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

독서

by 선 화

이 책은 내 독서인생의 시발점이 되어준 책이기도, 인생을 통째로 바꿔준 책이기도 하다. 누군가 나에게 "너의 인생 책은 뭐야?"라고 묻는다면,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 책을 택할 것이다. 그토록 나한테 많은 영향을 준 책이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몰입>, 최인수, 한울림, 2004.

# 플로우?

p.30
플로우는 사람들이 다른 일에는 아무 관심이 없을 정도로 지금 하고 있는 일에 푹 빠져있는 상태를 말한다. 다른 말로 하면 이런 경험 자체가 너무나 즐겁기 때문에 이 상태를 지속하기 위하여 어지간한 고생도 감내하면서 그 행위를 하게 되는 상태이다.
p.41
사실 우리가 높은 목표를 갖는다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단, 우리가 그 목표를 이루어나가는 과정을 즐기면서 노력한다는 전제가 있다면 말이다. 문제는 우리가 목표 달성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현재의 삶에서 즐거움을 얻지 못한다는 데 있다. 이런 현상이 발생하면 더 이상 자신의 삶에 대해 만족을 느끼기가 어려워진다.

독서노트를 작성하는 동안 나의 가치관과 삶의 방향성에 대해 정말 많은 생각을 해왔다. 이 책은 그 과정에 큰 영향을 주었다. 나에게 몰입이 일어나는 순간을 바탕으로 개인적으로 평소에 동경해 온 대상을 생각해 봤다. 좋은 글을 쓰는 사람, 좋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 좋은 노래를 부르는 사람 혹은 좋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나에게 다양한 영감을 준다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한 끝에 한 가지 인생철학이 생겼다.


'남에게 영감과 감사를 주고, 나 또한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함으로써 영감과 감사를 받으며, 조화로운 삶을 살아가자.'


물론 이 가치관이 나에게 온전히 체화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항상 나는 이 가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며, 언젠가 그렇게 될 것이다.


p.54~55
완전히 사회화된 사람이란 다른 사람들이 결정한 보상을 받고 만족하는 사람이다. 물론 그 보상은 본인이 원했던 게 아니다. 그리고 이런 보상은 대게 유전적 프로그램을 착실히 수행하기 위해 생겨난 본능을 충족시키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완전히 사회화된 사람은 본인의 마음을 행복하게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경험을 이미 많이 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런 경험을 그가 바란 것은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는 그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다. 그는 오로지 다른 사람들이 마련해 놓은 목록을 얻는 데만 관심이 있는 것이다.

...

정말로 중요한 건 사회가 제공하는 보상으로부터 우리가 자유로워지고, 이를 위해 그 사회적 보상을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보상으로 어떻게 대체할 수 있는가를 배우는 것이다. 사회에서 하기 원하는 일을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일 말고도 우리 스스로가 추구하는 목표를 만들라는 것이다.

...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을 만든다. 우리 스스로 자신의 의식을 통제하고 외부 세계의 유혹과 협박으로부터 자유러워져야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이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다.

로마제국의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오래전에 "사물 자체가 두려운 게 아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물을 지각하는가, 단지 이것이 두려울 뿐이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무엇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는가. 현재에 얼마나 몰입하고 있으며, 경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좋은 자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경험을 제대로 인식하고 바람직한 관점으로 바라봐야 한다. 경험을 통해 우리의 주의가 형성되고 그 주의가 곧 우리의 자아를 형성한다. 하나의 경험을 그저 따분하고 의미 없는 경험으로 받아들이면, 그 경험은 나의 자아에 아무런 변화를 가져다주지 못하거나, 나아갈 수 있는 범위를 제한시킨다. 하지만 경험을 통해 배운 점과 느낀 점 등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하나의 경험에서 또 다른 경험을 연쇄적으로 얻게 된다. 나는 이러한 과정이 몰입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모든 경험이 나에게 긍정적일 수만은 없다. 분명 다시는 하기 싫은 경험은 존재할뿐더러, 불쾌감을 가져다주는 경험 또한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자신을 이해해 가는 과정이자, 성장하는 과정이다. 그렇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떠한 경험을 했는지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 경험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에 있다.


# 즉각적인 피드백

p.116
피드백의 종류는 그 자체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만일 내가 테니스 공을 잘 쳤다는 것이, 내가 체스 시합에서 상대편 왕을 꼼짝 못 하게 했다는 것이, 또 마지막 상담 시간에 환자의 눈에서 그를 이해할 수 있는 희미한 빛을 발견했다는 것이 그 자체로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이 정보를 가치 있게 만드는 건 그 정보가 함유하고 있는 메시지, 즉 내가 목적을 이루었다고 하는 상징적 메시지이다. 그러한 인식은 의식상에 질서를 가져다주고 자아를 강화시켜 준다.

어떤 종류의 피드백을 받을지라도 만일 그것이 우리가 심리 에너지를 쏟았던 목표와 논리적으로 연관이 된다면 즐거운 것이 될 수 있다. 만일 내가 콧등 위에 막대를 세우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고개를 뒤로 젖히고는 흔들거리는 막대를 바라보는 것도 잠시 동안의 즐거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서로 다른 가치를 갖도록 학습되기 때문에 자신에게 중요한 가치를 주는 정보를 더 소중하게 생각한다.

몰입의 여덣가지 조건 중 하나인 '즉각적인 피드백'에 대한 내용은 나의 피드백에 대한 사고를 확장시켜 주었다. 나는 피드백이라고 함은 누군가에게 조언 듣기, 혹은 올바른 길로 인도받기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목적을 이루고 있음을 알게 해주는 상징적인 메시지' 또한 피드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언가에 몰입을 잘하는 사람은 외부의 요인을 잘 차단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루하루 자신이 성장하고 있다는 피드백을 즉각적으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면, 독서와 글쓰기를 하고 싶어서 블로그를 운영한다고 가정해 보자. 여기서 블로그에 쌓여가는 글이 피드백이 될 수 있다. 꾸준히 글을 써 내려감으로써 독서와 글쓰기를 하고 있음을 자각하게 되어 스스로 성취하고자 하는 바가 잘 이루어지고 있다는 피드백을 받는 것이다. 즉, 자신의 게시글에 남겨진 글의 수 자체가 독서와 글쓰기를 하는 행위 자체의 피드백이 되는 것이다.


또 다른 예시로는 복싱을 들을 수 있다. 잽을 잘 날리기 위해 하루에 100번은 주먹을 던진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 너무 느리거나 힘이 제대로 실리지 않는다. 그렇게 꾸준히 연습을 하지만 잘 되지 않아서 슬슬 복싱을 그만두고 싶어질 찰나, 관장님의 지시에 스파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깨닫는다. 잽은 주먹을 날려 상대를 때려눕히기 위한 수단뿐 아니라, 상대의 시야를 가리거나 상대의 공격을 방해한다거나 상대와의 거리를 재는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이후로는 잽을 잘해야 하는 이유를 깨닫고 연습에 몰입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기술 하나하나를 연마해 가는 것에 재미를 느끼게 된다. 이처럼 무언가 스스로 깨닫는 과정 또한 좋은 피드백이 될 수 있다.


정리하자면, 피드백은 '자신이 성취하고자 하는 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도록 도움을 받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 플로우의 선과 악

p.136~137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플로우 경험이 절대적인 기준에서 '좋은' 것만은 아니다. 플로우는 삶을 더 윤택하고 열정적이며 의미 있게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만 좋은 것이다. 즉 플로우 경험이 자아의 힘과 복합성을 증진시키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그러나 특정한 플로우 경험으로 얻은 결과가 좀 더 광범위한 의미에서 좋은 것인지의 여부는 더 많은 것을 포함하는 사회적 수준에서 평가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는 과학이나, 종교, 정치 등의 모든 인간 활동도 마찬가지다. 특정한 종교적 믿음은 개인이나 집단에게 이익을 주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을 억압하기도 한다. 기독교는 윤리적으로 부패한 로마제국의 사회 통합을 도왔지만, 훗날 많은 문화를 해체하는 도구가 되기도 했다. 어떤 과학적 진보는 과학 자체와 몇몇 과학자에게 좋을 수 있지만, 인류 전체의 관점에서는 나쁠 수도 있다. 모든 사람과 모든 시대에 이익을 주는 해법이 있다고 믿는 건 환상이다. 어떠한 인간의 업적도 완벽한 절대 선으로 받아들여질 수는 없는 것이다.

...

그리스의 철학자 데모크리토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물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으며, 유용할 수도 있고 위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위험에는 대처법이 있다. 바로 수영을 배우는 것이다."

이 말은 플로우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있다. 즉 플로우의 유용한 형태를 극대화하고, 해로운 형태를 극소화하는 방법을 발견해내야 한다. 그 방법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방해하지 않으면서 자기 일상의 삶을 즐기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공존하며 세상을 살아간다. 협력하고 사랑하고 투쟁하고 경쟁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하지만 요즘 같이 누군가의 경험이 쉽게 전파되고 성급한 일반화가 난무하는 세상은 개인주의가 이기주의로, 민족주의가 국수주의로 변질될 수 있다. 즉 이해보다 서로에 대한 섣부른 판단이 잦은 불화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이처럼 자신의 생각에만 깊이 몰입한 경우, 자신의 가치가 타인의 가치를 침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거나 아예 인지 조차 못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편협한 개인 혹은 집단이 다른 개인 혹은 집단을 파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사실 이 부분을 읽을 때 크리스토퍼 논란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가 떠올랐다. 1945년 8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끈 미국의 물리학자 오펜하이머가 있었다. 원자폭탄은 제 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가져왔고, 대한민국을 일본으로부터 독립하게 도와주었다. 하지만 일본을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았다. 그리고 오펜하이머는 앞으로 원자폭탄이 인류의 종말을 가져올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인터뷰 중 한 유명한 말이 있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역사에 한 획을 그을만한 결정권과 운명을 타고나지 않는다. 고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한 명의 사람으로서 가질 수 있는 태도는 결국 "끊임없이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즉 우리는 상대를 이해하고 존중해야 하며, 공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길러야 한다. 그래야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는 이 세상을 더 넓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고, 더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 내 머릿속의 우주

p.233
시나 미적분의 규칙 등에 익숙한 사람은 점차 외부적 자극에 구애받지 않게 된다. 외부의 현실에 상관없이 스스로 질서 정연한 생각을 계속 떠올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일단 자유자재로 사용할 만큼 상징체계를 익히게 되면, 그 사람은 머릿속에 일체가 완비된 휴대용 우주를 가지고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p.235
내적 상징체계가 없는 사람은 너무 쉽게 대중매체의 포로가 된다. 이런 사람들은 선동 정치가에게 쉽게 현혹되며, 연예인을 보고 금세 기분이 풀리고, 장사꾼들에게 이용당하기 쉽다. 우리가 텔레비전이나 마약, 유창한 정치적 구호나 종교적 구원에 의존하게 되는 건 의지할 것이 너무 없기 때문이다. 즉 모든 해답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방지해 줄 내적 규칙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정보를 제공할 능력이 없을 때 우리의 생각은 무질서로 흘러 들어간다. 의식의 질서를 찾기 위해 자신이 아무런 통제도 할 수 없는 외부의 방법을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기술과 지식으로 자생적으로 성장하는 내적 방법을 따를 것인가의 여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있다.

자신의 의식이 질서를 가지면 의식을 무질서하게 만드는 것들로부터 자신을 지켜낼 수 있다. 이러한 의식의 질서 체계를 내적 상징체계라고 부른다. 자신만의 내적 상징체계를 형성하고 있으면 외부로부터 자극받는 자신의 의식이 무질서 상태로 넘어갈 때 다시 플로우 상태로 돌아올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내적 상징체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삶이 타인 혹은 사회가 요구하는 삶에 지나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내적 상징체계를 활용한 몰입이 개인의 행복과 연관이 있다는 데에 동의한다.



# 당신의 일과 취미 그리고 삶

p.277
노동 경험의 질을 우리 의지대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일찍 깨달을수록 우리 인생의 아주 중요한 부분을 훨씬 빠르게 개선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일에 몰입 중인가요?


p.292~293
이 같은 대리적 참여가 시간을 낭비하는 데서 오는 공허함을 일시적으로나마 달래줄 수는 있다. 그러나 결코 이것을 실질적인 도전에 투자되는 주의력과 비교할 수 없다. 기술을 사용함으로써 얻는 플로우 경험은 우리를 성장하게 해주는 반면, 수동적으로 즐기는 여흥을 통해서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 개개인의 의식이 낭비되는 시간을 합산하면 일 년에 수백만 년의 시간이 된다. 고난도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집중할 수 있고, 즐거운 성장의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에너지가 현실을 모방하는 것일 뿐인 자극에 낭비되고 있는 것이다. 단지 수동적으로, 그리고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려는 것과 같은 외적인 이유로만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면 대중적 여가, 대중문화, 심지어는 고급문화까지도 모두 오리 정신을 좀먹는 기생충이 될 수 있다. 그런 활동은 우리의 심리적 에너지만을 흡수할 뿐이며, 그 대가로 어떤 실재적인 힘도 제공해주지 않는다. 결국 우리를 이전보다 더욱 지치고 의기소침하게 만들 뿐이다.

일이나 여가 시간 모두 우리가 통제하지 못한다면 실망스럽게 마련이다. 대부분의 일과 많은 여과 활동, 특히 대중매체의 수동적 소비와 관련된 것들은 우리를 행복하고 강하게 만들어주지 못한다. 이를 통해 금전적 이득을 보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

우리가 이 상태를 그대로 방치한다면 이러한 것들은 우리 삶의 정수를 모두 고갈시켜 빈껍데기만 남게 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일과 여가도 우리 필요에 맞게 조정할 수 있다. 일을 즐길 수 있고 여가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자신의 삶이 전반으로 훨씬 가치 있게 되었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브라이트빌은 "미래는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의 것일 뿐 아니라, 여가 시간을 현명하게 활용하도록 교육받은 사람의 것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저자가 말하는 대리적 참여, 즉 '수동적으로 즐기는 여흥을 통해서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분명히 이를 적절히 사용할 경우 얻어지는 이점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로 나의 생각을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물론 저자가 말하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의 의미는 자신의 내적 동기가 아닌, 외적 동기에 의한 행위를 비판하는 것으로 보인다.)


요즘 시대에 여가 생활 혹은 휴식 시간에 소모하는 대표적인 컨텐츠는 주로 유튜브, 넷플릭스, 틱톡 혹은 인터넷 방송 시청을 뽑을 수 있겠다. 이들의 공통점은 우리를 그들의 세상에 참여하게 해 준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비교적 적은 에너지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어쩌면 순간적으로 큰 힘을 얻은 것만 같은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이와 같은 소위 온라인 매체를 활용한 여가 생활에는 여러 장단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연인과 이별했을 때 유튜브의 영상으로 큰 위로를 받았던 기억이 있고, 여행 유튜버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다양한 세계를 휴대폰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참 감사했다. 그리고 침착맨(인터넷 방송인) 채널을 보면서 '세상에는 참 배울 것이 많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소수의 경험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경험은 '아.. 오늘도 유튜브 보느라 시간을 버렸네..'라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또한 쇼츠가 유행하는 시대에 손가락이 아플 때까지 영상을 보다가 머릿속이 산만해지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여가 시간을 의식의 흐름대로, 자신의 세상이 아닌 타인의 세상에 이끌려서 보내고 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직장에서도 겪는 문제를 여가 시간에서도 똑같이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직장 안에서 자기 목적을 가지는 경우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장과 여가 시간을 똑같이 남들이 그려놓은 세상에서 굴러다니고 있는 것이다.


여가 시간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표하자면, 일과 시간과 여가 시간은 분명히 차이점이 있다. 일 안에서 자기 목적이 있다고 하여도, 분명히 다가오는 압박감과 얻어내야 하는 결과에 대한 부담은 여가 시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큰 에너지를 쏟아붓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여가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기에는 이들에겐 분명히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바로 자신의 삶이라는 것이다. 누가 뭐라 하여도 이 세상에 하나뿐인 자신의 삶이라는 것이다.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하고, 독서를 좋아하고, 게임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누군가의 창작물을 감상하고, 느끼고, 간접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 충분히 공감을 표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들이 우리도 모르게 혹은 그들도 모르게 우리의 삶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것을 항상 경계하고 주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언젠가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 우리는 이미 선악과를 먹었다.

p.408
모든 사람이 같은 수렵인이라서 서로 기술과 관심사를 함께 나눌 수 있던 시대는 지났다. 농부, 제분업자, 성직자, 군인이 생겨나면서 서로 세상을 보는 관점도 달라졌다. 어떤 행동 방식 하나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할 수 없으며, 역할마다 각기 다른 기술이 필요하다. 개개인의 일생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점차 상충하는 목표와 양립할 수 없는 행동의 기회들을 직면한다. 아이들은 뭔가를 선택할 수 있는 여지는 대체로 몇 가지가 되지 않으며, 일관성이 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 양상이 점차 변화한다. 자연스러운 플로우 경험을 가능하게 해 주었던 어린 시절의 명료함은 다양한 가치와 신념, 선택과 행위의 불협화음으로 이내 흐려지고 만다.

단순한 의식이 아무리 조화로운 것이라고 해도 복합적 의식보다 더 낫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자의 평온함, 자신의 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원시 종족들의 자세, 그리고 현재의 일에만 완전히 몰입할 수 있는 아이들의 단순함에 경탄할 수는 있겠지만, 이런 것들이 우리의 곤경을 해결할 수 있는 모델을 제시해주지는 못한다. 단순함과 순진함에 기초한 질서는 이미 우리의 손을 떠났다. 이미 선악과를 딴 이상, 우리는 영원히 에덴동산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저자는 단순한 의식이란 '자신의 감정과 사고들이 행동과 일치됨'을 말하는 것 같다. 나도 가끔 어렸을 적에 내가 그립기도 하다. 당돌했고, 느끼는 감정을 솔직히 표현했고, 하고 싶은 것은 당장해야 적성이 풀렸었다. 확실히 매 순간을 현재에 몰입하며 살았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끊임없이 과거, 현재, 미래를 오가며 수없이 많은 무질서한 생각들과 행동을 한다. 후회에 빠져 지난날을 돌아보고, 두려움에 빠져 미래에 올 날들을 외면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고의 변화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받아들여야 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나이가 들수록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고, 다양한 경험을 하며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나의 자아는 더 많은 것을 의식하게 되었고 쉽게 몰입 상태로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에 놓였다. 특히 정보의 양이 방대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 또한 적잖은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러한 복합적 의식을 조화롭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나를 잃지 않기 위해선 해내야만 한다.


내가 고안해 낸 방법은 이러하다. 복합적 의식 안에 단순한 의식이 여러 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즉 '나'라는 사람에 여러 자아를 설정해 놓는 것이다. 글을 쓸 때에는 작가처럼 행동하고, 노래를 부를 땐 가수처럼 그리고 공부를 할 때는 그 분야의 전문가처럼 행동을 하며 자신이 하고 있는 혹은, 하고자 하는 것들에 더 깊이 몰입하는 것이다. 물론 책에서 나오지만 아마추어와 전문가는 다르다. 아마추어가 자만심에 빠지거나 자신의 지식을 고매하지 못한 행위로써 사용한다면 서투른 모방가의 위치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또한 여러 자아를 한 가지 공통된 인생 주제로 의미를 통합시키는 것이다. 나에게는 '남에게 영감과 감사를 주고, 나 또한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함으로써 영감과 감사를 받으며, 조화로운 삶을 살아가자.'가 되겠다. 이 가치관을 기반으로 모든 행위가 이 가치와 연관이 되어 있다고 믿는 것이다. 만약 지독하게 싫은 선형대수를 인생 주제로 통합시키면, 더 이상 학점을 위한 공부가 아닌 진정으로 삶의 가치를 위한 공부로 변하게 된다. 다른 예시로 식당에서 서빙 알바를 한다고 가정해도 마찬가지다. 나의 인생 주제로 통합시키면, 더 이상 용돈을 벌기 위한 수단만이 아니라 삶의 가치를 위한 행위로 변하게 되어 더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하고자 노력하게 된다.


우리는 이미 선악과를 먹었다. 즉 단순한 의식을 넘어 복합적 의식이 들어왔고, 이제 이를 잘 활용하여 플로우 상태를 유지하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그렇게 자신의 삶을 자기 나름대로 잘 살면 된다.



사실 이 책에는 이곳에 쓰지 않은 더 좋은 내용과 생각해 볼 부분이 상당히 남아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적게 되면 그냥 책 한 권을 통째로 쓰게 될 것 같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한번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글을 쓰는 순간에는 완전히 플로우 상태에 빠져든다. 글을 쓰다 보면 어느새 2~3시간이 훌쩍 지나있는다. 그리고 그때마다 꽤나 놀랍기도, 보람차기도 하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내 생각에 얼마나 공감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영향을 받았으면 하는 바램이 있기도 하다. 누군가 내 글에 '좋아요'를 눌러줄 때마다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와.. 누군가 내가 쓴 글을 읽는다니 기분이 정말 좋은걸?'이라고 혼자서 중얼거리기도 한다. 너무 감사한 일이다.


제 글을 읽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그럼 안뇽...

정말 내 인생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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