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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선 Jun 11. 2024

#3 베르테르와 알베르트

내가 대학에서 독일 문학 교양 수업을 들었을 때, 나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베르테르가 몽상적인 패배자라는 논지의 레포트를 제출했었다.


7~8년 전에 쓴 레포트다보니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자기만의 신화를 꿈꾸는 인간들 중 대다수는 대단치 않은 범인이기 때문에 영웅이 되는 것에 실패하기 마련이고 자신이 거대한 시계태엽같은 세계의 한 개 나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은 절망하거나 나사의 신화를 이루거나, 둘 중 하나이다. 평범한 인간이 그나마 할 수 있는 위대한 노력은, 자신이 나사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사의 신화라도 이루기 위해서 사는 것이다’라는 요지의 글이었다.


그때의 나는 베르테르에게 화가 나 있었다. 베르테르가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면서도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게 싫었고, 허상을 쫓다가 혼자 실망하는 꼬락서니가 싫었고, 약해빠진 게 싫었고, 자신이 짝사랑하는 로테의 건실한 약혼자 알베르트가 꿈과 낭만 없는 노잼인간이라는 식으로 정신승리하는 게 싫었고, 결국 자살하는 게 싫었다. 그는 자기만의 신화를 구축할 수 없는 별볼일 없는 인간이었으면서, 아닌 척 하는 게 짜증났고, 그의 자살은 자기가 평범한 인간일 뿐이라는 것을 끝끝내 거부하고 고집부리는 것처럼 느껴져서 짜증났다.

베르테르는 미완성된 그림을 두고 자살했는데, 나는 ‘베르테르의 자살이 의미있으려면 죽기 전에 걸작품이라도 제대로 완성했어야 됐다.’고 썼던 것 같다.


그 레포트가 우수레포트로 선정이 되어서 수업시간에 그 레포트를 함께 읽었었는데, 한 여자애가 내 레포트를 읽고 눈물을 터뜨렸다. 눈물을 터뜨렸다기보다는, 화가 나서 나를 노려보면서 뭐라고 했는데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눈을 부릅뜬 채로 눈물을 흘리면서 이야기했다.


그 수업의 교수님은 50대의 둥그렇고 인상좋은 여자분이셨는데, 화가 나서 씩씩거리는 그 여학생과 짜증난 표정의 나를 보면서 난감해하시며 웃으셨던 것 같다. 그 교수님과 이후에 개인면담을 하게 되었는데 나한테 ‘넌 지금 온통 알베르트야. 그리고 넌, 네 안의 베르테르를 억누르니까 베르테르한테 화가 나는거야. 네 안에 있는 알베르트와 베르테르를 조화시켜보렴’이라는 류의 조언을 해주셨다.

그리고 교수님은 나에게 앞으로 뭘 할 거냐고 물어봤다. 나는 로스쿨에 갈 거라고 했다. 교수님은 ‘정말로 너가 원해서 가는 거야? 그게 네 꿈이라서?’라고 물어봤다.

그 나이브하고 촌스러운 질문이 화가 났었다. 내가 만약 로스쿨에 가기 싫다고 하면, 로스쿨이 내 꿈이 아니면, 뭐 어쩔 건데요. 교수님이 제 인생 책임질 것도 아니면서 그런 거 왜 물어봐요. 아니, 그리고 나는 로스쿨 진짜로 가고 싶거든요? 왜 나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 하세요?

나는 어깨를 으쓱 하면서 ‘네, 제가 원해서 가는 건데요’라고 말을 했는데, 왜인지 모르게 눈물이 뚝뚝 흘러나왔다. 눈물이 나와서 나도 당황했다. 로스쿨에 가겠다는 생각에 대해서 슬프거나 화난다는 감정이 전혀 들지 않았는데, 난 정말로 로스쿨에 가고 싶었는데 말이다.

눈물을 흘리니까 교수님이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아서 진짜 더 짜증났다. '정말 너의 꿈이 변호사가 되는거야? 남들의 기대에 부합하기 위해서 가고 싶은 건 아니야?'하는 유치한 질문에 '흑흑 제 꿈은 사실 그게 아니었어요'하고 진부하게 반응한 것 같아서, 그 장단에 맞춰서 흐르는 듯한 눈물이 어이없었다.


불편했던 면담이 끝나고 나는 그 수업을 까맣게 잊어버렸지만, 몇 년이 지나고 베르테르의 망령은 나를 찾아왔다.


로스쿨에 가는 건 나의 ‘나사의 신화’였을까? 그러려고 했던 것 같다. 로스쿨에 가서, 변호사가 되어서, 계속해서 안전한 삶을 구축해내는 것이 나같이 비범하지 않은 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만 나는 그 ‘나사의 신화’를 이루는 데에도 실패해버렸다.


로스쿨에 갔더니 법학이 너무 어렵고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었다. 나도 잘해보려고 했는데, 진짜 너무 어려웠다. 그런데 사실은, 그다지 잘해보고 싶지도 않았다.

이상하게도 로스쿨에 갔더니 '나사의 신화'가 너무 의미없게 느껴졌다. 영웅신화 대신 나사의 신화라도 이루려는 노력이 진짜 부질없고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잘하고 싶지도 않았고 노력할 마음도 더 이상 생기지 않았다.


내가 ‘난 노력하고 싶지 않아서 노력하지 않는 거야.’라고 말할 거라면 적어도 낙오된 것에 대해서 비참해하진 않아야 하겠지만, 나는 비참했다.


로스쿨에서 나는 차마 자퇴도 못 하는 주제에 매일 수업을 빠져대고 시험공부도 안하고 지도교수 신청 같은 것도 안하고 그 안에서 분주히 열심히 살아가는 동기들을 공허하게 바라보면서 “대체 뭘 위해서 그러고 사냐”같은 소리나 했다.

술마실 때면 “이런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같아... 난 내 인생의 의미를 찾고 싶다고..” 하면서 주정부렸다. 친구들은 나를 반쯤은 한심해하고 반쯤은 안쓰러워하면서 “의미 이런 거 찾지 말고 그냥 현재에 집중해” 혹은 “니가 로스쿨에서 공부 못하니까 괜히 그런 소리 하는 거 아니냐, 너가 공부를 잘했다면 과연 인생의 의미같은 얘기 했을까? 그냥 공부나 해라" 등등 조언과 충고와 위로를 해주었다.


그렇게 무기력하게 삶에 반항하던 어느 날, 내가 베르테르라는 걸 깨달았다.


대학시절에, 우울증에 걸린 친구들이 몇 있었다. 나는 불행하고 불안한 적은 많았지만 우울해서 무기력하다는 기분은 모르겠었다. 불안해서 강박적으로 살아가면서, 우울해서 무기력하다고 생활을 놓아버리거나 자기파괴적인 결정을 하는 친구들을 보면 사실 기묘한 질투심이 들었다.

지금 돌아보면, 나는 삶에 대해서 반항하는 것을 질투했던 것 같다. 위험하고 충동적 선택들은 물론이고, 무력증 또한 일종의 소극적인 자기파괴 혹은 반항이라고 느껴졌다. 그리고 그렇게 반항하다보면 뭔가 다른 길, 그러니까 평범하지 않은 어떤 길로 갈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무력증과 충동적 행동들 모두에, 내가 갖지 못한 일종의 강렬한 적극성이 있다고 느껴졌달까.


에리히 프롬은 이렇게 말했다.

“신경증이란 강한 자아의 형성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정상적이라고 해서 자아의 형성이 잘 마무리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대다수의 잘 적응한 사람들의 경우도, 정상이란 그저 어린 나이에 자아를 잃어버리고 사회가 제공한 사회적 자아로 완전히 대체되었다는 뜻일 뿐이다. 그들에게는 신경증의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자아가 사라짐에 따라 자아와 외부 세계의 불화도 사라졌으니 말이다.”


그래, 나는 그러니까 적어도 외부세계와 불화하고 있는 그들의 투쟁을 부러워했던 것이다. 그리고 베르테르의.


그러나 나는 그들의 투쟁에 아무런 의미가 없길 한편으로는 바라면서 일부러 베르테르를 무시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투쟁할 용기가 없었으니까.


투쟁할 용기를 내어서가 아니라 로스쿨에서 낙오되었기 때문에, 나는 무력감과 자기혐오에 빠졌다. 그리고 비자발적이었지만 실제로 무력감과 자기혐오에는 일종의 반항과 투쟁의 성격이 분명 내재되어 있다. 무력감 속에서 발버둥칠 때 그 사람은 세상을 미워하고 삶을 미워하며 자기 자신과 투쟁하기 때문이다. 세상과 삶을 미워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미워한다는 것과 동일한 말이니까.  


그 때 나는 몇 년 전 그 독문과 교수님이 나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면서, 그 교수님의 (지금 돌아봐도) 상당히 유치한 질문이 꽤나 통찰력있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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