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p.31
그렇다고 해서 평균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평균에도 나름의 역할이 있다. 서로 다른 두 그룹의 사람들을 비교할 경우라면, 그러니까 예를 들어 각자 다른 그룹에 속한 2명의 개인을 비교하는 것이 아닌 칠레의 조종사들과 프랑스의 조종사들 간의 실력을 비교하는 경우라면 이때는 평균의 유용한 역할을 해준다. 하지만 한 사람의 조종사나 한 사람의 배관공이나 한 사람의 의사가 필요한 순간이거나, 이 아이를 가르쳐야 하거나 저 종업원을 채용할지 말지는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라면, 다시 말해 어떤 개개인과 관련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라면 평균은 쓸모가 없다. 아니, 쓸모없다는 말도 과분한 표현이다. 평균이 사실상 한 개인의 가장 중요한 면모를 알아보지 못하게 속일 경우엔 허위 정보를 제공하는 격이기 때문이다.
집단과 집단을 비교할 경우에는 평균이 유용할지라도, 개개인을 평균으로 판단해서는 개인의 개성을 놓쳐버릴 수 있다.
p.91~93
우리 아이들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평균적 학생에 맞춰 설계된 표준화 교육 커리큘럼상의 수행력에 따라 분류 돼 평균을 넘어서는 학생들에게는 상과 기회가 베풀어지고 뒤처지는 학생들에게는 제약과 멸시가 가해진다. 현시대의 여러 석학, 정치인, 사회 운동가들은 우리의 교육 시스템이 망가졌다고 거듭거듭 지적하고 있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 지적과 정반대다. 지난 세기 동안 우리의 교육 시스템은 기름칠이 잘 돼 있는 테일러주의 기계처럼 잘 돌아가도록 개선 돼오면서 애초 구상에서의 설계 목표를 위해 가능한 한 한 방울까지 효율성을 모조리 짜내왔다. 그 결과가 바로 학생들을 사회에서 적절한 위치에 배정시키기 위한 효율적 등급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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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해서 일터의 테일러주의화와 학교의 표준화 및 등급화 시행이 무슨 실패작이라도 된다는 주제넘은 주장을 펴려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실패작도 아니다. 사회가 평균주의를 받아들이면서 기업들은 번창을 누렸고 소비자들은 보다 저렴한 상품을 구매하게 됐다. 테일러주의는 사회 전반적으로 임금을 인상시켰으며 어쩌면 지난 20세기의 그 어떤 경제 발전기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을 빈곤에서 구제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대학 지원자들과 구직자들이 평균화 시험을 치를 수밖에 없게 됨으로써 족벌주의와 연고주의가 줄어든 한편 불리한 배경 출신의 학생들에게 전레 없는 수준의 출세 기회가 부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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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평균주의는 우리에게 대가를 치르게 했다. '노르마' 닮은 꼴 찾기 대회가 그러했듯 사회는 우리 모두에게 학교와 직장생활과 삶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특정의 편협한 기대치를 따라야 한다고 강요하고 있다. 그 결과 우리 모두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되려고 기를 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들처럼 되되 더 뛰어나려고 기를 쓴다. 영재들이 영재라고 불리는 이유는 다른 모든 학생들과 똑같은 표준화 시험을 치르지만 더 뛰어난 성적을 받았기 때문이다.
현재의 평균에 의지하는 교육체계와 사회 시스템이 과거의 궁핍했던 사회로부터 부를 창출하게 해 준 체계였음은 틀림없다. 그러나 이에 대한 부작용이 점차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누구의 기대에 충족시키기 위해 살아가는 걸까? 자기 자신? 가족? 사회 구성원?
사람들은 본인이 진정 원치 않는 욕망을 쫓는다. 누군가에게 전이된 욕망을 쫓는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겐 어쩔 수 없는 현상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끝은 초라하다. 모두의 기대에 맞추어 가는 삶은 초라하다. 애초에 불가능하다. 분명 자신이 선택했다고 생각함과 동시에 열심히 살고 있음에도 자유롭지 않다. 무언가에 속박된 느낌이다. 인간은 평균이라는 기준에서 벗어나서 스스로 선택한 자신의 삶을 꾸려 나아갈 수 있을 때, 진정 자유를 얻는 것이지 않을까.
p.114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우리에게 스스로를 수많은 평균에 비교해 평가하도록 조장하며, 아니 강요하며 우리에게 그 정당성을 끝도 없이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직업적 성공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급여를 평균 급여와 비교해야 한다. 학업 성과를 판단하기 위해 자신의 GPA를 평균 GPA와 비교해야 한다. 결혼이 늦은 편인지 이른 편인지를 판단하기 위해 자신이 결혼한 나이를 평균 결혼 연령과 비교해야 한다. 하지만 일단 평균주의식 사고에서 자유로워지면 이전에는 불가능해 보였던 것이 차츰 직관적인 일이 됐다가, 더 지나면 당연한 일로 굳어질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교육의 문제점에 대해 학생들의 불안정한 정신상태에서의 무분별한 경쟁과 서로에 대한 원인 모를 열등감을 심어주어 각자의 개성은 잃은 채 서로 비슷한 방향성을 추구하게 만든다고 생각해 왔다. 이제는 이러한 상황이 모두 평균주의적 사고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적절한 성적을 가지고 적절한 대학에 들어가 적절한 직업을 통해 적절한 가족을 꾸려 비슷한 방향성을 추구하며 삶을 살아간다. 인생 자체에 평균이라도 있는 걸까?
우리는 이 평균적인 삶의 흐름을 맞추기 위해 발버둥 친다. 명문대에 들어가길 원하고, 급진적으로 래퍼 혹은 개발자가 증가하고, 비트코인과 주식이 열풍을 일으킨다. 문제는 '무엇을 한다'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평균에 속하면 그 속에서 손쉽게 성공을 할 수 있다는 '착각'에 있다. 평균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로, 평균 속에서 자신의 개성을 찾으려 한다면, 자신이 평균의 기준에 완전히 부합한 사람이라는 것을 모른 채 타인을 모방하다가 좌절에 빠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p.158
쇼다의 연구는 개개인성의 두 번째 원칙인 맥락의 원칙을 구체적으로 밝혀준 것이었다. 맥락의 원칙에 따르면 개개인의 행동은 특정 상황과 따로 떼어서는 설명될 수도 예측될 수도 없으며 어떤 상황의 영향은 그 상황에 대한 개개인의 체험과 따로 떼어서는 규명될 수 없다. 다시 말해 행동은 특성이나 상황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 둘 사이의 독자적 상호작용을 통해서 표출된다. 어떤 사람을 이해하고 싶다면 그 사람의 평균적 경향이나 '본질적 기질'을 이야기하는 방식을 취해서는 길을 잃게 된다. 그보다는 그 사람의 맥락에 따른 행동 특징에 초점을 맞추는 새로운 사고방식이 필요하다.
p.161~162
나는 할머니와 있을 때는 정말로 얌전했다. 내 공격성은 위협을 느낄 경우와 같은 아주 특정한 맥락에서 발동됐다. 종이를 씹어 불어서 말썽에 휩싸였던 그 수업의 배경에도 나보다 덩치 큰 애들 셋이 툭하면 나를 못살게 굴던 맥락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교실 밖에서는 가급적 그 애들을 피해 다녔지만 교실 안에서는 장난꾸러기가 돼 그 애들의 위압감에 대응하기 일쑤였다. 그 애들을 웃게 해 주면 그 애들이 나를 덜 건드릴 것 같아서였다. 그 방법은 대체로 잘 통했지만 상담실 호출거리를 만들기도 했다. 학교 선생님들이 내 행동의 맥락을 이해하려 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든다. 그랬다면 나에게 공격적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대신, 또 '문제아'의 낙인을 찍는 대신 도움이 돼줬을 텐데. 왜 내가 그런 맥락에서 말썽을 피우는지를 헤아리려 애썼다면 내 성격의 본질을 간파했다고 간주해버리지 않고 담임교사에게 귀띔을 하거나 나를 다른 반으로 옮기는 식으로 중간에서 조정을 해줄 수 있었을 텐데.
이후에 웨버주립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나는 나름대로 간파해 낸 나 자신의 상황 맥락별 기질을 활용해 수업에 임하는 방법을 바꾸었다. 그중에서도 신입생 시절에 아주 유용했던 한 방법은 나와 같은 고등학교 출신으로 얼굴을 아는 학생들이 있는 강의는 피했던 것이다. 그런 특정 맥락에 놓이면 내가 장난꾸러기처럼 굴게 될 것 같고, 또 강의 시간에 장난꾸러기처럼 굴면 대학 공부를 제대로 못하게 될 것 같아서였다. 가만히 주의해서 보니 나는 특정 학습 지도 스타일에 잘 호응하기도 했다. 나는 스스로 생각하며 이런저런 주장을 내놓도록 자극해 주는 선생님들을 특히 좋아했다. 반면에 이미 주지의 사실이니 가만히 앉아서 가르쳐주는 대로 소화시키는 것이 학생의 도리라고 여기는 듯한 선생님들의 수업에서는 답답함을 느끼며 집중을 못했다. 그래서 매 학기 초반이면 6개 과목을 신청해서 과목마다 최소한 한 수업을 들었다. 그 수업에 내가 아는 애가 있거나 교수님 스타일이 나에게 잘 맞지 않으면 해당 과목은 중도에 그만뒀다.
나는 특정 맥락에서의 내 행동 방식을 파악한 덕분에 대학생으로서나 그 밖의 입장에서나 더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p.177~180
우리는 아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다양한 맥락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심지어 가장 가까운 이들의 경우라 해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런 탓에 제한된 정보를 기반으로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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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에게는 당신과 그 사람 둘이 함께 놓여 있는 그 순간의 맥락만이 전부가 아님을 명심한다면 마음의 문이 열려 본질주의 사고로는 어림없는 수준의 넓은 도량으로 타인을 더 깊이 이해하고 존중하게 된다. 게다가 이런 이해와 존중은 우리에게 성공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긍정적 관계의 토대다.
맥락적 사고로 상황을 받아들인다면, 더 깊은 이해와 공감을 할 수 있을 거 같다. 나도 사실 우리 엄마에게는 말투가 조금 차가워서, 가끔 '이게 내 본성인가?'라는 생각을 한다. 내 마음은 그게 아닌데,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인데, 이상하게 엄마와 대화를 하면 톤이 낮아지고 말투도 차가워진다. 다행인 건, '이건 나의 본성이 아니었구나.'라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고, 충분히 맥락적으로 바라본다면 해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 공부를 너무 억지로 시켰던 우리 엄마가 너무 미웠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나 사춘기가 되어 반항적으로 게임을 많이 했었다. 물론 사춘기가 지나고 어느 정도 성숙해졌을 때는 반항심이 많이 사그라들기는 했다. 하지만 나의 차가운 말투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지금으로선 그때 엄마의 심정이 당연히 이해가 간다. 오히려 반항적인 사춘기로 인해 나로부터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엄마한테 미안한 생각이 든다. 점차 우리 엄마에 대한 나의 차가운 태도를 고쳐 나아가야겠다. 나의 차가운 태도의 원인을 맥락적으로 잘 파악했으니, 이제는 이러한 태도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걸 잘 파악했으니, 충분히 바꿀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p.191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경로가 한 가지뿐이라고 믿으면 당신의 진전을 평가할 방법도 한 가지뿐이다. 다시 말해, 각각의 중대 시점마다 기준과 비교해 자신이 어느 정도 더 빠르거나 더 느린지를 살펴봐야만 한다. 그러한 결과로 우리는 개인의 성장, 학습, 발전의 속도에 중대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더 빠른 것을 더 훌륭한 것으로 동일시하고 있다. '위즈 키드(젊고 두뇌 회전이 빠르고 첨단 지식으로 무장한 경영의 귀재들)'나 '퀵 스터디(이해가 빠른 사람)' 같은 말들에는 빠를수록 더 똑똑하다고 믿는 우리의 문화적 신념이 그대로 반영돼 있다.
p.195~196
우리 학생들에게 고정된 속도의 학습을 강요함으로써 수많은 학생의 학습 능력과 성취력을 인위적으로 해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한 사람이 배울 수 있는 것은 속도의 조절을 허용한다면 대다수 사람들도 배울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교육 시스템 구조는 그런 개개인성을 고려해 설계되지 않으며 그에 따라 학생들 모두의 잠재력과 재능을 제대로 키워주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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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인 모델에서는(고정된 기간이 지난 뒤 학생 성취도에 대해) 단편적 평가를 내릴 때 '얘들은 재능 있는 애들이고 얘들은 더딘 애들이군. 얘들은 특별반으로 배치해야겠네. 얘들은 다른 교실로 배치해야 할 것 같군.'이라는 식으로 말하게 됩니다. 하지만 모든 학생을 저마다의 속도에 맞춰 공부하게 해 주면 6주 전에 더디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아이들이 이제는 재능 있는 아이들로 보이게 됩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거듭거듭 목격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좋은 평가를 빌려 혜택을 봤던 그 결과들 가운데 단지 시간상 우연의 일치 덕분이었던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나도 어렸을 적 수학학원을 다녔을 때가 생각난다. 똑같은 문제집에 똑같은 설명을 듣고 똑같은 시간 동안에 우리는 수학 공부를 했었다. 그래서인지 우리의 실력을 평가했던 유일한 척도는 속도였다. 속도가 느렸던 나는 계속해서 뒤쳐졌고, 결국에는 수학의 흥미를 잃게 되었다. 속도가 빠른 친구들이 부러웠고, 나는 나를 스스로 '수학을 못하는 놈'이라고 정의했다. 자연스레 수학과는 거리가 멀어졌고, 수학을 빠르게 풀기 위해 개념보다는 풀이과정을 외우게 되었다. 결국 난, 수학을 공부하는 것이 아닌 숫자를 베끼는 학생이었다. 그렇게 성인이 되어 군대에서 수학에 관심이 생겨 스스로 수학 공부를 하게 되었다. 이상하게도 생각보다 수학이 재미있었다. 스스로 답을 찾고 이해가 안 되면 될 때까지 생각하고 고민하면서 점차 실력을 쌓아갔다. 속도와 상관없이 수학이라는 학문을 집중해서 공부할 수 있다는 게 나에게 수학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된 큰 계기가 된 것이다. 나는 누구의 설명을 듣고 그 방식을 따르는 것보다, 스스로 읽고 탐구하고 생각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것 또한 깨달았다. 만약 학창 시절에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p.203~204
우리가 흔히 어떤 특정 목표에 이르는 경로는(그 목표가 읽기 습득이든 최고 실력의 운동선수든 회사의 운영이든 간에) 저 밖의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한다. 앞서 걸어갔던 여행자들이 닦아놓은 숲 속의 보행로 같은 경로가 있다고 여기며 삶에서 성공하는 최선의 길은 그런 잘 닦은 보행로를 따라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경로의 원칙은 우리에게 다른 얘기를 전해준다. 우리는 어떤 경우든 자신만의 경로를 처음으로 내고 그 길을 닦으며 나아가는 것이라고. 우리가 내리는 모든 결정이나 우리가 겪는 모든 일에 따라 매번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능성에 변화가 생기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고. 그리고 이는 기어 다니기를 배우는 중이든 마케팅 프로그램 기획 요령을 배우는 중이든 다르지 않다고 말이다.
이런 사실은 곰곰이 생각해 보면 덜컥 겁이 날 만도 하다. 익숙한 이정표가 도움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방해가 되기 쉽다는 암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익숙한 이정표에 의존할 수 없다면 무엇에 의지해서 행동할 수 있을까? 이미 앞에서 살펴봤던 우리의 들쭉날쭉한 측면과 상황 맥락별 기질을 감안할 때 경로의 원칙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의지처다. 우리가 올바른 길에 서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길이 우리의 개인성과 얼마나 잘 맞는지를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p.208
우수성을 이루기 위해 나에게 유용한 길이 어딘가에 있지만 그 길이 어떤 형태일지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뿐이라는 믿음이었다. 그리고 그런 길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야 했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이 책은 대한민국을 설명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만큼 나에게 많은 공감을 일으켰고, 더 나아가 어떤 맥락으로 스스로를 발전시킬 수 있을까에 대한 고찰을 나눠주었다. 나는 근본적으로 대한민국의 교육 시스템에 의해 '서로를 비교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모두가 똑같은 길을 걷고자 공부를 하고, 자기 계발을 하며, 유행과 트렌드에 민감하다. 이는 분명히 사회가 평균주의 시스템에 사로잡혀 있기에 일어나는 상황이다. 심지어 요즘은 이 평균의 기준마저 너무 올라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이들은 일정한 시기에 똑같은 교육을 받도록 강요당하고, 교육을 잘 수행해 낸 아이들은 모범생, 그렇지 못한 아이는 똑똑하지 못한 학생 혹은 불량학생으로 분류된다. 그렇게 모범생들은 자신의 점수에 맞춰 취업이 잘 되는 전공과 좋은 대학교로 들어간다. 이러한 아이들에겐 분명히 더 뛰어난 점이 있다. 하지만 평균 이하의 성적을 가진 학생들은 다른 재능이 없는 아이들인가? 이는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문제이다. 개개인성을 무시한 채 집단의 평균으로 개인을 판단하게 되면 많은 학생들이 기회의 불균형 속에서 공부를 하게 된다. 심지어 스스로가 열등감에 빠지거나 자기혐오에 빠져 자신의 다른 가능성을 바라보지 못한다. 수능이라는 시험 자체 하나로 좋은 대학에 들어간다는 것이 피상적으로는 상당히 평등해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모두가 수능이 요구하는 사고와는 적합하지 않다. 이것을 알게 되면 수능이 그다지 평등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
맞춤이 기회를 만든다.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의 재능을 펼치기가 어렵다. 다시 말해 우리가 각자의 잠재력을 펼칠 기회를 누리고 싶다면, 개개인성에, 즉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자신의 길을 개척해야 한다. 이는 상당히 두려운 말이다. 큰 용기가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요즘 세상이 점점 개개인을 존중하는 방향성으로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인 듯싶다. 유튜버, 아이돌, 틱톡커, 프리랜서 등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재능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자신의 길을 잘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에 반해, 분명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통을 받고 있고, 멸시받고 있는 이들 또한 있다. 하루빨리 이들이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이런 이야기가 생각난다. 어느 날 원숭이와 물고기가 나무 타기 시합을 했다. 시합에서 진 물고기는 "난, 왜 이렇게 무능력할까?"라고 하며 스스로를 자책한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물고기가 무능력한 것이 아니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