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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의 이면

풍속생활연구 - 파리생활정경 제20권

by 글섬

작품 배경


〈현대사의 이면(L’Envers de l’histoire contemporaine)〉은 1848년에 출판된 소설로, 1841년 구상되어 1848년 완성될 때까지 무려 일곱 해가 걸린 작품이다. 발자크는 이 작품을 “도시의 타락 한가운데서 미덕과 종교, 자선의 활동이 드러나게 될 하나의 작품”으로 기획한다. 그리고는 이러한 계획을 점차 구체화하여, “파리 문명이 기반으로 하고 있는 끔찍한 가난”과 파리 ‘표면’의 상처들이 파리의 ‘이면’에서 활동하는 ‘종교적 결사단체’를 통해 해결, 치유되는 이야기를 현대사의 이면에 담기로 한다. 그는 이 작품을 『인간희극』의 「파리생활 정경」에 위치시킨다. 주로 악덕과 부패가 가득한 공간으로 그려지곤 했던 발자크의 「파리생활 정경」에 “이토록 순결하며 복음에 버금가는 작품”을 배치시킴으로써 발자크는 자신의 「파리생활 정경」을 정화하고, 종교와 사랑을 통해 타락한 도시를 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내비친다.


소설의 1부 〈드 라 샹트리 부인(Madame de La Chanterie)〉은 1842년부터 1844년까지 《뮈제 데 파미유(Musée des familles)》 지에 연재된다. 이후 2부를 쓰기 시작하기까지 또 다시 삼 년의 시간이 걸린다. 1847년, 발자크는 파리를 떠나 한스카 부인이 있는 우크라이나의 비에르초브니아(Wierzchownia)로 갔다가 1848년 2월, 혁명 전야의 파리에 돌아오는데, 이때 발자크에게는 〈현대사의 이면〉의 2부, 바로 〈입문자(L’Initié)〉의 원고가 들려 있었다. 발자크가 이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는 아마 발자크가 작가로서 자신의 한계에 맞닥뜨린 것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프랑스 역사의 ‘서기관’으로서, 프랑스의 “그 무엇에 관해서든지 간에, 어느 하나도 잊지 않고” 기록하여 『인간희극』을 ‘세상의 거울’로 들고자 했던 패기 어린 발자크의 모습은, 작가의 나이가 사십 대로 접어들면서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한다. 더 나아가, 말년에 이른 작가의 마음속에는 사회와 세상에 대한 일종의 불신마저 싹트면서, 종교와 왕권 등 혁명 이전의 가치들로 사회의 혼란을 바로잡을 수 있으리라는 오랜 신념도 흐릿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제1부 〈드 라 샹트리 부인〉은 가톨릭교와 왕권에 대한 발자크의 이러한 믿음이 여실히 반영된 작품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작품의 중심 소재는 가톨릭교의 주요 덕목인 ‘애덕’(Charité)을 실천하는 종교적 자선단체이다. ‘위안의 형제단’이라 불리는 이 조직은, 드 라 샹트리 부인을 중심으로 노트르담 성당의 사제와, “몰락한 왕정의 잔해”와도 같은 사람들이 모여서 활동하는 비밀 결사단체다. 조직의 구성원만 보더라도, 혁명 이전에 사회의 중심이었던 종교와 왕정의 잔재로나마 혁명 이후에 생긴 파리의 상처들을 치유하고 어루만지고자 하는 발자크의 의도가 다분히 느껴진다.




제1부 드 라 샹트리 부인


제1부의 전반부는 주인공 고드프루아(Godefroid)가 병들어 있는 세상의 표면으로부터 치유의 힘이 솟는 세상의 이면으로 이행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고드프루아는 당대 “파리의 심장부”이자 가장 “현대적인 구역”인 쇼세 당탱(Chaussée d’Antin) 출신이다. 뛰어난 지성을 지닌 고드프루아는, 소매상이었던 아버지의 바람에 따라 공증인이 되기 위해 법률 공부를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이, “부르주아적 야망을 향해 난 길을 곧장, 단호하게 걸어” 갈 수 없는 사람임을 깨닫는다. 이후 법조계, 문학계, 언론계, 정치계 등 파리 사회에서 소위 출세했다고 여겨지는 온갖 영역에 발을 들여 보지만, 그때마다 고드프루아는 권모술수에 휘말리거나 경쟁에서 밀려 실패하고 만다. 세상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서 그가 행한 “모든 노력은 그 자신의 무력함을 확인”시켜주며, 그에겐 “시대와 함께 발맞추어” 걸어갈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줄 뿐이다. 파리 사회에서 계속되는 실패에 고드프루아는 절망하여 정신 질환을 얻게 된다.


고드프루아는 어떤 특별한 재능을 지니고 있기에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가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세상의 풍파를 이겨낼 힘이 있는 것은 아니어서 사회적으로 성공하지도 못한다. 발자크는 자기 내적 능력을 행동으로 옮길 힘이 없는 이러한 증세를 “파리병”(mal parisien)이라고 칭하며, 이 병이 파리 전역에 너무나 만연하여 하나의 “파리지앵 전형”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그러나 고드프루아는, 마음의 병이 깊어져서 “의지 없는 자들이 보이는 치명적인 우유부단함”에 빠지기 직전에, 다행히도 지친 마음을 쉬게 할 수 있는 “안식처”를 찾는다. 고드프루아는 “자신을 되돌아보고 살피며 스스로에게 소명을 주고” 싶은 마음이 일었을 때, 다시 말해서 “제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을 때, 드 라 샹트리 저택이라는 ‘쉴 곳’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고드프루아는 사람을 병들게 만드는 도시의 표면을 떠나 도시의 이면에 있는 드 라 샹트리 저택으로 들어가게 된다.


위안의 형제단이 본거지로 삼고 있는 드 라 샹트리 부인의 저택은 시테 섬(Île de la Cité)의 ‘클루아트르(Cloître)’ 구역에 있는 샤누아네스(Chanoinesse) 가에 자리한다. ‘클루아트르’ 혹은 ‘클루아트르 노트르담(Cloître Notre-Dame)’이라고 불리는 이 구역은 “구(舊) 파리의 심장부”로 과거 주교좌성당의 참사회원들이 거주했던 곳이었으며 발자크의 시대에도 여전히 수도원과 같은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북쪽 측면과 센 강 사이에 끼어” 있어 “대성당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이곳은 “하루 중 가장 시끄러울 시간에도 수도원처럼 가장 깊은 정적” 속에 잠겨 있다. “한 달에 마차가 두 대도 지나가지 않는” 곳, “침묵”이 지배하는 이 이면의 공간은, “활기차고, 밝고, 격동하는” 파리의 표면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마치 도시의 표면을 장악한 악덕으로 인해 선을 행하는 자들은 도시 이면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는 듯이, 클루아트르는 도시 한가운데에 위치함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감춰져 있어 영원히 다다를 수 없는 공간처럼 느껴진다.


고드프루아가 처음 드 라 샹트리 부인의 저택에 이르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이 드 라 샹트리 저택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고민하며 시테 섬 외곽을 배회한다. 그러다가 그는 어둠 속에서 한 신부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는 온화하며 조화로운 그 목소리에 마음이 사로잡혀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신부의 뒤를 따라가는데 그 모습은 예수의 탄생을 알린 천사의 목소리를 좇아가는 목동들의 모습에 비유된다. 또한, 시테섬 외곽에서부터 마시용(Massillon) 가를 거쳐 샤누아네스 가에 이르기까지 고드프루아가 신부의 뒤를 쫓아가는 길은 어둠 속에서 빛나며 “천상의 푸른 빛”이 감도는 길로 묘사되어 있어 그 끝에는 어떤 초월적 세계가 있음을 암시한다. 고드프루아가 저택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위층으로 올라가며 계단에 서있자니, 고드프루아는 이게 현실인가 싶었다. 그는 완전히 깬 상태로 꿈꾸며, 한가한 시간에 읽었던 소설들 속 환상세계를 보고 있었다.”


도시의 표면에서 마음이 병들어 이면으로 찾아 들어온 고드프루아에게, 드 라 샹트리 부인은 “영혼을 치유하는 위대한 의사가 내린 처방”이라면서 ‘준주성범’을 내민다. 그러고서는 준주성범 속에 “새로운 세계의 열쇠”가 들어있을 것이라 말한다. 위안의 형제단에 속한 모든 이들은 준주성범을 매일같이 읽고 묵상하며 마음에 새긴다. 새로운 삶이 자신을 어디로 이끌 것인지 궁금해 하던 고드프루아에게 응답하기라도 하듯이, 그가 준주성범을 처음으로 우연히 펼쳐 읽게 된 대목은 제2편 12장, “왕도(王道)인 거룩한 십자가”(Du chemin royal de la sainte croix)이다. “원하는 데는 어디든지 가보고, 네 마음에 드는 대로 무엇이든지 찾아보아도, ‘거룩한 십자가의 길’보다 더 고결하며 더 안전한 길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구절은 마치 고드프루아만을 위해서 적혀 있는 듯이 보인다. 드 라 샹트리 부인은 고드프루아에게 매일 밤 준주성범을 읽고 묵상할 것을 과제로 준다. 고드프루아가 위안의 형제단에 입문하기 위해서는 준주성범을 읽으며 자기 자신을 내려놓을 줄 아는 “겸손”을 배우고 “자신을 오롯이 하느님께 내맡기”는 행복을 깨달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위안의 형제단은 “오직 ‘애덕’만이 파리의 상처들을 치료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모인 ‘결사(association)’로, 이 조직에 입문하여 진정한 의미에서의 ‘애덕’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더는 자기 생각을 하지 않는” 것, 즉 자기 자신을 잊는 것이 중요하다.


위안의 형제단에도 “성직의 조건”, 다시 말해 반드시 지켜야 할 네 가지 규율이 존재한다. 형제단은 첫째, 말로만 하는 위선적인 사랑인 ‘인류애’가 아닌 사도 바오로가 정의한 대로의 사랑, 즉 ‘애덕’을 실천하고, 둘째, 신앙심 혹은 개종을 조건으로 내걸고 자선을 베풀지 않으며, 셋째, 바른 지성과 심성을 지닌 부르주아 가정을 대상으로 하고, 넷째, 철저하게 익명으로 활동해야 한다. 종교와 엄격한 규율을 바탕으로 조직된 형제단이지만 인원이 다섯 명에 불과한데다가 “현재로서 이곳(파리)은 그 상처가 너무나도 심해 (그들)의 능력을 벗어나 있다.” 그래서 그들은 도시를 여러 구역으로 나누고 각각의 구역마다 선하며 믿을 수 있는 의사를 한 명 씩 두어 가난한 자들을 돌보게 한다. 형제단에 입문하기 위한 첫 번째 시험으로서 고드프루아는 당페르 가(rue d’Enfer)의 한 의사가 돌보고 있는 환자의 가족이 처한 불행의 내막을 알아내어, 그들이 형제단의 도움이 필요한 가족인지 여부를 파악하는 일을 맡게 된다. 자기 임무를 다하기 위해 클루아트르를 나서는 고드프루아에게서 이전의 병들고 나약했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길을 따라 걸으며, 고드프루아는 스스로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누군가 그를 꿰뚫어볼 수 있었다면 집단의 힘이 전염되는 그 흥미로운 현상에 감탄했을 것이다. 자신이 다섯 사람의 대리인임을 의식하면서, 그는 더 이상 한 사람이 아니라, 열 배로 커진 어떤 존재였다. 다섯 명의 역량이 모여 고드프루아의 행동을 뒷받침해 주었고, 다섯 사람이 그와 함께 걷고 있었다. 이러한 힘을 가슴속에 품고서, 그는 그를 자극하는 어떤 삶의 충만함, 숭고한 힘을 느꼈다.”



제2부 입문자


고드프루아는 위안의 형제단의 신조에 따라 ‘두루 다니며 좋은 일을 하기’ 위해 클루아트르 노트르담으로부터 옵세르바투아르(Observatoire) 가 쪽으로 간다. 그가 돌보아야 할 베르나르(Bernard) 씨의 가족은 몽파르나스 대로(boulevard du Montparnasse)를 면하고 있는 노트르담데샹(Notre-Dame-des-Champs) 가에 살고 있다. “마차들도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는” 이 거리의 한 귀퉁이에 있는 베르나르 씨의 집은, 무엇보다도 문에 무거운 장식융단을 걸어 “밖에서 나는 소리를 모두 차단”해버린 침묵의 공간이다. 요컨대, 발자크의 표현을 빌리자면, “파리 문명” 즉 세상의 표면이 “기반으로 하고 있는 끔찍한 가난”의 공간과 그러한 빈곤을 해결해주고자 하는 힘이 자리한 세상 이면의 공간이, 모두 파리 내에 있지만 밖에 있는 듯 외부와 단절된 침묵의 공간으로 묘사되고 있다.


클루아트르 노트르담처럼 이 공간이 깊은 침묵 속에 잠겨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공간의 주인인 베르나르 씨가 비밀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클루아트르 노트르담과 베르나르 씨 집의 침묵을 깨트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고드프루아의 “세속적인” 호기심이다. 사실 고드프루아가 세상의 이면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죄악시된 그의 “과도한 호기심”은 그를 잡아먹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위험한 힘처럼, 마치 세상 표면에서의 행태가 남긴 어떤 찌꺼기처럼 치부되었다. 위안의 형제단은 고드프루아에게 호기심과 세속적 욕구를 억눌러야지만 그들의 일원이 될 수 있다고 충고한다. 드 라 샹트리 저택에서의 절제하는 생활과 종교적 가르침을 통해서, “과도”하고 “세속적”이었던 고드프루아의 호기심은 보다 나은 방향으로 인도되고 어느 정도 “정화”되기에 이르긴 하지만, 그의 몸에 배어 있던 옛 버릇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새로운 환경에 놓이거나 무언가 비밀스럽고 신비스러운 것 앞에 서면, 짓눌려 있던 고드프루아의 호기심이 매번 다시 고개를 든다.


위안의 형제단을 대표하여 베르나르 씨를 처음 대면한 “고드프루아는 강렬한 흥미와 호기심에 사로잡혔고, 선행의 임무가 이를 더욱 자극했다.” 이 가족이 처한 기형적인 상태는 남작의 딸 방다(Vanda)가 얻게 된 해괴한 병 속에 응축되어 있다. 온갖 기괴한 병세들이 혼합되어 나타났다가 또 사라지는 이 이름 모를 병으로 인해 방다가 지속적으로 겪는 증세는 마비 증상인데, 여러 신체 기관들 중에서도 특히 발은 심한 마비 증상을 보여서 방다는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한다. 고드프루아는 이 가족이 형제단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도움을 주기로 결정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러한 방다의 병을 치유해주는 것은 제단과 함께 일하는 선하고 믿음직한 의사들이 아니라, 돈을 밝히기로 유명한 유대계 의사인 알페르손(Halpersohn)이다. 알페르손은 “까다롭고 의심이 많으며”, “환자들을 골라 받는” 공산주의자로, 모든 면에서 드 라 샹트리 부인을 비롯한 위안의 형제단과 대척점에 있다. 하지만 알페르손은 방다의 병에 대한 치료법을 알고 있는 프랑스 유일의 의사이다. 형제단이 치료비를 지원해주기는 하지만 방다의 병을 치료하는 것은 전적으로 알페르손의 몫이다. 그는 환자를 격리시켜 샤이요(Chaillot) 구역의 바스생피에르(Basse-Saint-Pierre) 가에 있는 자신의 진료소로 옮기고서는 그 자신이 전권을 쥐고 환자를 치료하는데, 이 과정에서 환자의 가족뿐만 아니라 위안의 형제단과 고드프루아도 완전히 배제된다. 그래서 모든 인물들이 샤이요와 샹젤리제 구역을 끊임없이 배회하지만 아무도 방다가 회복되는 구체적인 과정은 보지 못하며, 몇 달 후에 샹젤리제 대로를 지나던 고드프루아가 멀쩡히 걷고 있는 방다를 만나는 장면을 통해 그녀가 치유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뿐이다.


고드프루아의 속된 호기심은 결국 기어이 베르나르 씨의 떳떳하지 못한 과거를 들춰내어, 그가 바로 드 라 샹트리 부인의 딸을 단두대에 오르게 했던 검사 부를락(Bourlac) 남작이라는 사실을 밝혀내기에 이른다. 위안의 형제단은 고드프루아에게 이 사실을 “철저하게 비밀”로 하고 “아무 말도 하지 말라”면서 다시 한 번 침묵을 강요하고, 일에 “더 이상 연루되지 말라”는 일종의 금지령을 내린다. 금지령을 받은 고드프루아는 클루아트르로 돌아가 처음에는 자중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이내 그의 호기심이 다시 발동되면서 몽파르나스 쪽으로 산책을 나가보기도 하고, 부를락 남작(베르나르 씨) 가족의 소식을 캐묻고 다니기도 한다. 결국 그의 가족과 마주치게 된 고드프루아는 그동안 이 비밀을 혼자 간직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웠다는 듯이, 그들에게 여태껏 선행을 베풀어준 이가 드 라 샹트리 부인이라는 사실을 단숨에 폭로해버린다. 이야기는 파국으로 치달을 것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부인이 남작을 만나 그의 죄를 용서함으로써 자기 과거의 상처로부터 치유되는 것으로 끝난다. 이후 방다의 가족은 해묵은 불행에서 벗어나 샤이요 구역의 당탱 길(allée d’Antin)에 살게 되고, 형제단의 금지령을 어긴 고드프루아는 단죄되기는커녕 이날부로 ‘위안의 형제단’에 입회하게 된다.




분석



혁명 이후 프랑스 사회가 자유와 평등의 기치를 내걸고서 개인주의 사회로 나아가는 것을 발자크는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못마땅하다기보다 불안해했다고 표현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기존의 익숙했던 지표와 기준들이 철폐되면서 개인에게 갑작스럽게, 거의 반강제적으로 주어진 자유는, 발자크의 눈에는 사회적 혼돈을 낳는 주범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는 사회의 표면을 장악한 혼돈을 해결하기 위해서 사회의 이면에 종교 등 이전 시대의 가치를 중심으로 연대해 있는 결사단체를 만들어 놓는다. 방향성을 잃고 헤매는 개인을 다시 집단에 소속시킴으로써 발자크는 개인의 삶에 다시금 의미를 부여해주고자 한다. 위안의 형제단원으로서의 첫 임무에 파견되는 고드프루아의 당당한 모습은 집단이 개인에게 미치는 긍정적 영향에 대한 발자크의 생각을 그대로 전달해준다. 형제단의 대표가 된 고드프루아는 “한 사람인 것처럼 공동으로 행동하고, 모두 함께 하는 것처럼 홀로 행동”하며 어떤 “전능함”을 느낀다. 결사에 속한 개인에게는 결사 단원 전체의 힘과 능력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훗날 고드프루아는 이 날을 회상하며 자기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었다고 말한다.


발자크 스스로가 중심이 되어 ‘슈발 루주(Cheval Rouge)’라는 결사단체를 조직하고 문학계의 여러 인사들을 모은 바 있듯이, 그는 항상 결사의 힘에 대한 강한 믿음을 보였다. 발자크는 이러한 열망을 『인간희극』 속에 담아서 ‘세나클(Cénacle)’이나 ‘13인당’ 등 여러 공동체를 만든다. 그가 보기엔, 하나의 가치체계 속에 개인들을 통합시키는 이들 소규모 공동체야말로, 무질서한 세계 속에서 개인이 삶의 의미를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다. 그러나 발자크의 작품들 속에서 이러한 결사들은 하나의 이상적인 집단의 모습을 제시해준 다음에 대부분이 현실적인 이유로 실패하여 해체되는데, 발자크는 ‘위안의 형제단’만큼은 그 예외로 만들고자 했던 듯하다. 그는 위안의 형제단이 종교에 바탕을 두고 형성되어 깊은 신앙심으로 결속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른 결사들과는 달리 오랜 시간 존속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발자크는 스스로를 ‘투시자’(voyant), 즉 사물의 외관뿐만 아니라 내면까지도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가시적인 세계 뒤에 있는 비가시적인 세계를 들춰볼 수 있는 사람, 다시 말해서 세상의 표면 뒤에 놓인 세상의 이면을 통찰할 수 있는 예외적인 사람들 중 하나였다. 1840년대 초반에 현대사의 이면을 구상하고 제1부를 쓰던 시기에만 해도 발자크는 자신의 통찰력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거듭되는 혁명으로 인해 세상의 표면은 혼란하여 악덕으로 우글거렸지만, 세상의 이면에 있는 종교와 사랑의 힘으로 표면의 타락을 치유할 수 있으리라는 비전을 가지고서 그는 〈드 라 샹트리 부인〉을 쓰기 시작한다. 이러한 희망찬 전망 속에서 발자크는 소설의 전반부를 통해 세상의 이면을 그리며 지난 시대의 가치인 종교와 결사가 지니는 힘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러나 1840년대 중후반으로 넘어가면서 발자크의 ‘투시력’은 점차 약화된다. 끊임없이 변해가는 세상이 발자크의 손에 잡힐 듯하면서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말년에 이르면 발자크는 현실을 더 이상 작품 속에 담을 수 없으리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자기가 만든 예상 가능한 세상 속에 틀어박히거나, 과거에 품었던 이상과 현재 관찰된 세상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작가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나는 〈입문자〉의 후반부에서는 세상의 이면이 지닌 힘에 대한 작가의 믿음이 눈에 띄게 약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한편으로, 세상의 표면에서 얻은 상처들로 인해 세상의 이면으로 모여든 사람들이 조직한 ‘위안의 형제단’이 여전히 과거에 얽매여 있어 상처가 곪고 있다는 사실이 점차로 드러난다. 타락한 사회를 치유하고자 하는 인물들이 오히려 치유를 받아야 하는 존재가 되면서, 발자크가 세워두었던 대립구도인 표면과 이면, 치유의 객체와 주체가 서로 뒤섞인다.


다른 한편으로는, 공통의 신념으로 부지런히 활동하는 결사의 면모가 지워지면서 그 자리에 세상 표면에서 중시되는 가치들이 들어온다. 다시 말해 형제단이 중심 가치로 삼은 종교와 신심보다는 그들이 운용할 수 있는 자금이 더 중요해지는 것이다. 나아가 그들이 자금을 운용하고 유지하는 체계의 지나치게 이상적인 측면이 부각되면서, ‘위안의 형제단’은 자신의 신념과 이상에 갇혀 세상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는 작가의 순진함을 드러내는 증거로 작용한다. 〈입문자〉에서 우리는 세상의 이면이 지닌 힘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세상의 표면으로 끌려나오게 된다. 현대사의 이면으로써 『인간희극』을 정화하겠다는 발자크의 계획이 완수되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 발췌 논문 : 〈세상의 표면과 이면: 발자크의 현대사의 이면의 공간〉, 양승미(고려대), 프랑스학회

▶ 작품 배경 / 줄거리 / 분석 모두 상기 발췌 논문의 내용을 제 임의대로 압축해 줄거리 형태로 요약한 것입니다.

▶ 볼드 처리된 문장은 논문 작성자가 원작을 번역한 표현을 그대로 인용한 문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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