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더리벳 2024 > 관람 후기
11월 8일 금요일, 연차까지 내고 킨텍스로 향하는 마음이 왠지 모르게 떨렸다. 염원해 마지 않았던 행사를 직접 경험한다는 설렘과 동시에, 이것이 지속 가능한 페스티벌로 자리잡는데 있어 일종의 시험대가 되리라는 걱정이 모여 내 맘속에 작지 않은 소용돌이를 만드는 듯 했다. 최근 여러 페스티벌에서 일본 아티스트들의 비중이 커지기도 했고 이전에도 < 한일 SUPER ROCK > 같은 시도가 있었지만, < 원더리벳 2024 >는 본격적인 JPOP 중심의 이벤트를 표방한다는 점에서 이목을 끌었다. 오랫동안 일본음악을 듣고 이야기해온 나이기에 누구보다 그 감회가 새로웠지만, 사실 방문 전까지만 해도 과연 어떤 분위기일지 좀처럼 짐작하기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사실 2~3년전만 해도 이런 페스티벌은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메워지지 않을 것만 같던 틈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한 것은 바로 SNS와 OTT의 활성화. 취향을 우선시하는 Z세대에게 일본음악은 경험해보지 못한 색다른 선택지로 작용했고, 기존에 존재하던 애니메이션 기반의 제이팝 팬은 그 파이를 크게 늘렸다. 올해 들어 소식을 접한 내한 소식만 거의 30여건 이상. 진짜 오는 건가 싶은 네임드부터 한국에서의 서사를 별도로 쌓아가고자 하는 신인급 아티스트까지. 밴드나 솔로, 아이돌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팀들이 바다를 건너 이곳을 찾았다. 누군가는 이마세나 요아소비와 같은 메가 히트곡의 부재로 다시금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게 아니냐고 이야기할 법 하지만, 이처럼 매달 이어지는 내한공연과 이를 통해 쉴 새 없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 결속을 다져나가고 있는 일본음악 팬들에게 있어서, 올해야말로 황금기가 도래했음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파괴력은 줄었을지언정, 이를 즐길 수 있는 문화적 환경은 오히려 더욱 나아진 셈이다.
이런 흐름에서 일본 아티스트 공연기획에 있어 선두에 서 있는 리벳과 원더로크가 준비한 < 원더리벳 2024 >는, 한국 내 일본음악의 존재감에 있어 하나의 분기점이 될 수 밖에 없는 행사였다. 개별 팬덤이 있다는 사실은 확인했지만 과연 이 곳을 찾는 이들이 ‘일본음악’이라는 카테고리 하에 하나로 묶일 수 있을 것인가. ‘누구누구의 팬’이 아닌 ‘제이팝 팬’으로서의 존재감을 보일 수 있을 것인가를 확인하고자 하는 일종의 쇼케이스가 내가 생각하는 이 페스티벌의 지향점이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일본음악이라는 것이 워낙에 다양하고 다들 가고자 하는 길이 달라, 이 곳을 찾는 이들이 과연 페스티벌 관객이라는 개념으로 수렴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내가 가진 불안요소였다.
킨텍스에 도착해 짐을 맡기고 공연장을 둘러보니, 그린 라이트를 기반으로 통일감 있는 비주얼 콘셉트가 우선적으로 눈에 들어왔다. 어두운 실내 공연장을 이용해 행사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구현한 듯 보였다. 관객층은 전반적으로 젊다 못해 어리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중반까지. 펜타포트나 부산 록 페스티벌 등과 비교해 확실히 다르다고 느껴진 점은, 아티스트 굿즈를 착용한 관객의 비율이 훨씬 많았다는 점이다. 사실 이 지점에서 코로나 전의 펜타포트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최근의 페스티벌은 ‘경험’의 영역이 비교적 강해졌다. 코로나로 인해 억눌렸던 자유를 펜타포트와 같은 이벤트를 통해 해방하고 있는 셈이다. 이 과정에서 아티스트나 음악의 존재감은 줄어들고, 대신 그 자리를 ‘이 페스티벌을 경험하고 있는 나’의 모습으로 대체하는 것이 최근의 경향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가지각색의 패션과 깃발이 행사장에서 나부끼지만, 그것이 아티스트를 응원하는 것이 아닌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활용되는 모습도 이전에 비해 늘어났다. 물론 페스티벌을 즐기는 방식은 시대에 따라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 다만, 음악과 공연에 목마른 이들이 무대를 바라보며 그들에게 모든 열정을 쏟던 시절의 축제가 그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 원더리벳 2024 >는 확실히 어떤 아티스트를 꼭 보고 싶다, 어떤 노래를 꼭 듣고 싶다는 관객들의 열망과 기원이 강하게 느껴진 행사였다. 물론 여기에는 일본 아티스트의 희소성이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지만, 어쨌든 주위 관객으로부터 “내가 살면서 이 노래를 직접 듣다니”, “이 아티스트를 직접 봤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등과 같은 이야기가 들려오는 것이 참으로 반가웠다. 어느 페스티벌보다도 음악과 아티스트에 대한 강한 애정과 절실함이 느껴진다는 점에서, 그것이 이 페스티벌의 지속 가능성에 대해 긍정적인 시사점을 던져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전체적인 분위기 역시 이상적이었다. 앞서 말한 불안감이 우려였다는 것을 깨닫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른 시각부터 꽤 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으며, 살짝만 둘러봐도 각자 최애는 있다한들 무리하게 펜스를 잡으면서까지 ‘이 팀만을 보러왔다’ 싶은 강한 팬덤형의 관객은 비교적 적었다. 장르를 넘나드는 다양한 형태의 참여팀이 개성적인 무대를 보여줬으며, 일본어에 익숙한 관객들은 아티스트가 놀랄 정도의 격렬한 리액션으로 화답했다. 대중 픽과 마니아 픽이 적절하게 섞인 라인업도 분위기를 환기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타이업 곡을 즐기러 온 이도 있었을 것이고, 우타이테 시절부터 응원해 온 자신의 영웅을 맞이하러 온 이도 있었을 것이다. 정말 오랜만에 내한한 밴드와의 재회를 염원한 이도, 다는 몰라도 새로운 취향을 발굴하고자 하는 기대를 가지고 온 이도 물론 공연장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있었을 거다. 그런 모든 이들이 무리 없이 어울려 하나의 제이팝 팬으로서 다시금 태어나 이 행사에 또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무대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올해의 애니메이션 중 하나로 꼽고 싶은 < 걸즈 밴드 크라이 >의 주인공인 토게나시토게아리의 내한소식이 특히 반가웠을 따름. 비록 토모역의 나츠와 스바루 역의 미레이는 불참했지만, 세명의 파워만으로도 국내 토게토게 팬들을 열광시키기에 충분했다. 특히 애초에 뮤지션으로 활동하거나 음악적 역량이 뛰어난 이들을 성우로 섭외했기에, 퍼포먼스에서 만큼은 ‘성우에 앞서 아티스트다!’라는 의지가 엿보이는 듯 했다. 더불어 메시지 보드를 뒤덮은 팬아트와 메시지로 하여금 금요일의 원더리벳은 그야말로 ‘토게토게의 날’이라고 하기에 충분했다.
그 와중에 의외의 복병은 ‘알황’ 알리였다. 물론 < 주술회전 >에 타이업 된 ‘Lost in paradise’가 알려져 있긴 하지만, 이날 출연한 팀들 중 인지도에서 상대적으로 밀렸던 것이 사실. 그럼에도 그는 브라스를 대동해 펑크와 소울, 라틴뮤직과 ㅛ재즈를 융합한 독보적인 팝 사운드를 통해 관객들을 무아지경에 빠뜨렸다. 손오반의 잠재력을 깨운 노계왕신처럼, 자신도 모르던 흥을 그 기세로 일시에 개방시켰달까. 그의 노래를 알고 모르고에 전혀 관계없이, ‘We are family!!”를 연신 외치며 즉흥성 가득한 퍼포먼스로 사람들을 매료했다. 음악을 통한 교감을 기반으로 한 정열 넘치는 풍경은, 이 날의 하이라이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인상적인 그림을 그려내고 있었다.
스미카는 개인적으로 살짝 미묘했는데, 작년 < Viva la rock >에서 봤을 때 비해 오가와 타카유키의 보컬 비중이 확 늘어나 있어서 그랬던 듯 싶다. 특히 좋아하는 곡들인 ‘magic’과 ‘春夏秋冬’를 오가와가 불러서 더 그랬는지도... 그럼에도 스미카의 한국 내 티켓파워를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었고, 유쾌한 파티와 같은 분위기를 완벽하게 구현해내며 헤드라이너에 걸맞는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이들과의 만남을 고대했던 팬들 역시 낼 수 있는 최대한의 목소리로 이들을 응원했고, 카타오카 켄타의 상냥함을 바다 건너에서도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곧 내한공연이 성사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들었던 무대이기도.
둘째 날의 시작은 리틀 글리 몬스터. 현장에 있는 이들은 느꼈겠지만, 그야말로 뛰어난 가창력을 기반으로 한 ‘보컬 차력쇼’였다고 표현하고 싶다. 그것이 듣기에 부담스러운 서커스 같은 퍼포먼스가 아니라, 개인이 전면에 나올 때는 각자의 음색으로, 하모니가 필요할 때는 풍성한 화음으로 러닝타임을 물들였다고 이야기하는게 옳을 듯 싶다. 그 덕분에 이들을 모르는 이들도 ‘듣는 재미’ 측면에서 만큼은 어느 팀에도 뒤지지 않을 포만감을 느꼈을 터. 개인적으로 6년만의 재회이자 5번째 만남이 되는 맨 위드 어 미션은 여느 록 페스티벌에 뒤지지 않는 무드를 연출했다. ‘Get off of my way’, ‘Thunderstruck’, ‘Fly again’까지 정석이라고 할 수 있는 넘버로 늑대들의 추종자에게 더할 나위 없는 선물을 선사했다. 특히 굿즈로 무장한 ‘만위즈 마니아’들이 서클 핏을 만들어 슬램을 하고, 목발에 타올을 묶어 흔드는 등 충실한 세트리스트에 최선을 다해 화답했다, 본인 역시 관람을 떠나 ‘가장 재밌게 놀았던’ 무대이기도.
여기에 모두가 기대했음에도 확신하지 못했던 콜라보레이션, ’絆ノ軌跡’를 피로. 당연하게도 이 날 리벳 스테이지의 헤드라이너로 대기하고 있던 미레이가 모습을 드러내며 환호의 데시벨은 최고치를 찍었다. 일본에서도 보기 힘든 두 뮤지션의 합동 무대. 그야말로 < 원더리벳 2024 >를 더욱 특별한 이벤트라고 말할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이와 함께 지금도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멜로디와 료헤이를 대동해 ‘miss you’를 선사하며 싸이월드가 지배했던 그 시절로 모두를 회귀하게 만든 엠플로 역시 둘째 날의 빼놓을 수 없는 순간으로 남아있다.
마지막으로 미레이를 언급하고 싶다. 사실 작년 8월 < 섬머 소닉 >에서 그를 봤을 때, 살짝 실망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청명했던 하늘과 맹렬했던 더위. 거의 정오에 가까운 시간에 고군분투하는 미레이였지만 좀처럼 환경 탓이었는지 그의 노랫소리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아쉬운 마음을 안고 돌아왔는데, 이 날 그의 모습은 첫 인상에서의 아쉬움을 날려버리기에 충분했다.
초장부터 관객들을 몰입하게 만든 ‘コイコガレ’의 강렬한 록 사운드 부터, 허스키한 음색의 매력을 십분 보여준 ‘inside you’, 어쿠스틱 기타의 소박한 사운드로 마음의 거리를 좁혔던 ‘Tell me’, < 장송의 프리렌 > 마니아로서 1년치 힐링을 다 받은 것처럼 느껴졌던 ‘Anytime Anywhere’, 그가 보여줄 수 있는 대중성의 정점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닌 ‘Ordinary days’까지. 그의 커리어의 대표적인 순간을 훑음과 동시에 대중들의 기대에도 완벽히 부응하는 곡들이 이어졌다. 특히 스튜디오 앨범으로는 구현할 수 없는 폭발적인 그루브가 넘실댔던 마지막곡 ‘Higher’는 내 안에 존재하던 미레이에 대한 선입견을 일거에 뒤집는 힘을 보여주었다. 피치 못한 사정으로 일요일에 방문하지 못했던 나에게 있어, ‘원더리벳 2024의 마지막은 미레이’였다는 사실이 지금에 와 일종의 훈장처럼 느껴질 지경이다.
전반적으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행사였지만, 한국 아티스트의 활용에 있어서는 조금 더 세심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둘째 날 헤드라이너를 굳이 실리카겔로, 첫 날 서브 헤드라이너를 발룬티어즈로 할 필요가 있었는지는 지금까지도 의문이다. 그 밖의 국내 팀들도 뭔가 ‘제이팝 페스티벌’이라는 콘셉트에 조금 애매하게 껴 있는 인상이라고 할까. 물론 어느 정도 ‘록 뮤직’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의 교집합이 존재할 것으로 생각되지만, 아무래도 조연을 맡아야 할 그들에게 어떤 역할을 맡길 것인가를 보다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로로가 ‘잔혹한 천사의 테제’를 커버한다던가, 아타라시이 각코와 바밍 타이거가 한 무대에 서는 등, 이에 대한 실마리는 충분히 제시되었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서브컬쳐 중심의 행사라고 해도 결국 ‘대중픽 아티스트’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재차 깨달았다고 할까. 직접 경험하진 못했지만, 결국 이 행사에서 최다 관객이 집결했던 순간은 누가 뭐래도 마지막날 헤드라이너였던 유우리의 무대였기에. 애니메이션 타이업으로 어느 정도 인지도를 보유하고 있는 아티스트와 우타이테나 보컬로이드를 중심으로 한 서브컬쳐 뮤지션 중심으로 구성된 라인업이 ‘지금 현 시점의 제이팝 마니아’의 발길을 붙드는 데 성공했지만, 결국 이익의 측면에서 바라보자면 이런 ‘서브컬쳐의 영역을 뛰어넘는 아티스트’가 필요함을 재차 절감해야 했다. 그 역할을 올해는 유우리가 담당했기에, < 원더리벳 2025 >가 확정된 지금 시점에서 조금 더 행사에 활기를 불어넣고자 한다면 기존 일본음악 마니아의 카테고리 밖에서도 인기가 많은 JPOP 뮤지션의 섭외가 내년에도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 내한하지 않은 팀들 중에서 골라본다면 아이묭이나 바운디, 미세스 그린 애플 정도가 이에 속하지 않을까.
이 행사가 있기 전까지 사실 일본음악 평론가로서 그동안 여러군데서 물어왔던 “JPOP 붐이 한국에 오긴 온건가요?”라는 질문에 확실히 “예’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SNS 숏폼을 중심으로 촉발된 이 현상이 정말 ‘일본음악’ 전반에 대한 관심이었는지도 불분명할 뿐 더러, 트렌드의 수명이 특히나 짧은 한국에서 이러한 관심이나 인기가 지속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탓이다. 하지만 < 원더리벳 2024 > 을 통해, 비로소 우리나라에 확실히 크진 않지만 소소한 ‘JPOP 붐’이 존재한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어쨌든 3일 동안 25,000명의 관객이 킨텍스를 방문했다. 특정 아티스트를 보기 위한 것이 아닌, 어떤 페스티벌보다 이 행사의 관객들은 모든 이들을 보고 즐겼으며 진심으로 그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서로가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그 암흑같던 시절을 지나, 이제 제이팝 팬들은 더 이상 숨어있을 필요 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도처에 존재하는 같은 취향을 가진 이들과 교류하며 있는 힘껏 환호를 보내고 있다. 그렇다. 이 행사의 가장 큰 의의는, 제이팝 팬들이 각자의 힘을 원기옥 모으듯 모아 어쩌면 ‘한여름밤의 꿈’에 머무를 수 있었던 이벤트를 ‘지속 가능한 현실’로 만들었다는 데 있다. 한마디로, 제이팝 팬들의 승리인 것이다. 나 역시 제이팝 팬이기에, 당분간은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고 싶다. 그리고 더더욱 다양한 곳에서 일본음악 전파에 힘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킨텍스에서의 꿈만 같던 지난 3일, 내년에는 모두가 ‘현실’로서 마주하기를 바란다. 정말 진심을 다해, < 원더리벳 2024 >에 참석한 모두를 위해 박수를 보내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