드와 여배우 마리 도르발의 은밀한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발자크는 이미 1830년경부터 양성체에 대해 적잖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남자이면서 여성의 몸과 목소리를 지닌 가수 잠비넬라를 사랑했던 한 조각가의 이야기 〈사라진(Sarrasine)〉을 발표한 것은 1831년의 일이다. 1832년 한스카 부인과의 사랑이 시작되고, 그녀가 신비주의 종교에 매료되어 있음을 알게 되면서부터 그는 원래도 어머니의 영향으로 종교 철학에 관심이 많았기에 다시금 천사적 존재에 대해 관심을 품게 되었다. 한스카 부인의 신비주의적 종교가 발자크의 글쓰기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발자크에게 ‘무한, 하늘, 신비, 순수’ 등은 이국의 귀부인을 붙잡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황금빛 눈의 여인〉은 욕망이 꿈틀대는 지옥과도 같은 파리라는 무대에서, 지상에서는 구현될 수 없는 양성체의 파멸을 그리고 있다.


발자크는 이 소설을 화가인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에게 헌정했다. 발자크는 1824년경부터 들라크루아를 알고 지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화가에게 무한한 존경을 표했고, 화가는 발자크의 〈루이 랑베르〉에게 찬사를 보냈다. 〈황금빛 눈의 여인〉을 쓰던 1834년 당시 살롱전에 〈방안에 있는 알제의 여인들〉이 출품되어 전시되었는데, 작가는 이 그림에 표현된 하렘 내부의 강렬한 색체와 열정이 담긴 정경에서 영감을 받았다.




작가는 파리라는 공간에 살고 있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분석하는 데 전반부의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파리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일하는 자와 일하지 않는 자. 즉 바쁘게 사는 사람과 한가한 사람이다. 그러나 예술가는 별도이다. 그 분류의 근거는 돈이다. 그런 다음, 발자크는 파리에 사는 사람들을 다섯 가지로 분류한다. 우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노동자들이 있다. 그들은 자본가에게 착취당하여 노동과 악덕으로 추해진다. 그들의 악덕은 술이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부지런히 일을 하고 돈을 절약하면서 계급상승을 꿈꾸는 프티부르주아들도 있다. 두 번째 부류에 속하는 이들은 무엇인가 가진, 그러나 역시 과도한 노동과 야망으로 몸을 망친 자들이다. 세 번째 부류로는 사업가들이 있다. 그들은 항상 과도한 일과 더불어 과도한 오락과 쾌락으로 사고가 우둔해진 자들이다. 그들은 허영심에 차 있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뿐인데, 그것은 자식을 귀족과 결혼시키는 것이다. 예술가들은 네 번째 부류에 속한다. 발자크는 예술가들을 문명의 희생자로 본다. 그들 역시 쾌락에 목마르고 허영심이 많다. 그들도 과도한 작업으로 소진된다. 마지막 부류에 속하는 인물군은 바로 한가롭고 여유 있는 귀족들이다. 번쩍거리는 그들의 살롱이야말로 허영과 쾌락을 추구하는 왕국이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모두 마모되어 권태롭고 무기력해진다.


이렇듯 파리에서 하층민들은 살기 위해 과도하게 움직이고, 두 부류의 부르주아지들은 몸을 망가뜨려가면서 취한 이득을 타락을 위해 낭비하고, 예술가들의 사유는 너무도 냉혹하며, 상류층 사람들은 끊임없이 과도한 쾌락을 추구한다.


그러나 파리에는 일부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여자들이다. 그 어느 곳보다 용모가 추악해질 수만 가지 비밀스런 이유가 존재하는 파리에서 미모를 유지할 줄 아는 소수의 여인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여인들은 길거리를 걸어 다니지 않고 항상 어디엔가 숨어 있다. 진실한 감정을 만나기 어려운 파리에도 고귀한 우정이나 한없는 헌신이 존재한다. 드문 경우지만 파리의 상류 귀족 중에서 종종 예외적으로 좋은 교육을 받고 훌륭한 풍습을 익힌 매력적인 얼굴의 젊은이들을 만나게 된다. 윤기 없고 수심이 가득한 대부분의 사람들 사이에서 이들의 반짝이는 얼굴은 단연 돋보인다. 때문에 여인들은 쾌락을 갈망하면서 그 젊은 청년들을 찬미한다.


어느 화창한 봄날, 날씨만큼이나 아름다운 한 청년이 튈르리(Tuileries) 공원의 대로를 산책하고 있었다. 앙리 드 마르세(Henri de Marsay)라 불리는 이 청년은 어느 귀족의 사생아로, 생부를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 어머니 역시 파리 사교계에 과도하게 충실했던 바람에 그는 가난한 어느 사제에게 맡겨졌다. 이 사제는 학교에서 십 년 동안 배울 것을 삼 년 만에 다 가르쳤다. 교회에는 거의 가지 않았던 이 사제는 제자가 다양한 측면에서 문명을 습득하도록 가끔씩 제자를 은밀한 곳으로 데려갔고, 창녀들이 있는 곳에는 더 자주 갔다. 말하자면 이 신부는 “행실은 나쁘지만 정치적이고, 신은 안 믿지만 유식하고, 신의는 없지만 매력적이고, 겉으로는 나약해 보이지만 머리도 몸도 강인한” 인물이었다. 그는 제자에게 인간의 감정을 하나하나 분석해주었고, 살롱 한가운데에서 정치를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파리 최고 사교계의 몇몇 인사들을 소개해주었는데, 이는 금전으로 환산하면 막대한 연금을 안겨준 것과 다름없었다. 그리하여 겨우 열여섯 살 무렵부터 마르세는 매력적인 외모 밑에 “쇠처럼 차가운 마음과 술에 절어 망가진 두뇌”를 숨기고 있었다. 그는 남자도 여자도 신도 악마도 믿지 않았다. 변덕스러운 본성을 타고 난데다 신부가 그를 파멸의 길로 이끌었던 것이다. 1814년 말경 스물두 살의 앙리 드 마르세는 파리에서 가장 잘생긴 청년으로 군림했다. 여자들은 모두 그에게 홀딱 빠져버렸다.


마르세의 생부에게는 수많은 여자가 있었다. 따라서 마르세와 꼭 닮고, 그처럼 매력적인 얼굴을 한 자식도 여섯 있었다. 그들 중에 부유한 스페인 귀족 부인과의 관계에서 태어난 여자애가 하나 있었다. 이 여자애와 마르세는 서로 형제지간임을 알지 못했다.


1815년 화창한 봄날에 튈르리 공원을 걷고 있던 마르세는 친구인 폴 드 마네르빌(Paul de Manerville)과 우연히 마주친다. 마르세는 폴에게 지난 목요일에 바로 이 공원에서 마주쳤던 어느 미지의 여인에 대해 얘기한다. 황금빛이 도는 그녀의 눈은 마치 호랑이 눈처럼 반짝이면서도 생각에 잠긴 듯이 보이고, 그런가 하면 사랑받기를 원하는 황금을 연상시키는 신비한 노란색 눈이었다는 것이다. 그러자 폴은 그 ‘황금빛 눈의 여인’은 이미 모르는 사내가 없을 만큼 유명한 여인이라며, 오히려 그녀 옆에 함께 붙어 다니는, 구리빛 얼굴에 불타는 검은 눈의 여자가 그녀보다 훨씬 더 멋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마르세는 그녀가 스페인 노파와 함께 있는 것만 보았을 뿐이다.


바로 그때, 그녀가 나타났다. 마르세 말대로 그녀 곁에는 스페인 노파가 있었다. 황금빛 눈의 그녀는 앙리를 보자 눈이 반짝이더니 얼굴을 붉히며 그대로 그냥 그를 지나쳐 가는 듯하더니, 찰나의 순간에 그녀의 손이 마르세의 손을 잡았다 놓았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뒤돌아보면서 열정적으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는 노파의 손에 이끌려 걸음을 옮겼다. 마르세와 폴은 그녀를 뒤따라갔다. 공원 철책문 앞에 가문의 문장이 찍힌 훌륭한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황금빛 눈의 여인은 마차에 오른 뒤 노파 몰래 손수건을 흔들어 마르세에게 공개적으로 ‘따라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마르세는 뒤따라오는 삯마차를 잡아타고 그녀의 마차를 뒤쫓았다. 그 마차는 생 라자르(Saint-Lazare) 가에서 가장 아름다운 저택으로 들어갔다.


마르세는 신중한 사내였다. 그는 생 라자르 가를 지나 자신의 저택으로 갔다. 다음날 그는 가장 신뢰하는 하인인 로랑(Laurent)을 시켜 그녀에 대해 알아보았다. 로랑은 우편배달부를 매수해 다양한 정보를 입수해왔다. 그녀의 이름은 파키타 발데스(Paquita Valdès)였고, 그녀가 살고 있는 저택은 스페인의 대귀족인 산 레알(San-Réal) 후작의 소유였다. 이 저택은 여러 명의 하인들과 개들로 출입이 철저하게 통제되어 있으며, 특히 그녀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노파는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장애물이었다. 그런데, 그 저택의 위쪽 정원이 옆집 정원과 맞붙어 있는데, 그 집이 바로 뉘싱겐(Nucingen) 남작의 저택이었고, 뉘싱겐 남작은 마르세와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지금껏 그가 원하기만 하면 모든 여자를 다 얻을 수 있었던 마르세는 넘어서야 할 장애물이 많은 그녀의 악조건에 오히려 강한 흥미를 느꼈다. 며칠 후 또 다시 공원 산책로에서 마주친 그녀는 이번에도 마르세의 손을 매우 빠르게 꼭 잡았다 놓고 지나간다. 그는 순식간에 온갖 종류의 흥분된 감정이 끓어올라 기필코 그녀를 갖고야 말겠다는 정복욕에 휩싸인다. 그러나 마르세를 향한 그녀의 뜨거운 시선을 눈치 챈 노파가 노기를 띠고 스페인어로 뭐라 뭐라 말하는 것 같더니, 다음 날부터 파키타는 공원에 나타나지 않는다. 마르세는 우편배달부를 매수해 그녀 앞으로 온 편지를 개봉해 그가 쓴 연애편지와 바꿔치기 한다. 마르세는 편지에다 옆집 뉘싱겐 남작 저택의 정원으로 편지를 떨어뜨리라며, 그렇지 않으면 그의 충복인 로랑이 아침 열 시에 벽 너머로 아편이 담긴 약병과 잉크가 담긴 약병을 미끄러뜨릴 테니 아편으로는 그 노파를 잠재우고, 잉크로는 편지를 써 보내면 된다고 쓴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마르세의 편지가 전달되고, 오후 두 시에 마르세는 흑백 혼혈의 위협적인 인상을 풍기는 한 사내의 방문을 받는다. 그는 마르세가 파키타에게 쓴 편지를 꺼내 내민다. 그런 다음, 함께 온 통역사를 통해 내일 저녁 열 시 반에 어느 카페 앞에 가면 마차가 한 대 대기하고 있을 테니 그 마차를 타라고 지시한다. 만일 이 비밀을 누설하면 죽여 버리겠다는 경고도 덧붙인다.


마르세는 시간에 맞춰 카페로 가서 마차에 올랐다. 마차가 도착한 곳은 여러 가구가 모여 살다 떠난 듯, 을씨년스러운 모습의 축축하고 악취 나는, 비어 있는 아파트였다. 마부의 안내로 도착한 방에는 사창가를 연상시키는 휘장들이 처져 있었고, 한쪽 구석에는 추레한 차림새의 노파가 앉아 있었다. 그리고 안락의자에는 관능적인 목욕가운을 걸친 파키타가 앉아 있었다. 마르세는 파키타의 절대적인 아름다움 앞에서 완전히 얼이 빠져버렸다. 그녀를 통해 최고의 쾌락이 구체적인 현실로 형상화된 듯한 느낌이었다. 파키타와 마르세는 둘 다 똑같이 격렬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파키타는 프랑스어를 할 줄 몰랐기에 두 사람은 영어로 대화했다. 그녀는 노파는 파키타의 어머니이고, 그들에게는 열이틀밖엔 시간이 없었다고 말했다. 열이틀 후에는 다른 사랑에게 가야 한다는 의미가 엿보이는 말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자신만의 여자가 아니라면 죽여 버리겠다며 자신만의 여자가 되어달라고 애원했다.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힌 파키타가 노파의 품으로 무너지더니 “목소리가 똑같아. 이렇게 격렬한 것도 똑같아.”라는 알 수 없는 말을 스페인어로 반복했다. 이윽고 파키타는 이제 곧 스페인 노파가 깨어날 시간이라 오늘 저녁은 안 되고, 이틀 후 똑같은 장소에서 같은 마차를 타고 오라고 이른 뒤 그를 뱀처럼 휘감아 끌어안는다. 앙리는 짜릿한 현기증이 일었다.


앙리는 그녀와의 단 한 번의 입맞춤으로 신비로운 성적 쾌락을 느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뭔가 모르게 불길하고, 끔찍함과 성스러움, 지옥과 천국이 결합된” 듯한 뭔가에 홀려버린 것만 같아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미 웬만한 쾌락에는 무감각해진 그였지만, 파키타가 뿜어내는 열기는 이제껏 상상해본 적도 없는 것이었기에 그는 쾌락의 황홀경에 빠져 오로지 그녀만을 열망했다.


이윽고 그녀와 약속한 바로 그 저녁 시간이 되었다. 이번에는 스카프로 그의 눈을 가린 다음, 마차가 어딘가 도착하자 그를 들것에 싣고 갔다. 향기 가득한 어느 방에서 눈을 가린 스카프를 풀자 눈앞에 하연 나이트가운을 입은 관능적인 파키타가 서 있었다. 고상하고 우아하게 장식된 방이었다. 앙리는 그녀의 몸에 취해 먹이를 보고 달려드는 독수리처럼 그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파키타는 너무도 관능적인 그윽한 눈빛으로 그를 그녀의 취향대로 꾸미고 싶다고 말했다. 앙리가 허락하자 그녀는 옷장에서 붉은색 벨벳 드레스를 가져와 그에게 입히고, 여자용 모자를 씌우고, 숄을 둘러준다. 이 요사스럽고도 숭고한 여인은 쾌락에 조예 깊은 앙리가 알고 있는, 소위 사랑이라는 감각의 시정을 훌쩍 뛰어넘었다.


이윽고 혼란으로 가득 찬 도취와 마비 상태에 이끌려 금지된 사랑의 쾌락이 끝났다. 그녀는 앙리에게 이제 자기는 죽었다며, 하지만 이 행복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며 내일 다시 보자고 말하고는 그를 꼭 껴안았다. 그는 그 포옹에서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앙리는 다시 눈이 가려진 채 돌아왔다. 이제껏 맛보지 못했던 강렬한 쾌락이 주는 노곤함과 감미로운 몸의 나른함을 되새기면서 담배를 한 개비 피우고 난 그는 그녀가 그저 쾌락에 취하면 공포를 연기하는 취향이라고 치부해버렸다.


다음 날 점심을 먹으며 어젯밤에 벌어진 일을 차분히 되짚어보던 마르세는 파키타가 자신을 가지고 놀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쾌락이 절정에 달한 순간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들을 감안할 때 그녀에게 그는 다른 누군가의 대용품임에 틀림없었다. 그는 몹시 기분이 상했다. 그는 기분전환을 위해 도박장으로 가서 파키타와 만날 저녁시간이 될 때까지 돈을 따고 잃기를 반복했다.


이윽고 또 다시 눈이 가려진 채 실려 갔다. 눈을 가린 스카프가 걷히자 어제와는 달리 무척 창백한 얼굴의 파키타가 보였다. 그녀는 앙리에게 그냥 이대로 여기에 있으면 죽게 된다며 자신을 데리고 어디로든 도망쳐달라고 간절히 애원했다. 앙리는 파리를 떠날 수는 없는 입장이니 다른 은신처를 마련해주겠다고 제안했다. 파키타는 공포에 휩싸여 부들부들 떨면서, 자신은 지금껏 남자라는 존재를 증오하도록 교육 받았다고, 그래서 남자들은 다 괴물이라고만 생각해왔는데, 그런데 앙리는 너무 아름다웠다고, 여태껏 살아 있다는 게 뭔지, 서로 사랑한다는 게 뭔지도 모르고 살았는데 그를 통해 이제야 알게 되었다고, 그러니 그를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으니 제발 자기를 데리고 가달라고 애원한다. 앙리는 그녀의 진실한 애원에, 한낮에 그녀에게 느꼈던 모욕감을 떨쳐버렸다.


파키타는 어제와는 또 다른 쾌락을 선사했다. 앙리는 환락의 절정을 향해 가며 완전히 정신을 잃고 있었다. 그러나 앙리가 모든 것을 다 잊고 쾌락의 절정에 도달한 바로 그 순간에 그녀는 “오! 마리키타!”라고 외쳤다. 앙리는 모욕감으로 인해 단도로 가슴을 찔린 듯한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 그는 격분해 길길이 날뛰며 단도를 찾았지만 찾지 못했기에 단도 대신 넥타이를 집어 들었다. 파키타는 그가 넥타이로 자신의 목을 조르려 한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두 사람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졌다. 찰나의 틈을 타 파키타가 경보음 장치를 누르자 혼혈 사내가 나타나 그를 단숨에 제압했다. 파키타가 앙리에게 자신을 죽이려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지만 앙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파키타는 앙리의 냉정함에 절망했고, 혼혈 사내는 끔찍하리만치 무서운 의미심장한 눈으로 앙리를 쏘아봤다.


집으로 돌아온 앙리는 일주일 넘게 집을 비웠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 덕분에 그는 혼혈 사내의 분노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한 남자를 사랑했고 그 남자에게 모든 것을 걸었던 불쌍한 여인의 죽음을 초래했다. 일주일 뒤 집으로 돌아온 앙리는 한밤중에 마차를 타고 산 레알 저택 정원의 작은 문으로 갔다. 그곳에는 세 명의 남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중 데보랑 비밀결사의 수장인 페라귀스가 앙리에게 자신들이 손쓰기 전에 복수가 이미 끝났더라고 말했다. 마르세는 직접 확인해보기 위해 불이 켜진 후작부인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문을 열자 그는 일순 흠칫 했다. 방안에는 선혈이 낭자했다. 파키타는 피에 잠겨 숨졌다. 사방에는 파키타가 저항한 흔적과 매질당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곳곳에 피투성이가 찍힌 손자국들과 발자국들이 앙리로 인해 삶이 너무도 소중해진 파키타가 어디로든 달아나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안간힘을 썼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후작부인은 노기가 가득한 얼굴로 온몸은 피투성이가 된 채 헐떡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가 죽인 제물의 뜨거운 피에 취해 앙리를 보지 못했다. 파키타를 내려다보며 격렬하게 비난과 저주를 퍼붓던 후작부인은 이내 극도로 절망에 빠져 소파로 무너지며 파키타의 죽음을 고통스러워했다. 그러다 비로소 그녀는 앙리를 발견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를 바라보다가 그만 얼어붙어버렸다. 쌍둥이 형제처럼 서로 꼭 빼닮았던 것이다. 그녀는 마르세의 생부가 스페인 귀족 부인과 낳은 바로 그 여자애였다. 그 순간, 흉측한 얼굴의 파키타 어머니가 들어왔지만 후작부인이 장롱에서 금이 담긴 자루를 꺼내 발밑에 던져주니 노파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앙리는 이복 여동생에게 이 기막힌 사건의 흔적을 어떻게 지울 거냐고 물었다. 후작부인은 노파를 가리켰다. 앙리가 언젠가 다시 만나자고 인사하며 그곳을 떠나려 할 때 그녀는 절대적이고 무한한 것으로 보였던 존재를 잃었기에 그 무엇으로도 위로받을 수 없는 자신은 이제 스페인으로 돌아가 수도원에 은둔할 거라고, 그러니 다시 만나지 못할 거라고 말했다. 앙리는 두 팔로 그녀를 안아준 뒤 그곳을 떠났다.




분석


발자크는 이 소설에서 파리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을 통해 진정한 파리의 생리학을 전개한다. 파리는 거대한 쾌락의 아틀리에요, 끔찍한 욕망의 장소이다. 이곳에서는 모두가 오로지 ‘황금’과 ‘쾌락’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혀 있다. 온갖 종류의 인간이 모두 황금과 쾌락만을 추구하는 타락의 도시 파리에서 파키타의 양성성은 그러한 타락상을 보여주는 징후이기도 하다. 자연에 반하는 그녀의 사랑은 피로 얼룩진 끔찍한 파국을 초래하며, 이는 파리의 퇴폐적 현실에 대한 메타포다. 발자크는 이 소설을 통해 왕정복고 말기에 멸망해가는 사회의 병적 징후를 그린 것이다.


〈황금빛 눈의 여인〉은 파키타, 마르세, 산 레알 부인, 이 세 사람의 사랑과 질투와 복수의 드라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오누이를 동시에 사랑했던 파키타가 있다. 아름답고 관능적인 모습이나 자태, 유혹의 몸짓과 태도로 보아 파키타의 여성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뿐만 아니라 사랑의 취향 역시 남성을 선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앙리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전통적 의미에서의 남성에 대한 여자의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마르세와의 사랑에서 사랑의 주체는 파키타이다. 그녀는 마르세를 납치하여 여자로 변장시킨 후, 자기 방식대로 사랑한다. 산 레앙 부인과의 관계에서 사랑의 대상에 불과하던 파키타는 마르세를 수동적 존재로 만듦으로써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자 하는 것이다. 게다가 마르세의 매력은 강인하고 힘센 남성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처녀 같은 피부와 아름다운 손과 늘씬한 몸매, 즉 여성성에 있다.


파키타가 남성과 여성을 사랑한 남녀의 통합체라면, 마르세와 그의 누이 산 레알 부인은 하나의 양성체가 둘로 쪼개진 것이다. 따라서 양성체가 결합을 상징한다면 그들은 ‘분리의 상징’이다. 마르세는 파키타에 의해 산 레알 부인의 옷을 입고 여자로 변장함으로써 누이와 동일시된다. 세속에서 서로 알지 못한 채 한 여자를 두고 경쟁하는 마르세와 산 레알 부인은, 발자크의 또 다른 양성체 인물로서 두 남녀에 대한 사랑을 하나로 통합하여 승화시키는 〈세라피타(Séraphîta)〉와 대립된다. 〈세라피타〉가 천사적 힘에 의한 결합을 상징한다면 〈황금빛 눈의 여인〉은 악마적 힘에 의한 분리를 상징한다.


마르세와 누이의 유사성은 이미 소설의 전반부에서 마르세의 친구인 폴 드 마네르빌을 통해 암시된 바 있다. 그뿐만 아니라 마르세에 대한 파키타의 사랑은 그가 산 레알 부인과 ‘동일한 목소리’, ‘동일한 열정’을 가지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파키타에게 마르세와 산 레알 부인 두 사람은 하나의 존재였던 것이다. 파키타가 살해된 현장에서 만난 두 사람은 서로가 너무도 닮았음에 놀라고 만다.


파키타는 앙리를 대상화함으로써 자신이 사랑의 주체가 되고자 하지만, 그녀가 선택한 남자는 산 레알 부인의 짝패에 지나지 않는다. 쾌락의 순간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마리키타’라는 외침은 그녀가 산 레알 부인에게 충실했음을 보여주는 기호와 다름없다. 산 레알 부인은 마르세를 보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지배력이 절대적인 것이었음을 인식한다. 그리고 파키타의 죽음을 애도한다.


마르세와 산 레알 부인은 원래 하나였던 인물이 둘로 분리된 존재로 그들은 영원히 분리된 채, 결코 만나지 못한다. 파키타에 대한 공통된 사랑을 통해 두 사람은 일시적으로나마 마주하게 되지만, 파키타의 소멸은 그들의 분리를 영원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파키타는 양성적 사랑을 구현하는 일종의 절대, ‘무한’의 기호다. 그러나 그 절대성은 지상에서의 세속적인 삶에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녀의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파키타의 죽음 이후 산 레알 부인은 ‘무한’을 잃어버렸음을 애도하면서 수도원으로 들어가 속세와의 이별을 고한다. 수도원에 칩거하는 것은 세속적인 의미로는 일종의 죽음을 상징한다. 한편 악마적인 존재인 앙리 드 마르세는 파리라는 투쟁의 공간, 황금과 쾌락만이 지배하는 지옥으로 되돌아간다.



▶ 발췌 문헌 : 〈13인당 이야기〉, 발자크 저, 송기정 역, 문학동네

▶ 작품 배경 / 줄거리 / 분석 모두 상기 참고 문헌의 내용을 제 임의대로 압축해 줄거리 형태로 요약하거나 발췌한 것입니다.

▶ 볼드 처리된 문장은 역자가 원작을 번역한 표현을 그대로 인용한 문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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