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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선 Feb 23. 2023

해고를 생각하는 것은 죽음을 생각하는 것과 닮았다

구조조정에 착수한 스타트업, 그곳에 다니는 주니어의 생각

미팅에서 중요한 공지사항을 전달받았다. 요약하자면 회사 매출이 예상보다 저조해 구조조정이 있을 거다였다. 일종의 티저인 셈이다. 몇 가지 경고장이 추가로 내려왔다. 근태에 좀 더 신경을 써라, 출근 체크를 했어도 출근 시간에 자리에 없으면 그것도 고과에 반영될 거다... 일련의 공지들이 의미하는 건 단 하나다. 구조조정 대상 후보자 중에 나도 있다는 것.


이게 최선이라니. 결국엔 이거라니. 내가 결국 이 상황에 또! 도달하다니! 조직개편의 탈을 쓴 구조조정은 처음 겪는 일이 아니다. 이 회사에서 지낸 1년 중에서 절반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IT 업계답게 대다수 개발자는 구조조정을 피해 갈 수 있었지만, 소위 "비개발 직군"은 피해 갈 수 없었다. 계약직이거나 시용직인 직원들은 물론이고, 정규직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어떻게든 내 가치를 증명해 보이기 위해 과중한 업무를 맡았다. 일을 해냈으면서도 여전히 해내지 못한 업무로 눈치를 보며 죄책감을 느꼈다. 못하는 게 당연한 건데 죽을죄라도 지은 것 같았고 이게 잘 안되어서 결국엔 잘리게 되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이 목 끝까지 차올라서 울렁거렸다. 매주 열리는 정기 회의는 매 맞으러 가는 기분으로 들어갔다.




회의가 있었던 날, 퇴근 후 침대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이슈에 대응하는 코멘트를 작성했다. 파란 모니터를 보는데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멈출 수도 없었다. 지금 이거라도 해놓지 않으면 출근길 엘리베이터에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원망 어린 얼굴을 마주하게 될 것 같으니까. 회의에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한 마디 듣게 될 것 같으니까. 그런 무서운 상황들만 떠오르고, 불안은 끊임없이 나를 추동한다. 더, 더, 더! 새까맣게 타버릴 때까지 너를 태워서라도, 더!


잘 자라는 인사를 하려 애인과 통화를 하는데 예민해져 이리저리 모나고 뾰족해진 내가 보였다. 혹시 상처를 줄까 봐 미리 양해를 구하려 지금의 상태를 설명했다. 더듬더듬 이어지던 말 끝에 눈물이 터져나왔다. 내가 바란 건 이런 게 아니었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 이렇게는 살고 싶지 않다.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외침이 속에서 웅웅 맴돌았다.


나보다 먼저 이 조직을 떠난 사람들에게 위선자가 된 듯한 느낌도, 뒤처진 듯한 느낌도 든다. "○○님도 빨리 탈△△해요~" 하고 들으면 말문이 턱 막힌다. 이직을 위해 시작한 스터디에서는 내가 어느 회사 다니는지 말하자마자 "아 거기... 괜찮으세요?" 했다. '아뇨, 죽겠어요' 하는 말도 못 한다. 그러면 내 얼굴에 침 뱉기가 되니까.


근데 이게 내 얼굴인가? 수영장 매트 아니야?




어릴 때 수영 강사는 수강생 애들을 물 위에 뜨는 매트 위에 눕히고, 매트 한쪽 모서리 부분을 꼭 잡으라고 말했다. 우리가 그대로 누우면 그는 매트를 밑에서 들어 올렸다. 우리는 공중에서 매트 모서리를 붙잡고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썼는데, 그는 우리를 비웃는 듯 붙잡은 매트를 흔들어댔다. 그러면 모두가 줄줄이 수면 위로 떨어졌다.


그 행위는 게임이랍시고 몇 번씩 반복되었다. 알고 있으면서, 또 그걸 하리라는 걸 알면서도 당해야 했다. 누우라면 눕고, 버티라면 버티고. 수면으로 떨어지게 되면 입으로 코로 밀려 들어오는 물을 먹고 수면 위에 놓인 색색깔의 플라스틱 레일을 어떻게든 붙잡고 올라와서야 숨을 몰아쉬었다. 수영장의 권력자는 그였다.


20년이나 지났는데 여전히 그 수영장에서 있는 것 같다. 위에 있는 누군가는 판을 뒤집고 그 판에서 버티는 사람들을 시험한다. 버티는 와중에 집요하게 괴롭히고 회유해서 결국 누군가 떠나게 될 때면, 그마저도 자진 퇴사가 아니냐고 우기기까지 한다. 상처투성이인 실업 급여라도 받게 되면 다행이라고 말하며 짐을 정리한다. 그를 자른 사람이 그의 실업급여를 '챙겨주셨다'라고까지 말하면서. 업계가 좁은 만큼 그게 안전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처럼 온통 애를 쓰고, 그럼에도 결국엔 물속으로 떨어지는 건가? 밀려드는 물 대신 밀려드는 모멸감을 견디면서? 그런 것 밖에 남아있지 않은 걸까? 회사도,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한 최선은 무엇인가?




'언젠가 잘리고, 회사는 망하고, 우리는 죽는다!'


MBC <아무튼 출근>에 출연한 이동수 씨의 명언이다. 이 말을 처음 접했을 때, ‘언젠가 잘리고’ 부분은 자동으로 블러 처리한 것처럼 받아들였다. 그도 그럴게 ‘잘리고’라니, 해고를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당연히 언젠가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발전한 모습으로 인정을 받을 테니 해고 같은 건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했다.


해고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정확히는 직장에서 해고당하는 과정을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그 결과는? 직장에서 잘린 이후에 어떻게 살아갈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이 질문은 죽음을 생각하는 것과 닮았다. 첫째, 공포감을 주는 단어. 오래전부터 해고는 사회적 죽음으로 대해졌다. 죽음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죽음 그 자체다. 둘째, 그 이후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다. 명예퇴직을 당하면 치킨집을 차리겠다는 자조적인 농담은 인터넷으로나 접해봤지, 나도 정말 그래야지 해본 적은 없다. 셋째, 본인의 의지와 다르게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죽음 또한 자살이 아니라면 본인의 의지와 다를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해고를 생각하는 것은 죽음을 생각하는 것과 닮았다.


냉정히 보면 '언젠가 잘리고, 회사는 망하고, 우리는 죽는다!'라는 최악의 상황들을 단언하는 말이다. 동사만 떼어내서 보아도 그렇다. '잘리고', '망하고', '죽는다'로 이루어진 염세적인 문장으로도 받아들여질 수 있는데 왜 되려 명쾌하다고 생각했을까. 그건 이 문장이 말해주기 때문이다. 아무리 매트 모서리를 붙잡고 힘을 줘도, 주지 않아도 어차피 결국엔 물에 빠지는 거라고, 그리고 우리 모두 이 일을 겪게 된다고 말이다.


추락이 아니야. 용기를 내서 뛰어내리길 선택하던지, 어쩔 수 없어서 떨어지던지, 어쩌든지 간에 그건 추락이 아니고 그저 당연한 일이야. 그렇담 어차피 빠질 거 시원하게 빠져도 되지 않겠어? 매트에서 떨어질 때쯤에 여유 있게 숨을 들이쉬자. 풍덩 빠지거든 시원한 물속을 이리저리 잠수하고 원하는 때에 물 밖으로 나오면 되지 않겠어? 어차피 겪을 일이라면 좀 더 즐거워도 될 거야...


물론 명쾌한 한 방이 모든 것을 해결하진 않는다. 나는 여전히 구조조정 후보자 명부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어느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나의 잔존도, 해고도. 죽게 된다면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길 바라는 것과 똑같이, 내가 이 조직을 떠난다면 자의로 선택한 퇴사이기를 바란다. 아니면 차라리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는 권고사직을 당하고 싶다. 이왕이면 어릴 적부터 부어둔 생명보험금이 빛을 발할 수 있는 죽음을 겪길 바라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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