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떠보니 새벽 두 시 반. 건대입구역 롯데백화점 앞 벽돌 계단에 누워서 자고 있었다.
벌떡 일어나서 택시를 잡았다. 여전히 취한 상태였는데 티가 안 났을까, 내가 계단에 누워있다 일어나서 온 것을 못 보신 걸까, 다행히 택시기사님이 승차거부는 하지 않으셨다. 막상 택시를 타고 집에 가고 있는데, 가방 안에 손을 넣고 더듬거려 보아도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핸드폰도 지갑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당연하게도 택시비를 결제할 수가 없었다. 집 앞에 도착하기까지 30분. 그동안 머리를 쥐어짜 집에 현금이 있는지, 다른 신용카드가 있는지 기억해 냈다.
다행히 책상 서랍 한 구석에 두었던 체크카드가 있었다. 그 시점 내 수중에 있는 전 재산. 집에 올라가 가져온 체크카드로 택시비를 결제했다. 나중에 계좌 이력을 보니 그 결제 건 이후 잔액은 300원, 눈앞이 아찔하다. 건대입구역에서 집까지 300원어치보다 더 거리가 있었다면 어쩔 뻔했어. 그 밤중에 온 가족을 깨워서 택시비를 결제해야 했겠지. 부모 집에 사는 이십 대 후반 여성은 이런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큰일 나는 법. 잔액 300원에 감사했다.
집에 돌아와 취한 정신으로 이불속에 기어 들어가는 와중에 아이패드를 꺼내서 '나의 iphone 찾기'를 켰다. 그 기능을 쓰면 분실된 폰 잠금화면에 연락처를 표시할 수 있다. 비상 연락처로 엄마 핸드폰 번호를 지정해 두고, 나는 잠에 들었다. 당연히 다음날 아침 눈을 뜬 건 엄마의 손길에 의해서였다. 내 핸드폰을 주우신 분이 화면에 떠있는 번호 - 엄마 휴대폰 번호- 로 전화를 주신 거다. 엄마는 주말 아침부터 대뜸 걸려온 '핸드폰 잃어버리지 않으셨냐'는 전화에 보이스피싱인가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곧바로 자기 자식 중에 남다른 애가 있었음을 떠올리고 유력한 용의자를 찾아온 거다. '너 핸드폰 잃어버렸니?' 부스스한 얼굴로 엄마가 말했다.
순순히 인정하고 부모님 차를 얻어 타고 건대입구역으로 향했다. 핸드폰을 습득하신 분과 롯데백화점 앞에서 만나기로 하고 기다리는데 내가 어제 누워있었던 계단이 보였다. 붉은 벽돌 계단을 보니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어이구 화상아...
이렇게 써두면 내가 완전 술고래에 진상 취객 같아 보일지 모르겠지만, 정말 억울하다. 난생처음 있는 일이었다. 성인이 되고 서울에서 술을 마셔본 적이 잘 없어서 그런지도. 내가 대학을 다닌 동네는 경기도니까 이런 정도의 사건이 생길 일도 없이 대충 굴러가면 기숙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복도에서 자더라도 아무 문제 안 생기는 곳이었단 말이다. (물론 복도에서 자본 적은 없다.) 하지만 만약 서울에서 대학 생활을 했다면 이미 겪었을지도 모를 일이긴 했다.
아무리 그래도 말이지, 이십 대 후반에 이 모양이라니. 하지만 이렇게 끝난 게 어디냐 감사하게 생각하자. 듣자 하니 누구는 스무 살 때 술 마시고 뻗어서 파출소에 갔다고 했다. 그 친구네 어머니가 데리러 오셨다가 파출소 바닥에 뻗어있는 애를 보고 기함을 하셨다고. 그거 보면 역시 나는 양호하다. 적어도 부모님의 정신적 충격 면에서는...
핸드폰을 습득하신 분이 나타났다. 유아차를 끌고 온 부부였는데, 뵙자마자 고개 숙여 인사하고 몇 번씩 감사하다고 말했다. 핸드폰을 보관해주시지 않았다면 또 핸드폰까지 새로 샀어야 했겠지. 잃어버린 것은 카드와 신분증만으로 충분하다. 커피라도 사드리고 싶다고 했는데 괜찮다고 하셔서 또 한 번 고개 숙여 인사했다.
우연히 내 지난밤을 알게 된 분들을 보내고, 하룻밤 동안 나와 멀어져 있던 핸드폰의 감촉이 왠지 어색했다. 그동안 어설프게 어른 흉내를 내고 있던 걸 들켜버린 기분이었다. 건대입구역 롯데백화점 앞 벽돌 계단에서 엎어져 자고 있던 나는 어설픈 어른 흉내조차 못 낼 정도의 날 것이었다. 이젠 좀 커야 하는데 여전히 얼레벌레 요란법석 돌아가는 하루하루... 짱구는 팬이라도 많지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