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고 혼란스러웠던 대학교 1학년은 금방 지나갔다. 즐거움은 사라지고 혼란스러움만 남았고, 즐거움이 사라진 자리는 대신 상실감이 채웠다.
대학교 2학년 1학기에 나는 무언가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학회에도 가입하고, 전공수업들도 신청하고, 이제 공부도 좀 더 열심히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뭘 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남들이 하라는 것들을 조금씩 하기 시작했다.
2학년 1학기에 나름대로 대학생치고는 꽤 열심히 공부를 했다. 여전히 학교 사람들과 밥약속도 있었고 이런 저런 행사들도 참여하고 친구들과 수다떨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 정도면 대학생치고 충실하게 공부했다.
그러나 학기가 끝나고 나온 성적은 기대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왜였을까? 답은 솔직히 뚜렷했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덜 똑똑해서였다.
같이 공부했던 동기들보다(그 중 내가 가장 열심히 공부했다) 훨씬 성적이 안 좋았고, 재수강한 과목들조차 그 전과 똑같은 성적이 나왔다.
학점을 많이 수강했던 것도 아니고 15학점 수강했는데 그 중 6학점은 재수강이었다.
어쨌든 2학년 1학기가 끝나면서 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내가 서울대에서 우수하지 않은 학생이라는 것을.
단지 성적으로만 그걸 확인할 수 있었던 게 아니었다. 2학년 전공수업에서 다른 동기들은 수업을 잘만 알아듣는데 나 혼자 알아듣지를 못했고, 가입한 학회에서도 다른 사람들은 열심히 토론하는데 나는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해서 매주 꿀먹은 벙어리처럼 앉아만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서울대에서 평균 혹은 평균이하인 게 그렇게 창피한 일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 때는 그게 너무 답답하고 힘들었다.
학교수업이며 학회며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뒤떨어진다는 게 너무 창피했고 내 미래가 불안했다.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하는 수업을 들으면서 학교를 다니는 게 괴로웠다.
나의 멍청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었다. 그래서 나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전공수업을 매주 녹음해서 3시간짜리 수업을 5시간 걸려서 들으면서 받아적고, 그 다음에 받아적은 내용을 2~3번씩 읽었다.
그렇게 하면 겨우 그 강의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름대로 노력같은 뻘짓을 하면서 2학년 1학기를 열심히 보냈지만 막상 성적은 별로였고, 우울하고 절망적인 기분이었다.
내 미래가 너무 불투명하게 느껴졌다. 대학을 졸업하고 하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고, 대학교 수업도 못 알아듣는 멍청한 내가 답답하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1학년 때에는 재미있었던 술자리며 동아리활동, 사람 만나는 것은 이제 재미가 없었고, 수업은 제대로 못 따라가고,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르는 채로 나는 길을 잃었다.
길이 없다고 느껴질 때에는 어디로 가야하는가?
나는 가장 무난한 길로 가기로 했다. 모든 사람들이 괜찮은 길이라고 하는 길, 적어도 초라한 기분에서는 벗어날 수 있을만한 적당한 길. 나에게는 그게 로스쿨인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2학년 2학기에 최선을 다해보고 4.0이 넘으면 로스쿨을 목표로 계속 열심히 하고, 4.0을 못 넘으면 그만두자는 나름대로의 결심을 했다.
그런 결심이 서자, 나는 그 목표에 다시 매달릴 수 있었다. 삶이 공허하고 길을 잃은 것 같이 외로운 느낌이 들었기에, 그 목표에 의지했다. 마치 그 목표를 이루면 이 공허감이나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이번에 최선을 다해보고 4.0을 넘지 못하면, 앞으로는 쓸데없는 노력하지 말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나는 내가 공부에 그다지 재능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더 이상 노력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흘러가게 내버려둘 것이다.
어쨌든 그런 마음으로, 나는 나름대로 결의를 다지고 그 학기를 시작했다.
그 학기에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지 모른다. 아침 일찍 학교에 가서 도서관이 문을 닫는 11시까지 매일 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나는 여전히 수업을 잘 못 알아들었기 때문에, 내가 듣는 수업들의 강의계획서를 다 뽑아서 거기에 있는 참고도서며 논문들을 싹 다 읽었다. 그것들을 다 읽느라 매일 시간이 부족했다.
한글반 한자반의 동양사학과 논문들, 정치학 영어원서들을 읽으며 너무 힘들어서 공부하다가 도서관에서 눈물을 흘렸다. 강의계획서에 적힌 전공책들이며 논문들을 다 정리하면서 읽고, 수업을 통으로 암기하면서, 내 마음이 거기에 온통 쏠리고 집중해서 더 이상 사람도 만날 수가 없었고 놀 수도 없었다. (그렇게 무식하게 공부를 하려니) 항상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어느새 나는 매일 공부 생각만 했다. 자주 만나던 고등학교 친구들과의 약속에 자꾸 빠져서 친구들이 서운하다고도 하고, 사람들과 약속도 다 줄이고, 유난스럽게 공부를 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최선을 다해봐야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렇기도 했지만, 나는 사실 그렇게 몰입하는 것으로 내 공허감을 달랬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