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즐거웠던 걸까 씁쓸했던 걸까
7월의 끝자락을 잡고는 나지막이 외쳤다. 올해도 벌써 이 시즌이 왔구나. 이런저런 음악 축제가 수도 없이 열리고 있는 요즘이지만, 아직도 나는 지산과 펜타포트만이 '페스티벌' 같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지산은 항상 페스티벌 시즌의 시작을 알리는 일종의 차임벨 역할을 담당해 온 셈이다.
어느덧 무더위에 헥헥 대며 슬램을 즐긴지도 어언 5년. 언젠가부터 공연을 본다는 느낌 보다는 그 분위기 자체를 즐기게 된 것 같다. 연주와 노래는 그냥 내가 잘 놀기 위해 판을 깔아주는 것 뿐, 모든 행동의 주체는 나다. 추하게 몸을 움직여도 아무도 뭐라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숄더 체킹을 해도 화를 내기는 커녕 즐거워하는 곳. 보통의 일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자유와 배려가 만들어내는 열기는 어느 덧 티셔츠를 푹 적시고 만다. 모든 것이 끝나고 차가운 에어컨 바람보다 더 싸늘한 정적이 감도는 귀가 버스 안에서의 공허함마저 하나의 추억이 되는 곳. 물론 여기에 빅 네임 아티스트가 있으면 금상첨화겠지만, 나에게 있어 절대적인 필요조건은 아님을 해가 거듭될수록 깨닫는 중이다.
그럼에도 올해 지산은 왠지 탐탁치 않았다. 특히 해외 뮤지션의 비중이 나날이 줄어감에도 후지와 크게 차이가 없는 티켓 금액은 넌센스. 딱히 끌리는 날이 없어 둘째날과 셋째날 사이에서 고민했지만, 록적인 색채가 강한 일요일이 취향에 더 맞을 것 같아 다음날 출근을 무릅쓰고 결정. 그래도 페스티벌은 페스티벌인지 토요일 저녁이 되자 소풍가는 초등학생처럼 설렜다는 것은 안 비밀.
현장은 작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똑같았다. 입구를 지나 오른쪽에 MD부스가 있는 것도 예년과 같았고, 티셔츠만큼은 나름 신경쓴 티가 났으나 여전히 가짓수나 디자인에서 크게 부실했다는 점까지도 같았다. 도대체 왜 MD로 돈 벌 생각을 안하는거지... 활짝 열려있는 구매욕마저 닫아버리는 개선없는 MD 부스는 정말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에 들어갈 기세.
왼쪽에는 서브 스테이지인 그린 팜파스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 죽 들어가면 위쪽에는 튠업과 메인 스테이지인 더 브이가 위치해 있었다. 여담이긴 한데, 나름 스테이지 명칭도 상징성이나 의미가 있는건데 왜 그리 자꾸 바꿔대는지 모르겠다. 펜타는 뭐 협찬 관계로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더 브이로 가는 길에 클럽 케이브라는 공간이 추가로 생겼는데, 공연시간 외에는 에어컨을 빵빵 틀어놔 잠시 열을 식혀갈 수 있는 좋은 장소로서 자리하고 있었다. 비록 그 사실을 해가 다 지고 난 뒤에 알게 되었다는 것도 안비밀.
출연 아티스트들의 면면으로 하여금 살짝 기대는 하고 갔지만, 이 날의 지산은 정말 분위기가 좋았다. 나는 그 공의 5할을 오프닝으로 무대에 섰던 전국비둘기연합에게 돌리고 싶은데, 록 페스티벌은 이성보다 본능이 지배하는 곳임을 아로새겨주며 현장을 찾은 이들을 봉인해제 시켰다고나 할까. 특히나 중간에 스틱이 부러진 와중에도 살벌하게 내려치던 박영목의 드러밍이 이 날 분위기를 촉발시킨 도화선이 아니었나 싶다.
라이프앤타임은 또 어땠나. 절묘한 합주의 밸런싱 과 정면으로 대치하는 디스토션의 야생성이 관객들을 무아지경으로 몰아넣는 순간의 연속. 특히 마지막 '호랑이'와 'My loving city'는 공연 전체를 통틀어 가장 용광로 같은 열기가 감지된 시간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관객간의 격렬한 충돌이 체력의 한계를 시험케 했을 정도.
관객들은 술탄 오브 더 디스코의 유쾌함, 글렌체크의 시크함을 가리지 않고 전력을 다해 반응하며 공연을 즐겼다. 다만 그것이 GMF의 그것과, 혹은 그린플러그드의 그것과, 혹은 서재패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 지산의 존재의의를 되묻게 만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오후 여섯시가 다 되어서야 그러한 흐름에 반전을 줄, 이제는 거물밴드 반열에 확실히 올라선 래드윔프스가 등장. 애니메이션 < 너의 이름을 >의 주제가로만 이들을 접했던 이들에게 '록밴드'로서의 정체성을 선사하며 의외의 한방을 날려주었다. 역시 아무리 봐도 'おしゃかしゃま'의 잼은 분위기를 달굼과 동시에 관객을 집중시키는 데에 적격이다. 초반에 많지 않았던 관객이 끝날 때 쯤엔 구름처럼 불어나 있던 광경은 흡사 2년 전 원 오크 록이 그것과도 비슷하게 느껴졌다.
개인적으로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자우림이었다. 특히 김윤아는 독보적인 아우라를 발했다. 카리스마를 지닌 프론트우먼이자, 경이로운 곡들을 써내려간 탁월한 싱어송라이터이자, 가창의 영역을 벗어난 표현력을 겸비한 가수. 초창기 곡인 '욕'과 '새', '파애', '미안해 널 미워해'에서는 마녀의 페르소나를, '매직 카펫 라이드'와 '고래사냥', '하하하쏭'과 '일탈'에서는 여우의 페르소나를 각각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그 모습엔 넋을 놓을 수 밖에. '가시나무'를 부르던 목소리 속의 처절함엔 괜히 눈물이 찔끔 나오기도 했다. 과거와 현재, 빛과 어둠, 즐거움과 슬픔, 찬란함과 처연함을 동시에 아우르는, 그들의 20주년을 기념하는 최고의 60분이었다고 감히 이야기하고 싶다.
혁오는 2년전과 비교가 안되는 비약적인 성장세를 보여주며 톱밴드의 반열에 올라섰음을 증명했다. 사실 예전 안산에서의 무대가 짐짓 실망스러웠던 지라 크게 기대를 안하고 갔는데, 공연을 본지 몇분 지나지 않아 그 내실이 단단해졌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네 명의 합이 일정 궤도에 올라왔음을 짐작케 하는 부분. 무엇보다, 모든 라이브가 스튜디오 앨범을 넘어서는 만족감을 가져다 주었다. 'Wanli万理'에서의 이국적인 웅장함이나, 절규와도 같은 보컬이 밤하늘을 뒤흔든 'Die alone' 등 새롭게 발견하게 된 곡들이 많았던 것이 그 증거. 'Tomboy'는 이미 '위잉위잉'을 넘어선 앤섬이 되어 있었다. 지금껏 가지고 있었던 '과대평가'의 인상은 그날로 말끔히 저 하늘로.
사실 고릴라즈는 뭐라 참 말하기가 어렵다. 워낙 내 타입은 아니었던지라. 다만 영상과 음악의 높은 싱크로율이 여러 볼거리를 제공했고, 무엇보다 함께 무대를 꾸민 Peven Everett의 'Stylo'나 Jamie Principle의 'Sex Murder Party'같은 노래들이 특히 촉각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을 조율한 '(멜로디언을 곧잘 부는) 멜로디어니스트' 데이먼 알반은 음악감독으로서도 퍼포머로서도 손색없는 존재감을 과시하며 첫 한국 공연을 큰 호응과 함께 마무리했다. 바라는게 있다면 말입니다. 다음엔 꼭 블러로 한번 오세요. 네?
사실 전체적인 관객수는 많지 않았다. 아니 적었다. 그래서 반대로 쾌적하긴 했지만, 점점 축소되어 가는 규모와 맞물려 내년에도 과연 제대로 개최될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반발 앞섰다. 대기업인만큼 수익성이 떨어진다고 판단될 시 바로 접어버릴 공산이 크기 때문.
결론만 말하면 작년에 비해 훨씬 만족도가 큰 공연이긴 했다. 록 페스티벌 다웠고, 어느 때보다 뜨거운 광경을 연출했다. 다만 그것이 지산만의 콘텐츠로 인한 것이라기 보다는, 강성의 성향을 가진 국내 록밴드의 다수 포진과 관객들의 적극적인 관람태도에 기인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즐거운 와중에 무심코 한숨이 나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같은 날엔 한강 난지 공원에서 < 홀리데이 랜드 페스티벌 >이 열렸다. 이 정도 규모의 페스티벌이 각기 다른 곳에서 동시에 열리는 나라가 우리나라말고 또 있을까 싶다. The xx나 Sampha 같은 뮤지션 또한 보고 싶었지만, 후지 록 페스티벌이나 섬머소닉의 영향을 직격으로 받는 국내 페스티벌 신의 현실을 감안해 눈물을 머금고 한쪽을 포기했을 뿐이다. 그렇게 본격적인 여름은 시작되었다. 오늘만 사는 한국의 페스티벌 신이 만들어낸 즐거움과 씁쓸함, 그 중간의 그 어딘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