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기독교인 엄마와 평범한 성소수자 딸
엄마는 기도를 마무리하더니 이제는 기도원 옆에 딸린 카페에 가자고 했다. 오늘따라 뭔가 이상한데. 이것만 잘 넘기면 다시 내 방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알겠어요, 나는 차 마실래.” 음료가 나오고, 몇 번 어색하게 홀짝이던 중에 맞은 편에 앉은 엄마가 내게 물었다. “너 여자친구 만나니.”
인생 첫 비-이성애 연애가 시작된 지 15일째 되던 날, 엄마가 느닷없이 드라이브를 하러 가자고 말했다. 그전까지 단둘이 드라이브라는 걸 해본 적이 없었지만 뭐, 그럴까, 하며 차에 탔다. 어디로 가느냐고 몇 번을 물어도 대답이 없었다. 이렇다 할 대화도 없이 차는 어느덧 서울을 벗어났고, 그렇게 1시간 남짓을 달려 도착한 곳은 기도원이었다.
맨날 누구 한 명이 죽고, 가슴 시리게 아파하다 끝나는 퀴어 영화가 딱 질색이었다. 그 까닭에 ‘연애 편지 서사’가 얼마나 흔한지도 몰랐다. 그저 덮어두고 안 보여주면 안 볼 줄 알았다. 이런 어설픈 예상을 뒤집고 딸의 다이어리를 열었을 때, 그는 사랑에 절다시피 한 연애 편지 초안을 발견했다. 드라이브니 뭐니 핑계를 대며 웬 산중 기도원에 데려와 눈물의 기도를 끝낸 후, 그는 이제 딸을 설득하기로 했다.
그날 나는 설득 당하지 않았다. 앞에 놓인 뜨거운 둥굴레차가 다 식을 때까지 도대체 ‘팬섹슈얼’이 뭔지, 내가 왜 ‘그거’여야만 하는지, 왜 ‘이 감정’이 우정일 수 없는지 여러 번 설명했다. 산속 조용한 카페에서 이어진 치열한 대화. 그곳에서 우리는 어떠한 타협점도 찾을 수 없었다. 창밖이 시커메졌을 무렵에야 지칠 대로 지쳐, 이제는 가야 할 시간이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로를 견디는 시간만이 남아있었다. 차를 몰아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에도, 그 이후에도.
잠시 왔다 가는 풋내기 사랑. 그 정도로 지나가길 바랐던 것 같다. 엄마는 그게 얼마나 갈 것 같으냐고, 우정은 영원할 수 있어도 사랑은 아니라고 했다. “그럼 엄마도 아빠랑 평생 친구로 지내지, 결혼은 왜 했대?” 하면 곧 조용해졌지만. ‘어디 이게 내 인생 단 한 번뿐일까 봐?’ 하고 발끈해서 내가 얼마나 확실한 퀴어인지 보여주고 싶었다. 데이트를 다녀올 때마다 엄마 앞에 앉아 오늘 내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보란 듯이 조잘거렸다. 그러다 얼추 내성이 생겼나. 애인이 우리 동네에 놀러 온다는 말에 엄마는 본인이 아는 동네 카페 중 제일 맛있다는 곳을 추천해줬다. 뭐지, 이상하다. 이후에도 이따금 툴툴거리면서 동네 제일의 맛집을 추천하던 목소리를 떠올리면 요상하게 즐거웠다.
인정하기 싫었던 엄마의 말대로, 지지고 볶던 연애는 어느 순간 결국 끝이 났다. 헤어지던 날엔 집에 돌아가기가 죽기보다 끔찍했다. 이제 막 전 애인이 된 그 애한테는 미안한데 오늘까지만 재워달라고 말했다. 아침에 그 집을 나와 바로 학교로 향했다. 가는 내내 엉엉 울었지만 달리 연락할 사람도 없었다. 내 연애를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가장 가까운 사람이 엄마였지만 나는 가장 가까운 길을 두고 멀리 돌아갔다.
엄마가 알게 된 건 이미 계절이 한 차례 지난 후였다. “그러게 영원한 건 없다니까……” 하는 말을 모르는 척하고 그래도 나는 해보길 잘했다고 말했다. 지켜보는 앞에서 혼자 울다가, 그쳤다가, 다시 울었다. 알고 있었냐고 물으니 맨날 조잘거리던 애가 요즘엔 잘 안 그러기에 짐작만 하고 있었다고 했다. 티 안 내고 잘 숨겼다며 뿌듯해했다가 이내 허탈해졌다. 그렇게 애써도 엄마는 이미 알고 있었다. 슬플 일도, 민망할 일도 지나갔다. 그만 하면 괜찮아질 법도 했지만 나는 울다 그치기를 반복하며 천천히 나아졌다. 내게 가장 가까운 사람은 여전히, 엄마였다.
그가 갑자기 차별금지법의 열렬한 지지자가 됐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얼마 전에도 ‘요즘엔 기독교인들만 쓰는 소개팅 앱이 있다더라’ 하는 말을 넌지시 했다. 믿는 사람들끼리 만날 수 있는 건 복이라는 의견도 덧붙였다. “그럼 엄마가 해봐요. 아빠가 안 믿어서 힘들었잖아. 이참에 세컨 하나 두는 거지 뭐.” “그럴까?” 그래도 이런 대화를 이렇게 대충 끝낼 수 있게 된 점이 나름 감사하다. 어쩌면 이게 작은 시작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