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명랑작가 Aug 28. 2023

사십 중반인 나에게도 사부님이 있다!

27년 만에 다시 만난 나의 첫 미술선생님과 그의 첫 제자인 나의 이야기

“○아, 그만하고 마무리해도 되겠다. 잘하고 있네!”     


정말 오랜만이다. 누군가가 나의 역할과 직함을 떼고 이름만으로 불러준 것은.     

친정 시댁에서는  엄마야 불리고 직장에서는 과장이라고 불리고. 다양한 가족 관계 속에서는 올케, 아가씨, 형님 등...     


친구들을 제외하곤 정말 오랜만이다. 누군가가 불러준 나의 이름...     

사부님이 이렇게 나의 이름을 불러주실 때면 나는 사부님에게 처음 그림을 배웠던 그 열일곱 고등학생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그래서 중년의 나이지만 아직은 내가 ‘무언기’가 될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을 품어보게 된다.     

나를 불러주는 이름에, 이렇게 큰 힘이 있었을까. 그건 아마도 사부님이 내가 가진 꿈을 응원하고 지지해 주신다는 마음이 함께 담겨 있기 때문이겠지.     


나는 사부님을 작년 여름에 다시 만났다. 이십칠 년만이었다.      

자율신경계 이상으로 병가 중이었던 나는 문득 사부님이 생각났고 혹시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구글을 검색하다 사부님을 찾을 수 있었다.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화실을 운영하고 계신 사부님은 유명한 서양화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프로필 사진 속 사부님은 바로 알아볼 정도로 그 당시 그 모습 그대로였다.      

사부님의 SNS 계정으로 혹시 저를 기억하시는지 조심스럽게 메시지를 보냈는데 몇 시간 뒤, 당연히 기억한다며 사부님이 생각나는 당시 나의 모습을 얘기해 주셨다. 나중에 얘기해 주셨지만 사부님이 나의 첫 미술선생님이었던 것처럼 나도 사부님의 첫 제자였다고. 그리고 며칠 뒤 나는 화실에서 사부님을 만날 수 있었다. 이십칠 년 만이었다. 17살이었던 나는 44살이 되어 사부님을 다시 찾아뵈었다.    


사부님의 화실은 석촌호수 근처에 있었다. 조용한 골목 2층 건물에 위치한 화실에는 한여름 낮 시간이데도 불구하고 제법 많은 분들이 그림을 배우고 또 본인들의 작품에 몰입해 있었다.  잔잔하게 틀어놓은 피아노 음악과 사각사각 연필 소리, 그리고 간간이 들리는 물통에 붓을 씻는 소리... 그리고 다양한 미술재료가 섞인 화실만의 독특한 냄새. 너무나 오랜만이었지만 낯설지 않은 익숙한 풍경. 순간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던 시절, 미대를 가겠다는 나의 결정에 주변에서 여러 미술학원을 추천받아 오신 엄마의 손에 이끌려 노량진의 한 미술학원을 찾아갔다. 원장선생님과의 상담을 마친 후, 수업 중이던 소묘선생님, 사부님을 소개받았다.  다소 거친 억양의 경상도 사투리와 무뚝뚝 해보이는 인상이 조금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이젤을 앞에 두고 그림을 그리는 분위기에 압도되어 그날부터 난 사부님의 제자가 되었다. 사부님께 그림을 배웠던 1년 반의 시간 동안 나는 선긋기 기초부터 시작해서 정육면체, 원 기둥 그리고 입시생들의 관문 아그리파 석고상까지 열심히 배웠다.       


지금도 사부님은 가끔 농담조로 얘기하신다.     

“그때 ○이 아그리파 진짜  못 그렸었는데....”     


그럼 난 웃으며 받아친다.     

“그땐 못했지만, 이젠 제대로 잘해보려고요!”     


그리고 지금의 나는 유화를 그린다. 퇴근 후 일주일에 3~4번은 화실을 찾아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나가고 있다. 미대를 졸업했지만 유화는 처음인지라 내가 그리고 싶은 주제를 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렵고 고민스러운 부분 투성이다.     


그렇지만 사십 중반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애정을 담아 나의 이름을 불러주고, 또 격려와 응원을 아끼지 않는 사부님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한 일인가! 


오늘도 퇴근 후, 화실로 달려갈 시간이 너무나 기다려진다.                        


         

손도 풀 겸 처음 6개월은 연필소묘로 인물화를 그렸다. / 2022


유화로 그린 샌프란시스코의 풍경 /2022


매거진의 이전글 미대는 나왔지만, 유화는 처음입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