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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선 Apr 13. 2024

<블루 재스민> 리뷰


스토리(메시지, 개연성 등): 5

재미(몰입감): 4

케이트 블란쳇: 5

총점: 4



* 한 나약한 이의 지독하게 허망한 몰락을 슬프지 않게, 흥미진진하게 그려낸 수작. 그런데 어쩐지 영화를 다 보고나면 함께 쓸쓸해진다.



생각을 많이 하고 싶으면 생각 많이 하면서 볼 수 있지만 별 생각없이 좋은 영화 가벼운 마음으로 보고 싶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그렇게 볼 수 있는, 흥미롭고 몰입감 있는 영화이다.




<줄거리>

아름답고 고상한 외모의, 부티 철철 나는 재스민이라는 여성이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건너오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녀는 거물사업가인 '할'의 아내로 할과 함께 뉴욕 사교계의 중심인물이었으나 할이 사기꾼으로 밝혀지며 몰락 후 감옥에서 자살하고, 그녀 또한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빈털털이가 되어 동생 진저의 집에 얹혀살게 된 신세이다.


빈털털이가 되었으나 그녀는 여전히 에르메스 가방, 샤넬 자켓, 로저 비비에 신발을 신고 고액의 팁을 지불하며 우아한 태도를 유지하려 애를 쓴다.


그렇지만 그건 그녀가 강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나도 멘탈이 무너져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로 현실을 부정하고 있음이 이내 드러난다.


그녀는 일상 생활에서의 아주 사소한 일들을 통해서도 늘 과거의 기억으로 빠져들곤 하는데, 과거를 연상케하는 무언가가 나타나는 순간 과거의 flashback에 사로잡혀 과거를 회상하고, 그 정도가 지나쳐 수시로 과거를 회상하며 혼잣말을 하고 머릿속의 과거상황에 살며 과거의 인물들과 대화를 나눈다.


알거지가 되어서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오는 비행기에서 그녀는 옆자리에 앉은 이방인에게 끊임없이 자기 얘기를 하는데, 그 내용은 '할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잘해주었는지, 할과 함께 했던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아름답고 화려했는지' 등의 이야기이다.


진저의 좁은 집에 도착해서야 재스민은 그 집, 낡고 촌스러운 가구들, 진저의 교양없고 무능한 남자친구 등을 보게 되고 거기에 얹혀 사는 게 자신의 현실이라는 것을 자각한다. 그런 자각의 순간들, 괴로움이 닥치는 순간들에 그녀는 곧장 과거 회상의 flashback으로 빠져든다. 아름다웠던 그녀의 뉴욕 집과 별장, 잘생기고 우아하며 그녀에게 무엇이든지 해주었던 남편 할, 세련된 사교계 친구들, 할과의 아름다웠던 사랑...



그러나 계속해서 새로운 현실은 밀어닥친다. 거지같고 좁은 집에 어찌저찌 살게 된 것 다음으로는 무례하고 시끄러운 진저의 남자친구가 시비를 걸어오고, 무능하고 교양없는 키작은 정비공이 데이트를 신청해오는가하면, 돈을 벌어야 한다는 압박에 어쩔 수 없이 치과 카운터에서 일을 시작하지만 매력없고 거만한 치과의사가 그녀를 함부로 보며 성추행을 한다.


그녀 또한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았던 게 아니다. 대학교 졸업반 시절 할을 만나 결혼하며 대학을 중퇴했기 때문에 그녀는 다시 공부를 시작했고, 치과 카운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치과의사의 역겨운 추근거림도 참아냈으며, 진저 남자친구가 시비를 걸어오는 것에 대해서도 흥분하지 않으려고 애를 써왔다.


그러나 '뉴욕 사교계의 중심'이었던 시절에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을 치과의사가 자신의 직원이라는 이유로 그녀를 우습게 보며 성추행을 했을 때 그녀는 스스로의 힘으로 노력해서 재기하겠다는 일말의 의지도 잃어버리고, '새로운 할'을 찾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녀는 명품으로 휘감고 샌프란시스코의 큰 파티에 참석하고, 거기에서 외교관 드와이트를 만나 순식간에 그를 자신의 매력으로 홀린다.


재스민이라는 이국적인 이름(본명은 재닛이지만 스스로 재스민으로 개명했다), 아름답고 기품있는 외모, 부티나면서도 세련되고 우아한 옷차림, 지적인 화술.. 드와이트는 곧바로 재스민에게 매료되지만, 재스민은 드와이트와 단순히 연애를 하는 게 아니라, 그와 결혼해서 온전한 안전을 도모해야만 했다. 그랬기 때문에 재스민은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외과의사였던 전남편은 심장마비로 급사하여 사별했고, 자신은 인테리어 디자이너'라고 거짓말을 치고, '전남편은 너무 바빠 사이가 소원했기 때문에 아이를 갖지도 못했다'며 자못 내숭까지 떤다.


드와이트는 그녀의 기품, 우아함, 지적이고 세련된 감각에 푹 빠져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그녀에게 청혼하고, 재스민은 '이제 살았다'는 안도감에 눈물까지 글썽거리면서 청혼을 받아들인다.


함께 약혼반지를 보러간 날, 동생 진저의 전남편인 오기를 만나게 된다. 오기는 무식한 정비공으로, 재스민은 그를 혐오하고 경멸했었다.


과거 진저와 오기는 로또 3억원에 당첨되어 드디어 자신들만의 사업을 시작하고 가난한 생활을 청산할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 형부이자 매형인 할을 찾아와 조언을 구하지만, 할의 권유에 따라 당첨금을 할에게 투자했다가 쫄딱 망하고 이혼하게 되었다.  


진저는 그러한 사기행각은 모두 할이 단독으로 벌인 일이며, 언니 재스민은 모르는 일이라고 말해왔다. 재스민 또한 항상 '자신은 사업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해왔고 실제로 할이 시키는대로 모든 서류에 아무 생각없이 서명하여 자신의 모든 재산도 압류당하였다.


그러나 오기는 '재스민이 몰랐을 리 없다'며 재스민에게도 앙심을 품고 있었고, 드와이트와 함께 있는 재스민을 마주치자 재스민에게 악담을 퍼붓고 그녀의 과거를 폭로한다.


드와이트는 재스민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결혼하려고 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녀와 파혼하며, 재스민은 완전한 나락으로 떨어져 정신을 놓아버리고 만다.


그 전에도 문득 문득 정신줄을 놓아버리고 과거의 허상과 싸우며 혼잣말을 하곤 하지만, 재스민이 완전히 정신줄을 놓는 순간은 '드와이트에게 버림받는 순간'이다.


드와이트에게 버림받는 순간, 재스민은 미친 여자처럼 "그러니까 네가 프랑스 창녀와 놀아나지만 않았어도!!"라고 소리를 지르는데, 그녀가 소리를 지르는 대상은 사실 드와이트가 아니라 할이다.


그리고 마침내 재스민의 기억 속에서 드러난 진실은, 할의 최후에 관한 잔혹한 진실이었다.


할은 재스민과 만난 후로 오랜 시간 동안 다른 여자들과 바람을 피워왔는데, 재스민의 친구들을 비롯하여 그들 부부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진저마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재스민은 할이 바람피우는 사실을 몰랐다고 하지만, 아마 그녀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진저는 이에 대해서 "언니는 자신이 모르고 싶은 것에 대해서는 모른 척한다"라고 말한다.)


재스민은 때때로 할에게 '당신 바람 피우는 거 아니지?'라고 물어보았지만 할이 '무슨 소리야, 내가 무슨 바람을 피운다고 그래'라고 부인하면 '알겠어, 당신 말 믿을게'하면서 곧장 수긍해왔다. 그처럼 이제까지 늘 모르는 척해왔던 그녀인데, 아마 그녀 또한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던 것인지, 재스민은 처음으로 할에게 '네가 바람피우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며 추궁하게 되고, 할은 이제껏 부정했던 것과 달리 외도를 인정하며 '지금 만나는 여자와 미래를 계획하고 싶으니 헤어져달라, 너의 앞으로의 생활은 내가 책임지겠다'고 말한다.


재스민은 과호흡 및 발작증세를 보이고, 할은 '진정하고 다시 얘기하자'고 말하며 방을 나가는데, 재스민은 곧장 전화기를 집어들고 FBI에 전화를 걸어 할의 사기행각을 폭로하고 이로 인해 할은 쫄딱 망하고 감옥에 들어가 자살하게 된 것이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과거의 기억을 직면하게 된 재스민은 정신줄을 놓아버리고, 이제껏 고수해오던 우아하고 고상한 외양와 태도를 내동댕이치고 땀에 절은 추한 몰골로 진저의 집에 돌아와 진저에게 흥분하여 악담을 퍼붓고 집 밖으로 뛰쳐나가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는 것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리뷰>


케이트 블란쳇이 연기하는 재스민의 감정에 압도되어 나도 심장이 답답해지고 조여오는 것 같은 기분이 여러 번 들어서, 영화를 여러번 멈춰야했다.


'허영심 많은 사교계 공작새의 추락'은 잔인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소재이다. 이 영화에서도 재스민은 그리 안쓰럽거나 불쌍한 인물로 그려지기보다는, 허영심 많고 오만하며 멍청한 인물로 그려지며, 그녀의 추락은 안쓰럽기보다 흥미롭게 펼쳐진다. 영화의 중반부까지, 이미 사라져버린 과거의 영광을 끊임없이 곱씹으며 경멸스러운 표정으로 모든 천박하고 촌스러운 것들을 향해 인상을 찌푸리는 그녀는 안쓰럽기보다는 우스꽝스럽게 느껴질 뿐이다.


그런데 영화의 마지막 장면들에서 할을 고발한 것이 그녀였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비로소 나는 그녀에 대해서 조금 더 깊게 이해하게 되며, 겨드랑이가 축축하게 땀에 절고 화장이 번진 채로 정신줄을 놓아버린 그녀의 모습으로 영화가 끝날 때, 인간의 나약함에 대한 공감과 연민으로 가슴이 쓸쓸해졌다.



* 영화 중반까지 끊임없이 과거를 회상하며 과거 속에서 살아가는 재스민

재스민은, 사기꾼으로 들통나 자신을 가난과 비참함으로 몰아넣은 할을 미워하고 원망할만도 하지만 그녀의 추억회상에 드러나는 감정은 원망보다 그리움에  가까워보인다.


정확히 말하면, 할과 함께했던 아름다웠던 시간, 할에게 사랑받은 기억들, 할이 제공했던 풍요로움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해보인다.


누가 뭐래도 할은, 그녀에게 그녀 인생의 최고의 시간들을 선물해준 남자이다.


할과 처음 만난 날,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Blue Moon>이 울려퍼지고, 잘생기고 능력있고 젠틀한 9살 연상의 할은 젊고 아름다운 대학생인 재스민에게 푹 빠져 청혼을 하고, 그녀에게 뉴욕의 명사들과 사교계 인물들을 소개시켜주고, 아름다운 집과 별장을 재스민의 세련된 감각으로 더욱 아름답게 꾸미며, 돈에 구애받지 않고 최고급 물건을 쇼핑하고, 기념일에는 재스민의 취향에 꼭 맞는 값비싼 선물을 주고, 항상 로맨틱한 말들로 사랑받는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또한 재스민의 대사에는 '할은 성적으로도 나를 일깨워줬고 나는 모든 성생활을 그에게 배웠다'는 대사가 등장하는데, 할과 재스민의 관계는 이처럼 '잘생기고 유능하며 믿음직스럽고 남자다운 할이 순수한 소녀같은 재스민에게 아빠처럼 모든 것을 다해주면서도 키다리아저씨처럼 예뻐해주고 사랑해주는 로맨틱한 관계'이다.


할은 그녀에게 그녀가 바라는 모든 것들을 다 주었고, 그녀는 '할에게 사랑받는 여자'인 동안 지극한 안정감을 누릴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사회 최상류층으로서 대접받고, 자신의 타고난 세련된 감각과 사교술을 쇼핑, 집꾸미기, 파티열기 등으로 마음껏 발휘하는 삶이다. 그러면서도 마치 '영화의 아름다운 여주인공'처럼 잘생기고 유능한 남자주인공에게 '로맨틱하게 사랑받는' 삶인 것이다.


그런 삶을 계속해서 영위하기 위해 재스민은 아주 조금만, 모른 척하면 된다. 할의 사업이 사기라는 것과, 할이 바람을 피고 있다는 것.


그런 삶이 자기기만이었을지라도, 재스민에게는 진실보다도 더 지키고 싶은 삶이었던 것이다. 할이 사기꾼이라는 것, 할이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것을 모른 척하고 자기 자신을 속일 수만 있다면, 그녀는 그토록 아름답고 풍요로운 사회 상류층으로서의 삶, 사랑받는 여자로서의 삶을 계속해서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을 택했던 것이다.


그것을 마침내 모두 잃게 되었을 때, 샌프란시스코의 구질구질한 삶, 추락한 현실에서 그녀는 과거 속에 머무른다. 물론 그녀도 나름대로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고 컴퓨터 수업도 듣고 조카들도 돌보며 노력을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게 진정한 현실임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고 '이것은 잠시 뿐이고 난 다시 재기할거야'라는 생각 속에서 고상하고 우아한 상류층의 말투와 태도, 겉모습을 유지하며 현실에 저항한다. 그러나 끔찍히도 싫은 현실이 그녀를 덮치고 고통이 몰려올 때 그녀는 고통을 직면하기 어려워 행복했던 과거 속으로 도망간다.


<상처받지 않는 영혼(마이클 싱어)>에서는 과거에 대한 집착, 즉 삼스카라는 '부정적인 과거' 뿐 아니라 '긍정적인 과거'에 대한 집착도 포함되며, 그것이 현재의 불행을 가져온다고 말한다.


'멋진 경험이 일어나면 당신은 거기에 집착하게 되기 때문에 그것은 그냥 지나가버리지 않는다. 집착은 긍정적인 삼스카라를 만들어내고,당신은 그것을 붙잡으려고 애쓴다'.


재스민은 자기자신을 기만해서까지도 붙잡고 싶었던 아름다운 무언가를, 여전히 놓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 '단순한 허영, 명품, 부유한 생활'만은 아닐 것이다. 물론 그런 것들도 있겠지만, 더 나아가 그녀가 붙잡고 싶었던 건, '할로부터 받았던 사랑, 그녀를 언제까지나 지켜주며 그녀를 보호해줄 것 같았던 믿음직스러운 사랑, 젖과 꿀을 제공하는 부모의 품처럼 그녀에게 모든 것들을 제공했던 사랑'이다.


그 사랑 속에서 그녀는 너무나도 편안했고, 안전했고, 풍요로웠다. 사랑받는 느낌은 너무나도 행복했고, blue moon이 흘러나오고 로맨틱한 말들을 듣던 시간들은 너무나도 아름다웠으며 그에게 사랑받는 것은 그녀가 특별하고 가치있는 사람이라는 안정감을 주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제공하는 모든 것들, 사교계, 부유한 생활, 아름답고 감각적인 물건들...


그것들을 놓는 게 얼마나 어려웠을까. 다만 허영심 때문에 그것을 놓지 못하는 게 아니다. 재스민에게 과거를 놓는다는 것은, 사랑받는다는 느낌, 안전하다는 느낌, 풍요롭다는 느낌을 놓아보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안전하다는 감각, 사랑받는다는 감각은 '할'이라는 한 남자가 제공해주었던 것이다. 재스민 스스로 쌓아올렸던 것이 아니고, 그저 '할에게 사랑받는 덕분에' 제공받았던 것이다.


그러니 그녀가 현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더 이상 그녀를 사랑해주는 사람은 없고 그녀 혼자 남았으며 '그녀에게 제공되던 모든 것들이 아마 평생 제공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녀가 현실을 받아들인다면 그녀는 '할은 이제 죽어서 없고, 나는 혼자 남았고, 내 혼자만의 힘으로 살아가야 해. 다시는 부유해질 수 없을지도 몰라. 나를 지켜줄 수 있는 능력있고 믿음직스러운 누군가를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몰라. 그리고 내가 어리고 예뻤기 때문에 받을 수 있었던 로맨틱한 사랑을 내가 받을 수 없을지도 몰라. 이제는 가난에 쪼들리고, 그토록 멋있는 사람에게 그런 로맨틱한 사랑을 받지도 못하고, 동생에게 신세지며 멋지고 교양있는 친구들이 아니라 가난한 정비공들과 지내는 게 내 남은 인생일지도 몰라'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20대 초반에 한 남자를 만나 그 '능력있는 남자에게 사랑받는 귀여운 여인'로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하고 살아온 한 여자에게 그런 현실인식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 현실을 인식한다고 하더라도, '다시는 그렇게 행복해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게, 얼마나 사람을 무너뜨리는지 모른다.


나도 내 삼스카라를 놓지 못하고 오랫동안 과거에 머물러 지냈던 적이 있다.


내게는 1년 동안 꿈같이 행복했던 시간이 있었다. 그때 나 또한 재스민처럼, 내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외부적인 여러 요소들이 작용해서 '어떤 고민도 없이 평생 안전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삶이 영화같이 낭만적으로 느껴지고, 살아있는 하루하루가 빛나는 듯' 느껴졌다. 그 이전에도 즐거운 나날들이 종종 있었지만, 그 1년은 달랐다. 그 때는, 하루하루가 벅찰만큼 멋지게 느껴졌고 인생에 고민도 걱정도 없이 안전한 듯 했고 그런 인생이 평생 계속되기를 바랐다. 내가 스스로 힘으로 일군 행복이라기보다는 우연적 요소들이 겹쳐져서 그런 행복이 주어졌고, 당연히 1년이 지나고나서 외부적 상황들이 바뀌니까 자연스럽게 그 행복도 스러졌다.


주변 인물들이 바뀌었고, 내가 처한 환경이 바뀌었고, 내게 주어진 의무들이 생겼을 뿐이었다. 지극히 자연스럽게 삶이 전개되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도 그 모든 것들이 변하는 게 자연스럽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는데, 도저히 놓을 수가 없었다. 인생에서 그런 행복, 그런 안전한 느낌, 그런 달콤한 기분은 처음으로 느껴보았는데, 그것이 우연적으로 주어졌고 이제는 우연적으로 사라졌을 뿐이며 평생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르고, 다시 나는 원래 그 전의 삶처럼 그냥 팍팍하고 재미없고 조금은 불행한 듯 평범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걸,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나도 재스민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돌아갔다. 과거를 어떻게 하면 다시 붙잡을 수 있을지 고민하고, 절망하고, 불행해했다. 과거를 다시 붙잡아올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였을 때, '다시 그렇게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 같았다. 내 힘으로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어보였다. '지금 가진 것들에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서 살기, 운동 꾸준히 하기, 수면패턴 건강하게 유지하기' 뭐 그런 것들이 방법이라는 것은 모두가 말해주었지만, 지금 가진 것들이 전혀 감사하지도 기쁘지도 않았다.


그렇게 속절없이 불행해하다가 나는 우울증에 빠지고 마침내 수시로 히스테리컬한 공황발작을 일으키는 정도까지 정신적으로 심약해졌고, 그 후로도 그 1년의 기억에 대한 집착에서 완전히 빠져나오기까지 3년이 걸렸다. 그때는 자신이 없었다. 내 힘으로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을 자신이 없었고, 내 의지로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몰랐다. 그래서 다시는 행복해지지 못할 것 같아서 두려웠고, 그 두려움이 감당이 안되어서 과거로 돌아갔고, '과거는 이미 지나가버렸다'는 현실을 직면했을 때는 절망적이고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재스민이의 나약함이 너무나도 이해되었다. 재스민은 단순히 허영심 때문에 과거에 매달리는 게 아니다.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타인의 힘으로 행복을 누렸기에, 혼자 힘으로는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그녀는 현실을 직시할 수 없는 것이다. 현실을 직시하면, 자기 자신의 힘으로 행복해져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녀는 그럴 자신이 없을 것이다.


나는 그 시절을 겪어보고나니 '평생 불행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받아들이고 나면, 불행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을 분명히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렇지만 그것을 겪어보기 전에는, 그게 단지 두려움일 뿐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나는 평생 불행할 것'이라고 단정하게 된다. 그리고 재스민은 평생 불행하느니 차라리 행복했던 과거 속에 머무르기를 선택한 것이다.  



* 자유로부터의 도피



앞서 말했듯 재스민은 스스로 행복을 찾은 인물이 아니라, '할'이라는 타인에게서 사랑받음으로써 행복, 안정감, 풍요를 누리며 살아갔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에게 '할의 사랑'은 그녀의 생존과 안전 그 자체이며, 나아가 유일하게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다.  따라서 그녀는 자기 자신의 정체성도 '할로부터 사랑받을만하게' 설정한다.


재스민은 자기 이름을 '재닛'에서 '재스민'으로 스스로 개명할만큼 자신을 포장하고 꾸며낼 줄 아는 인물이다. 사교적이고 화술도 좋고, 상대방을 어떻게 유혹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으며, 매우 감각적이다. 그런 감각과 매력으로 할을 반하게 만들었고 드와이트도 유혹했지만 그녀는 진정으로 자신이 누구인지는 잘 모르는 듯 하다.


따라서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을 '타인의 인정, 사랑을 받는 것'에서 찾고자 한다. 진저가 말했듯 그들의 어머니가 '재스민이 뛰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재스민만 편애한 것'에서 그런 왜곡된 자아상(외적인 우월성을 통해서만 자신은 사랑받을 수 있다)을 가지게 되고 자신을 꾸며내게 되었을까? 추측해본다.


재스민은 할과의 관계에서 다소 백치처럼 행동하는데, 그것은 할로부터 사랑받기 위한 방법이다.


할은 재스민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었고', '이끌어주고', '주는' 권위적인 존재이다. 마치 아빠와 딸처럼, 키다리아저씨와 후원받는 소녀처럼.  


재스민은 할로부터 사랑받기 위해서 본능적으로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고 있으며, 자신이 맡은 역할을 충실히 연기한다. 또한 본인도 그런 역할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듯 하다.


사실 재스민은 할이 사기꾼이라는 것, 할이 사실 바람피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지만, 스스로를 속인다.


다만 가끔 너무 불안해지면 할에게 '당신 사업에 법적인 문제가 있다고 하던데, 사람들이 감옥 얘기를 해서 놀랐어' 라고 이야기를 꺼내는데, 할은 '그래서 내가 당신이 원하는 거 단 하나라도 안 준 적 있어? 걱정하지마.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해줄거야' 라고 말한다. 그리고 할에게 '그 여자랑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사람들이 당신이 바람피운다고 수군거려'라고 이야기 꺼내면 또 할은 '아무 일도 없고 난 당신 뿐이야'라고 말한다. 그렇게 할이 자신을 안심시키고 그녀를 떠나지 않을 것이며 그녀에게 안식처를 제공할 것임을 확실히 하면, 재스민은 기꺼이 모든 것들에 눈을 감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개인이 되면 혼자 서서, 세계가 지니고 있는 위험하고 압도적인 모든 측면과 맞서야 한다.
자신의 개성을 포기하고 외부 세계에 완전히 잠겨서 고독감과 무력감을 극복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하지만 이 충동과 거기에서 생겨나는 새로운 유대는 성장 과정 자체에서 끊어진 원초적 유대와는 다르다. 아이가 육체적으로는 결코 어머니 자궁으로 돌아갈 수 없듯이, 심리적으로는 절대로 개체화 과정을 뒤집을 수 없다. 그렇게 하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복종의 성격을 띠고, 권위와 거기에 복종하는 아이 사이의 기본적인 모순은 결코 제거되지 않는다. 아이는 의식적으로는 안도감과 만족감을 느낄지 모르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자아의 본래 모습과 힘을 포기하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즉 재스민은 세계가 지닌 위험하고 압도적인 측면을 피하고자 자신의 개성을 포기하고 마치 '어머니의 자궁'과도 같은, 젖과 꿀을 제공하는 '할의 사랑'에 기대어, 즉 할의 권위에 복종하여 '우월하고 능력있는 남자인 할에게 응석부리고 애교부리는 여자'로 역할하며 자신의 개성을 완전히 포기하고 '그에게 사랑받으며' 고독감을 극복하고, '그에게서 물질적인 것들을 제공받으며' 무력감을 극복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사기행각과 외도에 눈감는 것으로, 완전하게 자유로부터 도피한 것이다.


한편 할은 '권위주의적 성격자'로, 완전히 반대의 방식으로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자이다.


권위주의적 성격자에게 활기는 기본적인 무력감에 뿌리를 두고 있다. 활기는 이 무력감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활기는 자신의 자아보다 높은 무언가의 이름으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이나 과거, 자연이나 의무의 이름으로 행동할 수는 있지만, 미래나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 힘없는 존재나 인생 자체의 이름으로 행동할 수는 없다. 권위주의적 성격자는 우월한 힘에 의존함으로써 행동할 힘을 얻는다.

힘이 부족한 것은 그에게는 항상 죄와 열등감의 확실한 표시이다.


-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사실 할은 자스민과 마찬가지로, 자아를 상실하고 실존적 의미를 '외부'에서 찾는 인물이다. 그는 '나약하고 여린 여자를 돌봐주고 그 여자에게 삶을 제공해주는 능력있는 자아'에서 자신을 찾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할은 재스민에게 모든 보석, 명품, 사교계 인맥 등을 제공하고 정말로 그녀에게 달콤한 말을 해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길거리에서 재스민의 친한 친구와 바람을 피우고, 재스민에게 사업과 관련해서 그 무엇도 알려주지 않고 숨긴다.


그가 재스민에게 모든 것들을 제공하는만큼 그는 그의 권위를 인정받을 자격이 있고, 재스민은 그 모든 것들을 모른 척하고 '난 사업같은 건 몰라', '난 내 남편을 전적으로 믿어'라며 복종의 태도를 취하여 그가 주는 것들을 제공받는다.  


결국 할이 진정으로 '사랑에 빠졌다'면서 재스민을 버리는 외도 사건은, 재스민보다 더 '나약한' 여성, 10대 외국인 보모와의 외도이다. 그 전까지 수없이 많은 아름답고 능력있는 여성들과 외도를 저질렀지만, 그 여성들과는 그저 잠깐 놀아났던 것이고, '10대의 어리고 할 줄 아는 것 없는 보모'야말로 할이 진정으로 다시금 자신의 권위를, 그러니까 자기 '존재의 의의'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며 그는 그 간절한 '존재의 확인 욕구'가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그 또한 자유로부터의 도피, 그러니까 진정한 자기 자아로부터의 도피일 뿐이다.


할이 이러한 인물이었기에 재스민과 헤어지면서도 '난 너에게 충분한 생활을 제공할 것이다'라고 약속했던 것이리라.


할에게는 그런 '여자에게 책임을 다하는 모습, (사기를 치면서까지도) 자기 여자에게 아빠처럼 모든 것을 제공해줄 수 있는 모습'이 자기가 만든 자기의 자아이자 존재의 의의이기 때문에.


재스민이 이제껏 할의 외도를 눈감아준 것은, 할에게 '사랑'은 '물질적으로 모든 것을 제공해주는 것'이며 자신이 그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알았고, 그의 권위에 복종하는 게 또한 자신이 그에게 돌려줘야 하는 '사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재스민이 자기 자아를 포기하면서까지 종속되었던 할이 자기 의무를 저버리고 10대 보모와 사랑에 빠졌다고 하자, 재스민은 완전히 적의에 가득차서 할을 고발해버리고 만다. 그리고 이 때, 사실은 재스민이 할의 사업의 허점과 위법성을 아주 잘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재스민과 할의 노선도 각자 형성해왔던 자아상과 일관된 모습으로 전개되는데, 할은  '물질적 풍요를 제공해주는 권위자로서의 자아'를 상실하자 감옥에서 자살해버리고 한다.


재스민은 '권위있는(능력있는) 남자에게 사랑받는 여자'로서 정체성을 회복하고 나아가 자신의 안전과 행복을 도모하기 위해 드와이트를 유혹하지만, 드와이트가 파혼을 선언하자 무너져내리고 할에게서 받은 상처와 자신이 할을 죽였다는 잔인한 기억이 그녀를 덮치면서 정신적으로 붕괴해버리고 만다.



* 욕망이 고통을 낳는가?


부처는 '욕망'이 아니라 '욕망에 대한 집착'에서 고통이 일어난다고 말했다.


이는 진저와 재스민의 대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진저는 어린 시절부터 재스민과 차별받으면서 큰 인물로, 뛰어난 외모와 세련된 감각의 언니에 비해 자신은 평범하고 초라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재스민을 동경하고, 재스민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부러워하지만, 그렇다고 언니를 그리 미워하진 않는다.


재스민이 진저의 전남편 오기를 무시하고, 지금의 남자친구인 칠리를 무시하고 경멸할 때에도 언니 편을 들기도 하고, 또 언니가 쫄딱 망해서 신세지는 주제에 짜증낼 때에도 언니를 이해해줄 정도로 따뜻한 면이 있다.


재스민은 계속해서 진저에게 '그런 볼품없는 루저들 말고 좀 더 괜찮은 남자를 만나라'고 말하는데, '괜찮은 남자가 날 좋아해줘야 만나지'라고 말하면서도 전혀 속상해하거나 원한을 품지 않는, ego가 없는 인물이다.


그렇지만 ego가 없다고 해서 욕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재스민과 함께 간 파티에서 '알'이라는 남자를 만나게 되었을 때, 진저는 그 남자에게 흠뻑 빠지고 만다. 무식하고 교양없는 칠리와 달리 알은 세련되고 지적이며 로맨틱하다.


그런 알도 진저에게 흠뻑 빠지고, 진저는 별다른 죄책감 없이 칠리에게 헤어지자고 하고 알과의 미래를 꿈꾼다.


그러나 알고보니 알은 유부남이었다.


이에 진저는 알을 원망하지도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지도 않는다. 다시 칠리에게 연락해서 칠리와 재결합을 하고, 오히려 '칠리가 내가 만날 수 있는 최고의 남자다'라고 생각하게 되며 칠리와 사이가 돈독해져서 동거하기로 결정한다.


다만 칠리와 재결합한 후에는 언니 재스민에게 '더 이상 칠리에 대해서 나쁘게 말하는 건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진저는 매우 현실적이고 분별력 있으며 ego가 없는 인물이지만, 욕망이 없는 인물은 아니다.


그녀는 자신과 언니를 비교하면서 신세한탄을 하지는 않지만, 언니가 뉴욕에서 거물 사업가와 결혼해서 잘나가고 있으니 뭔가 콩고물이 떨어지지 않을까 생각하고 언니를 찾아가 남편 오기가 싫다고 하는데도 언니의 말에 따라 복권 당첨금을 형부의 사업에 투자하고, 언니를 동경하고 언니의 말을 나름대로 귀담아들으며 '나도 언니처럼 좀 더 괜찮은 남자를 만날 수도 있으려나' 생각하기도 하는 듯 하다.


그리고 실제로 언니 따라서 쫓아간 파티에서는 칠리보다 더 '수준 높은' 남자를 만나서 욕망에 흠뻑 빠져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결국 욕망이 좌절되었을 때 그녀는 욕망에 집착하지 않는다.


형부의 사기로 인해서 복권 당첨금이 날아갔을 때에도 그녀는 그냥 오기와 이혼하고 다시 자기 인생을 살아가며, 그 욕망에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기에 과거를 생각하지도, 언니를 원망하지도 않는 것이다.


알이 유부남인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도 알을 원망하고 실의에 잠기지 않고 지극히 현실적으로 상황을 받아들이고 칠리와 재결합해서 칠리와의 만남을 다시 즐겁게 만끽한다.


다만 그런 경험들을 통해서 언니가 부추기는 자신의 욕망이 허황되다는 것을 온전히 깨닫게 되고 재스민에게 '더 이상 나의 상황에 대해서 욕하는 것, 칠리에 대해서 욕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이와 달리 재스민은 자신의 욕망에 집착하는 인물로, 그 또한 시궁창같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노력해보려고 애를 썼지만(치과 카운터에 취직해서 일하고 공부 배우는 등) 결국 그 욕망에 대한 집착을 놓을 수 없어 드와이트를 유혹하기에 이른다.





케이트 블란쳇의 연기가 너무 좋았고, 신파적이지 않으면서 인간 감정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그러면서도 부담스럽지 않고 몰입감있게 풀어낸 수작!!


이렇게 분석하지 않아도 충분히 가벼운 마음으로도 그냥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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