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간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

초대전의 시간 앞에서

by 퇴근후작가

나의 그림들을 전시 중이다.

원래라면 조금은 기쁘고 들떠 있어야 하는 시간일 것이다.

내 그림 앞에 머물러주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여기까지 온 나를 가만히 돌아보아도 되는 시간.

그런데 정작 나는 그 시간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있다.


반차를 내고 전시장에 와 있어도 학교에서는 계속 연락이 온다.

전화는 끊이지 않고, 카톡방은 금세 수십 개가 쌓인다.

몸은 전시장에 있는데 마음은 자꾸 학교로 끌려간다.


물론 안다.

홍보 업무의 성격상 휴가를 마음 편히 쓰기 어렵다는 것.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고, 누군가는 결국 전체를 정리해야 한다는 것도 안다.

평생 그랬으니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스스로 만든 문제이기도 하다.

나는 오랫동안 언제나 일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처럼 살아왔다.

휴가 중에도, 주말에도 연락이 오면 바로 확인했고,

싫은 내색 없이 응답하는 쪽을 택해왔다.

그게 책임감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해야 내 몫을 다하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실제로 나는 늘 그런 방식으로 버텨왔다.

어쩌면 주변이 나를 당연하게 찾게 된 데에는

나 스스로 만든 익숙한 태도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이번 초대전을 지나며 나는 조금 다른 마음을 보게 된다.


내 그림의 시간을 이제 더 이상 쉽게 내어주고 싶지 않다는 것.


몇 달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그림을 그렸다.

주말과 휴일도 작업과 준비에 쏟아 넣었다.

그렇게 여기까지 왔고, 분명 성과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 성과를 기쁨으로 누리기보다

또 하나의 일처럼 처리하며 지나가고 있었다.

좋은 일이 생겨도 잠시 확인하고, 곧바로 남아있는 일을 처리하기 시작한다.

스스로를 칭찬해야 할 순간조차 오래 붙잡고 있지 못한다.


그게 속상했다. 화가 났다.

하지만 이런 감정들은 단지 힘들어서 생긴 감정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림은 내게 그 긴장에서 조금 벗어나는 일이었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도 아니었고,

어떤 성과를 만들기 위해 시작한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림을 그리는 시간은 바깥으로 향하던 시선이 나를 향하게 해 주었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할 때 가장 나다워지는지,

어떤 순간에 가장 살아 있음을 느끼는지를

그림을 그리며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초대전은 내게 단지 전시 하나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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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객이 없는 시간에는 틈틈이 내 그림들을 바라본다.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며 바라볼 때와는 전혀 다른 감정이 밀려온다.


전시장이라는 공간 안에

내 그림이 적당한 높이로 걸려 있고,

그에 맞는 조명이 비추고,

그림 옆으로 음악이 흐르는 순간,

내 작품은 전에 없던 다른 이야기를 내게 건네는 것 같다.


분명히 힘든 건 맞다.

업무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고,

내 시간을 침범당하는 것 같아 화가 나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마음과는 또 별개로

지금 이 전시장 안에서 내 그림을 바라보고 있으면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천천히 차오른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내가 이렇게 초대전 작가로 전시를 하게 될 거라고는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첫 개인전을 잘 마치는 것만으로도 벅찼고,

이후를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때의 나는 그저 눈앞의 전시 하나를 겨우 붙들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2026년 3월, 초대전의 시간을 지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페어가 이어지고, 또 다른 전시의 기회도 오게 될 것이다.


물론 그때마다 힘든 순간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작품이 기대만큼 판매로 이어지지 않아 위축되는 순간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럴수록 내가 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지는 잊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결국 이 과정 속에서

내가 나를 조금씩 알아가는 일이고,

내 안을 더 오래 들여다보게 되는 일이라는 것을.


온전히 누리지 못해

아쉬운 마음이 큰 전시지만

그럼에도 나는 지금 아주 충만한 시간을 지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생각해 보면 그림은 늘 나를 바깥에서 안으로 데려오는 일이었다.

계속 바깥을 향해 있던 시선이 조금씩 나를 향하게 해 주었고,

나는 그 시간 속에서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끝내 놓치고 싶지 않은지를 알아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내게 필요한 것도 결국 같은 일인지 모른다.


자꾸 밖으로 끌려가는 마음을 다시 내 쪽으로 데려오는 일.

내가 받아야 할 기쁨을 이번에는 놓치지 않는 일.

스스로를 칭찬해야 할 순간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일.

그리고 무엇보다 내 그림의 시간을 내가 먼저 소중하게 여기는 일.


잊지 말아야겠다.

내 그림에 공감해 주고 따뜻한 시선으로 오래 바라봐준 사람들의 마음을.

그리고 그 마음 앞에서 다시 한번 그림을 계속 그리고 싶어 졌던 지금의 나를.


나는 이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려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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