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everse Magazine >에 기고한 글입니다.
한국에서 일본음악에 대한 반응이 심상치 않다고 느낀 것은 작년 말 무렵이었다. 여러 커뮤니티에서 후지이 카제(藤井 風)나 아이묭(あいみょん) 등 젊은 싱어송라이터들에 대한 언급이 확연하게 늘어나던 시기였다. 이전에도 오피셜히게단디즘(Official髭男dism)이나 요네즈 켄시(米津 玄師), 바운디(Vaundy), 미세스 그린애플(Mrs. GREEN APPLE)과 같은 이들의 노래가 회자되곤 했으나, 어디까지나 제이팝 마니아들끼리 나누던 이야기였을 뿐. 그렇기에 ‘잠깐 반짝하는 것이겠지’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나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서, 갑작스레 늘어난 일본음악 수요에 반가움과 놀라움이 교차할 따름이다.
우리나라에서 일본음악은 두말할 것 없는 ‘마이너 문화’다. 한때 반짝인기를 구가했던 영광의 시절만이 어렴풋하게 기억날 뿐. 지금은 관련 정보를 얻는 것도 쉽지 않으며, 제이팝 소비행위에 대한 인식도 좋지 않은 편이다. 더군다나 세계를 호령 중인 케이팝의 시대로 들어선 지 오래다. 지난 10여 년간 꾸준히 일본음악 취재 활동을 하며 그 편견을 걷어내기 위해 힘써왔지만, 그 매력을 퍼뜨리기엔 내 역량이 부족하다 느껴오던 터였다. 그러던 것이 최근, 이상하리만치 반전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SNS를 돌아다니다 심심치 않게 관련 콘텐츠를 목격하고, 좀 잘나간다 싶은 음악 관련 유튜브 채널 들은 제이팝을 앞다투어 다루고 있다.
이처럼 범상치 않은 확산의 루트는 몇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겠는데, 가장 먼저 언급하고픈 것은 역시나 ‘숏폼’을 통한 노출이다. 후지이 카제의 ‘死ぬのがいいわ(시누노가이이와/죽는편이 나아)’와 아이묭의 ‘愛を伝えたいだとか(아이오츠타에타이다토카/사랑을 전하고 싶다던가)’, 유우리(優里)의 ‘ベテルギウス(베텔기우스)’ 들이 이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넘버들. 이 흐름엔 무엇보다 일본음악에 관심이 없었던 이들도 거부감 없이 동참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해당 카테고리를 접한 경험이 없거나 일부를 전체로 인식하고 있던 이들에게 있어, 이 노래들이 전해주는 정서와 스타일이 신선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증명하는 사례다.
숏폼을 통한 확산은 그만큼 일본 음악시장 내 틱톡의 역할이 커졌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실 데뷔 후 프로모션 용도의 활용은 양국 모두 다를 것이 없겠지만, 일본의 경우 아마추어가 프로로 거듭나는 주요한 루트가 되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일본은 우선 틱톡으로 창작물을 공유한 후, 그곳에서의 인기를 기반으로 메이저 레이블과 계약해 커리어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최근 ‘Night Dancer’로 제이팝 최초 멜론 TOP 100 진입에 성공한 이마세(imase)가 이와 같은 케이스. 이러한 ‘틱톡 발’ 뮤지션의 경우, 처음부터 ‘SNS 유저’를 타깃으로 하고 있어 Z세대에 어필할 수 있는 콘텐츠 제작에 최적화 되어 있다. 여기에 일본음악에 대한 일반적인 선입견을 무너뜨리는 트렌디한 사운드는 ‘남들이 모르는 것을 선점하고픈’ 요즘 세대의 니즈에 부합했다고도 할 수 있을 터. 이처럼 예상 범위를 벗어난 일본음악의 한국 침투를 ‘우연이다’라고 단언하는 것은, 조금은 안일한 생각이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는 숏폼을 통한 확산이 일본음악 소비층을 ‘마니아 위주’에서 ‘일반 대중’으로 옮겨놓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제이팝 전파에 가장 큰 축이었던 ‘애니메이션/드라마 타이업’ 방식은 작품 홍보에 있어 가장 효과적인 루트이긴 했으나, 일정 범위 이상으로의 확산이 어렵다는 한계가 있었다. 요즘은 유튜브 쇼츠를 넘기다가도 심심치 않게 목격될 정도로 노출도가 높아져 ‘캐주얼하게 즐기는 한 입거리 콘텐츠’로 자리잡는 느낌이다. 더불어 아티스트보다는 노래 위주의 바이럴 히트가 중심이라는 점도 주목할 만 하다. 가수별로 1~2곡 정도가 집중적으로 소비되며, 최신곡보다는 과거의 작품들 위주라는 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는 대중들이 아직은 ‘일본음악’보다는 ‘좋은 노래’의 개념으로 소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확실한 것은, 양국이 SNS를 기반으로 서로의 음악을 ‘한국’이나 ‘일본’이라는 의식 없이 ‘즐길 거리’ 자체로 받아들여 가는 과정에 있다는 사실이다. 일본은 이미 2010년대 중반 SNS 활성화를 기반으로, 10대 청소년들이 케이팝을 비롯한 한국의 문화를 유행의 일종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상태다. 지금은 이 흐름을 한국이 이어받은 셈이다. 생각해보면, ’さくらんぼ(사쿠란보/체리)’나 게임 < 용과 같이 >의 ‘ばかみたい(바카미타이/바보 같이), ’可愛くてごめん(카와이쿠테고멘/귀여워서 미안해)’ 등 서브컬쳐의 개념으로는 꾸준히 소비되어 오기도 했다. 다만 이전에는 ’밈’이라는 쿠션이 필요했다면, 지금은 ‘콘텐츠’ 자체를 즐기는 상황으로 정착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흐름에서 최근의 일본음악을 새롭게 접하는 이들은 ‘내가 알던 일본음악이 아니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사실 한국에서 생각하는 제이록이나 아이돌 중심의 일본 음악의 이미지는 2010년 이후 상당 부분 달라진 상태다. 이는 일본 음악시장의 변화와 연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10년대 중반 스트리밍 서비스가 완전히 정착하면서, 소비자와 창작자 모두 세계적 흐름에 보다 민감해지는 시기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특히 2016년에 발표한 6인조 밴드 서치모스(Suchmos)의 ‘STAY TUNE’이 결정타였다. 록과 블랙뮤직을 절묘하게 융합한 이 노래의 대히트는 흑인음악을 타이밍 좋게 주류 신으로 끌어 올렸다. 가만 살펴보면, 2010년대 후반 데뷔해 유명세를 얻은 아티스트들은 밴드와 솔로를 막론하고 음악 스타일 및 가창법에 있어 펑크(Funk)와 알앤비, 디스코와 힙합 등을 적극적으로 차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이들은 내수 위주의 흐름을 희석하는 세련된 사운드와 애티튜드를 자국 땅에 적극적으로 불어 넣었다. 최근 유행중인 일본음악의 수용도가 높아진 것은, 위 과정을 거쳐 ‘트렌디한 보편성’을 갖추게 된 덕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흐름은 영화 흥행의 반사이익을 얻고 있는 경우다. 최근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 THE FIRST SLAM DUNK >의 기세는 무서울 정도다. 특히나 주제가에 대한 관심이 관객 수와 비례하고 있는 중인데, 더 버스데이(The Birthday)의 ‘LOVE ROCKETS’도 그렇지만, 극 중 흐름에 긴장감을 더해주는 텐-피트(10-FEET)의 ‘第ゼロ感(다이제로칸/제제로감)’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 그 기세가 내한 이벤트 개최로까지 이어져, 많은 팬들과 함께 성황리에 진행되기도 했다. 여기에 < 스즈메의 문단속 >을 통해 신카이 마코토 감독과 세 번째 태그를 맺은 래드윔프스(RADWIMPS)도 빼놓을 수 없다. 이미 < 너의 이름은 >에 삽입된 ‘前前前世(젠젠젠세/전전전생)’로 한차례 유명세를 떨친 상황에서, 금번에 삽입된 주제가 ‘すずめ(스즈메) feat.十明(토아카)’ 역시 동반인기를 얻으며 7월 한국공연이 확정된 상태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조금 더 근본적인 측면에서 바라보고 싶다. 나는 이 흐름이, 결국 다양한 음악을 즐기고픈 이들이 늘어나고 있음을 방증한다고 생각한다. 노랫말이 주는 메시지가 좋았던, 싱어송라이터 기반의 다양성이 좋았던, 아니면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밴드 신이나 보컬로이드 신을 디깅하기 위해서건, 결국 그들은 케이팝 이외에는 선택지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나름의 대안을 발견한 셈이다. 물론 우리나라 역시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는 훌륭한 뮤지션들이 많다. 다만 케이팝 외 장르들은 규모나 다양성, 퀄리티 등 전반적인 측면에서 충분치 않다는 것을 부인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생각하면, 일본의 음악 신은 이상적인 대체재이다. 정서적으로 유사한 측면이 존재하고, 거리도 가까워 공연관람도 어렵지 않다. 생각해보면, 팝 애호가들은 일본을 주목한 지 오래다. 얼마전 열도에서 대규모 공연을 펼친 레드 핫 칠리 페퍼스나 악틱 몽키스는 끝끝내 한국을 외면했다. 사람들은 국내 페스티벌이 못 미더워 < 후지 록 페스티벌 >이나 < 섬머 소닉 >을 방문한다. 대형 해외 뮤지션들의 한국 방문이 점점 뜸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큰 수요로부터 비롯되는 공연의 라인업과 시설 및 분위기 등이 국내 대비 확실한 우위를 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인프라’를 넘어 ‘콘텐츠’로 그 타깃이 향하고 있을 뿐, 커다란 시장이 주는 이점을 누린다는 측면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자신에게 맞는 콘텐츠를 찾아 즐긴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며 각자에게 맞는 행복을 누리는 일과 같다. 게임이나 만화는 되고 음악은 안되는 분위기에서, 각자의 취향에 맞춰 ‘자연스럽게 일본음악을 소비하는’, 쉬워 보이지만 결코 쉽지 않았던 행위. 그 모습을 보편적인 풍경으로 인식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고, 나는 그렇게 받아들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