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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파도가 내 식량을 가져갔다

자연재해 대비책

by 이동혁 건축가

무인도 100일: 첫날부터 죽을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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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야생을 정복하라 (11~30일차)

글, 그림 : 이동혁 건축가


21화. 파도가 내 식량을 가져갔다― 자연재해 대비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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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는 젖어 있었다.
아침 햇살에 금빛으로 빛나는 줄 알았던 백사장은, 가까이 다가가자 검고 무겁게 젖은 모래였다. 파도의 발톱 자국처럼 깊게 파인 흔적들. 나는 그 흔적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눈을 깜빡였다.

식량 저장소가… 사라졌다.

“말도 안 돼…”

나무껍질을 깔고, 대나무를 얽어 만들었던 저장 공간. 위에는 커다란 바나나 잎으로 비와 해충을 막았고, 양옆에는 돌을 쌓아 작은 벽을 만들었다. 그 속에 내가 지난 3주 동안 모아온 말린 물고기, 구운 고기, 코코넛 과육, 바다에서 건져올린 조개류까지… 모든 식량이 그 안에 들어 있었다.

그러나 밤새 몰아친 파도는 그것들을 가져갔다.

“내가 왜… 해안 가까이에 만들었지…”

나는 무릎을 꿇고 한참을 망연히 앉아 있었다. 손끝으로 뒤엉킨 해조류 사이를 헤집어 보았다. 물고기의 뼈, 짓이겨진 조개 껍질. 썩은 냄새가 아니라, 철저히 버려진 느낌이었다. 자연은 나의 무기력함을 비웃듯 잔해만을 남겨두고 사라졌다.

“이 섬이… 나를 죽이려는 건가…”

내뱉은 말은 바람에 섞여 사라졌고, 이내 나는 이성적으로 상황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이번 해일은 이전보다 훨씬 강했다. 바람도 없었고, 전조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왜?

바닷물의 상승.

조수간만의 차?
이건 단순한 파도가 아니었다. 달의 중력 때문인지, 아니면 기후 이상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 하나다. ‘다음에도 다시 올 수 있다.’ 그리고 그땐, 내가 그 안에 있었을 수도 있었다.

나는 즉시 살아남기 위한 행동에 돌입했다.

“일단, 해안선부터 다시 정하자.”

나는 잃어버린 식량보다 왜 잃었는지를 파악하고, 다시는 잃지 않기 위한 대책을 세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해안선에서 시작해, 물결의 범위를 줄자 대신 긴 나뭇가지로 표시하며 걸었다. 젖은 모래와 마른 모래의 경계를 정확히 파악해, 안전선을 정리했다.

“여기까지가… 물이 들어왔던 최대치.”

그 안전선에서 15m 이상 떨어진 내륙 쪽 평지. 그곳이 새로운 식량 저장소의 후보지였다. 나는 가볍게 손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자연을 이기는 저장소를 만들어야지.”


[생존 기술: 자연재해 대비 식량 저장소 만들기]


① 고지대 선택
내륙 쪽의 완만한 경사 위, 비에 씻기지 않을 정도로 단단한 흙바닥을 찾았다.

② 물에 뜨지 않는 기반 만들기
나무 기둥 대신, 돌을 파서 만든 바닥을 중심으로 삼고, 틈새는 진흙과 나뭇잎으로 막아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했다.

③ 동물 방어 설계
작은 통나무들을 세워 울타리를 만들고, 꼭대기에는 가시나무를 끼워 뱀이나 들쥐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④ 두 개의 저장소 만들기
‘모든 걸 한곳에 넣는 건 멍청한 짓이다.’
나는 각기 다른 위치에 두 개의 저장소를 만들기로 했다. 하나는 주 저장소, 하나는 비상용 저장소.

한참을 일하던 도중, 나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생존이란… 결국 기억력 싸움이야.”

잃었던 것을 다시 얻는 것이 아니라,
잃었던 것을 잊지 않고 대비하는 것.
기억하고, 구조하고, 대비하는 것.


다시 오는 폭풍의 전조


그날 밤,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낮에는 느끼지 못했던 냉기가 풀잎 사이를 지나며 등을 스쳤다. 나는 본능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이… 사라졌다.

“또 온다.”

나는 재빨리 저장소로 달려갔다. 새로 만든 저장소엔 아직 음식이 많지 않았지만, 코코넛과 말린 물고기 몇 점, 불씨를 보존하는 자작나무 껍질이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나는 다시 살아날 수 있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그날 밤, 폭풍은 바다만 뒤흔든 것이 아니었다.
나무들이 쓰러지고, 내 거처 중 하나가 날아갔다. 그 와중에 나는 내륙 쪽 깊숙한 바위 틈 사이로 기어들어가, 내가 만든 저장소 옆에서 밤을 새웠다.


파도는 내 식량만 가져간 게 아니었다


폭풍이 지나간 뒤, 나는 해안을 다시 확인하러 나갔다.
모래가 깊게 파였고, 해안선을 따라 해조류, 쓰레기, 부유물들이 엉켜 있었다. 그런데 그 안에서 금속성의 잔해가 보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건… 쇠로 된 깡통, 낡은 비상식량 통조림이었다.

“여기, 누군가 있었던 거야…”

나는 통조림을 들고 멍하니 섰다.
섬은 나를 향해 수수께끼 하나를 더 던진 것이었다.


에필로그: 생존의 철학


자연은 그저 거대한 흐름일 뿐이다.
선을 긋는 건 인간이고, 잃는 건 인간이며, 다시 세우는 것도 인간이다.

나는 이제 안다.
파도가 가져간 건 식량이 아니라,
‘대비하지 않은 나의 자만심’이었다는 걸.

하지만 이제, 나는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섬에는 나 말고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것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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