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사다난했던 2025년이었지만, 재작년부터 시작된 한국 내 일본음악 열풍은 정점을 찍은 해이기도 했다. 수많은 내한공연과 제이팝에 대한 한결 호의적인 시선 등으로 미루어 보아 이러한 흐름은 향후 몇 해 더 이어질 것이라 조심스레 예측하게 된다. 그 사이 일본은 애니메이션 타이업의 호황 속 일부 아티스트에게만 그 기회가 주어지는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었고, 전통의 강호였던 록 신이 살짝 주춤한 틈을 타 아이돌 신이 프루츠 지퍼나 캔디 튠과 같은 로컬 성향과 하나(HANA)를 중심으로 한 케이팝 성향의 팀으로 그 갈래를 명확히 하며 전체 파이를 키워가는 모습을 보였다.
미세스 그린 애플은 성격은 다르지만 2026년 활동을 마무리하는 아라시를 이어 전세대를 아우르는 국민스타로서 발돋움했으며, 요네즈 켄시와 호시노 겐, 후지이 카제와 같은 싱어송라이터들은 지금과 같은 글로벌 시대에 있어 일본음악이 가진 대중성을 재정의하는 의미있는 작품을 연거푸 내놓기도 했다. 애니메이션의 인기를 필두로 한 미디어 믹스 프로젝트들은 어느덧 메인스트림을 위협할 정도로 그 덩치를 키웠으며, 이와 함께 어느 때보다 '미래의 록 스타'로 군림할 신예들이 인디 신에서 두각을 보였다는 점도 흥미롭게 지켜볼만한 지점이다. 여전히 관전 포인트가 많았던 2025년, 개인적으로 주목했던 스무 장의 앨범을 선별해보았다. 순서는 가나다순.
데이백(DAYBAG) < Focus >
여러 일본음악을 접하다 보면, 아 이 노래, 혹은 이 밴드 쇼츠로 만들어서 업로드하면 우리나라에서 반응 좀 있겠는데, 바이럴 좀 되겠는데 싶은 순간들이 있다. 올해 이를 가장 강하게 느꼈던 건 이 작품을 들을 때, 더 자세히 말해 수록곡 ‘アイリス’를 접했을 때가 아닌가 싶다. 스미카, 마르시, 네구세 등이 떠오르는 캐치한 선율과 상냥한 질주감의 조화가 절로 기분이 좋아지게 만드는 것이 막 일본음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한국 대중들에게 잘 어필할 것 같다는 감상. 꼭 그것 뿐만이 아니더라도, 이들은 좋은 밴드의 미덕을 여럿 가지고 있다.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연주와 노래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점도 그렇지만, 최대한 사람들과의 눈높이를 맞추며 접근성을 최대한 낮춘 보편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 특히 그러하다. 사실 대중성과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함께 가져가기란 참으로 힘든 일인데, 올해 그런 측면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작품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2026년을 기점으로 여러 페스티벌에서도 많이 보일 것 같은 느낌.
메이요덴세츠(名誉伝説) < 5gの平和 >
작년엔 리콘덴세츠(이혼전설)이 있었다면, 올해는 메이요덴세츠(명언전설)이 있다! 이 명언이라는게 거창한게 아니라, 삶과 사랑에 대한 여러 감성을 섬세하게 캐치해 팝 록 사운드와 함께 자신들만의 ‘명언’을 제조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굉장히 소소한 노랫말들이지만, 이를 정말 ‘말 맛’이 나게 찰떡 같이 노래하는 보컬 코타니의 표현력이 유난히 돋보인다. 특히 연인에게 프로포즈 할 대사를 고민하는 ‘プロポーズ文句’이 발군. 이와 함께 부담스럽지 않으면서도 치밀하고 탄탄하게 쌓아 올린 세션 연주 역시 이 앨범을 상찬할 수 밖에 없는 요소로 자리하고 있다. 업템포와 미디엄 템포, 꽉 채운 트랙과 상대적으로 경량화 한 트랙을 적절히 배치하며 완급을 조절하는 모습 또한 완성도를 견인하는 본작의 장점이기도.
무라사키 이마(紫 今) < eMulsion >
틱톡에 기반한 ‘魔性の女A’의 히트가 일시적인 유행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이 앨범은 완벽한 반박근거가 된다. 일시적인 도파민에 의지하는 것이 아닌, 탄탄한 아티스트로서의 재능이 반석으로써 탄탄하게 자신의 음악활동을 받쳐주고 있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소절마다 다양한 악기와 구성으로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이는 ‘‘魔性の女A’, 훅을 제작하는 센스가 예사롭지 않음을 감지할 수 있는 ‘server down’, 정석적인 팝 록 사운드에 개인의 정서를 얹어낸 ‘Soap Flower’, 가창 중심의 소박한 구성도 충분히 리드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最愛’와 같이 장르와 스타일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움 기반의 팝 감각을 펼쳐보이고 있다. 작품에 대한 몰입 또한 뛰어나, 각기 다른 주인공이 열연하는 열 다섯편의 단편영화를 보는 인상을 주기도. 이러다 보니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다는 건 다 거짓말 같기도 하다. 커리어 초반에 이토록 포만감을 주는 앨범을 선보이는 아티스트가 우리 눈 앞에 있으니 말이다.
미시에누(MisiiN) < THIS IS MisiiN >
결론적으로 쉽지는 않은 작품이다. 총 20트랙, 67분에 이르는 러닝타임 뿐 아니라, 음울하고 무거운데다가 귀에 확 들어오는 작법을 구사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나약함을 긍정하는 힘’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3년에 가깝게 자신들의 궤적을 집대성해 메이저로의 입장권으로 내민 이 에센셜은, 다양한 갈래로 뻗어나가는 수록곡들을 기반으로 여느 발매작과 비교하더라도 눈에 띄는 퀄리티를 보유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절망 속에서 긍정을 이야기하던 듀오 하루카토미유키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각 트랙을 고려해 인디 록이나 댄스 뮤직, 하우스 등 다양한 재료를 차용해 보다 실험적이고 과감한 음악적 행보를 새겨내고 있다는 점이 팀의 차별점이라 언급할 수 있을 터. 고저차가 큰 명확한 선율은 최대한 배제하고, 일정한 진폭의 담담함한 어조로 공감 어린 치유의 손길을 건네는 음악들이, 어느 샌가 언어를 넘어 마음에 와닿는 위로로 변모해 차가운 현실을 조금이나마 덥혀주는 광경. 2025년에 반드시 함께 목격해야 할 음악신 속 진풍경이다.
보타니카루나쿠라시。(ボタニカルな暮らし。) < S’more >
2025년에 발견한 또 하나의 은든고수, 보타니카루나쿠라시. 길지 않은 시간 펼쳐지는 여섯 개의 트랙은, 보사노바나 라틴 팝, 시티팝 리바이벌, 펑크, 디스코 등을 끌어와 ‘차분한 경쾌함’이라는 이상적이면서도 결코 쉽지 않은 영역을 전개하고 있다. 멤버 전원이 대학 재즈 연구회 출신이라 그런지 퓨전재즈의 뉘앙스도 적지 않게 느껴지며, 그 덕분에 특이함이나 화려함을 추구하기 보다는 보다 루트 뮤직의 매력을 수록곡을 통해 구현하려는 방향성이 감지된다. 고즈넉하고 멜로우하면서, 한편으로는 몸을 적당히 들썩이게 하는 그런 음악이라고 할까. 튀지 않는 흐름 안에서 밴드로서의 연주력을 포인트로 삽입하는 편곡에서의 역량 또한 도드라진다. 잠시 현실의 복잡함과 번잡스러움에서 벗어나 구운 마시멜로와 초콜렛을 끼워 구워 먹던 캠프파이어 속 스모어와 같은 평안함을 얻고 싶은 이들이라면, 이 ‘보타쿠라’의 음악에 귀기울여 볼 가치가 충분히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브랜디 센키(ブランデー戦記) < BRANDY SENKI >
먹을 땐 좀 슴슴하다 싶은데 나중에 돌아서서 생각하면 떠오르는 맛. 음식으로 따지면 평양냉면과 같은 이 속성을 음악을 대체한다면,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이다. 전체적으로 화려한 연주나 단번에 귀에 들어올만한 독특한 구성이라고 할만한 부분은 많지 않다. 오히려 레드 오션인 일본 음악 시장에서 이렇게 수수하고 정직한 직구를 던져서 괜찮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 그럼에도 프론트퍼슨 하즈키가 그려내는 현실 속 청년세대의 상실감과 허무는, 과장 없는 순수함을 무기로 동세대를 빠르게 포획해 갔다. 굳이 튀려하기 보다는, 쓰리피스의 베이직함을 기반으로 곡에 따라 상이한 방향의 킥을 가미해 자신들만의 곡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 지금 시대에 있어 오히려 더욱 유니크해 보이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더불어 ‘더하는 것 보다 빼는 것이 어렵다’, ‘모든 것엔 의도가 있어야 한다’는 < 흑백요리사 > 속 몇몇 대사가 스쳐가는 것 같기도.
비타룬(vitaruun) < cheeks >
음악 신에서 잔뼈가 굵은 두 멤버, 시나리오아트의 드럼/보컬 쿠미코와 모코밴드의 키보디스트 아마나가 10년 이상의 우정을 기반으로 새로운 화학반응을 추구하고자 한 작품. 기본적인 지향점을 레트로 뮤직으로 삼고, 록이나 신스팝, 일렉트로니카 등 다채로운 재료를 통해 팀만의 오리지널리티를 차곡차곡 쌓아올린 수작이다. 드럼과 키보드라는 간소한 구성임에도, 여기에 양념과 같은 요소를 적절히 삽입함과 동시에 악기간의 조합을 충분히 고려, 빈틈이 없는 노스탤직한 출사표 제시를 완수하는 모습이다. 특히 ‘Re:mizu blue’나 ‘moon & stars’와 같은 트랙은 멤버의 경험과 철학을 충분히 녹여내며 메시지적으로도 각자가 지금까지의 인생을 돌아보게 만드는, 개인적인 회고록과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는 점도 짚고 넘어갈 만한 포인트.
사잔 올 스타즈(サザンオールスターズ) < THANK YOU SO MUCH >
발매 시점으로, 그리고 타이틀로 미루어볼 때, 밴드 최후의 정규작이 될 확률이 높다는 것은 많은 이들이 직감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인지한 상태에서 이 작품을 듣는다면, 아무래도 아쉬움이 배가 될 공산이 크다. 전혀 커리어를 마무리한다는 면모가 발견되지 않는, 현재진행형의 상승 곡선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데뷔 45주년을 맞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이 작품엔 시대감이 없다. 그들이 활동한 어느 시기에 놓여도 위화감 없이 자리해 ‘유행가’로서 자리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적절히 현대적인 사운드를 가미하면서도 쿠와타 케이스케 특유의 해학과 선율감은 건재하며, 로큰롤과 발라드, 시티팝, 엔카를 아우르는 혼연일체와도 같은 멤버들의 합주와 인생의 동반자이기도 한 하라 유코의 서브보컬까지. 명확한 정체성만 확실히 붙잡고 있으면 시간 같은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밴드의 황혼기. 나 또한 ‘THANK YOU SO MUCH’를 마음 속으로 수백번 외쳤던 2025년이었다.
서치모스(Suchmos) < Sunburst >
상실 너머 겨우내 보이는 무지개. 밴드의 귀환은 단순한 컴백이 아닌, 긴 터널을 지나 그 끝에서 마주한 빛을 사람들에게 공유할 준비가 겨우내 끝났음을 의미했다. 채 20분이 되지 않는 네 개의 수록곡이지만, 팀의 음악적 성취는 여전함을 증명함과 동시에 뉴 서치모스로의 런칭을 완료했음을 알리기엔 전혀 부족하지 않은 시간이라는 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알 것이라 생각한다. 굳이 딱 합을 맞추기보다는 최소한의 룰만 정해놓고 즉흥적으로 소리를 쌓아나가는 모습에서, 그리고 목가적인 곡조를 통해 인간과 일상에 초점을 맞추는 실루엣에서 그들의 정체성은 한층 심화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슬픔은 사라지지 않는다. 받아들이고 기억하고, 웃으며 살아가자’는 메시지는 우리들의 삶 또한 돌아보게까지 한다. 구름이 잔뜩 끼어있어도 결국 언젠가는 햇빛을 볼 수 있으리라는 그 믿음, 서치모스는 올 한해 따스하게 손을 꽉 맞잡아주었다.
아노(ano) < BONE BORN BOMB >
본인은 그저 엔터테이너에 머무는 것이 아닌, 누구에게도 없는 달란트를 보유 중인 아티스트임을 명징하게 주지시키는 작품이다. 전작이 많은 기성 뮤지션들의 지원을 집결시켜 페르소나로서의 측면을 강조한 반면, 이번엔 작곡의 비중을 늘리고 자신의 서사를 노랫말에 적극 활용하며 이 앨범 만큼은 온전히 ‘아노 개인의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자신에 대한 비난을 위트있게 받아 쳐내는 ‘Bubble Me Face’, 왜곡된 거친 사운드와 타이트한 비트로 단숨에 이목을 집중시키는 ‘ロりロっきゅんロぼ♡’ 등 전반부가 ‘연예인 아노’로서의 맥락을 강조했다면, 후반부는 밴드 아이즈(I’s) 당시를 연상시키는 ‘로커 아노’로서이 정체성을 부각시키며 앨범의 스펙트럼을 더욱 확장하고 있다. 많은 이들의 편견에 일일이 답하기 보다는, 그저 주어진 다양한 일을 진정성 있게, 그리고 뛰어난 퍼포먼스로 완수해 내며 수많은 적을 아군으로 돌렸던 그의 2025년. 올 한해 활동의 중심에 이 작품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베 무지카(Ave Mujica) < Completeness >
이미 10년을 훌쩍 넘긴 < BanG Dream! > 프로젝트가 향후에도 견고히 뻗어나갈 것이라는 확신. 그것이 우선 언급하고 싶은 이 작품의 의의다. 묵직하고도 웅장한 현악 중심의 고딕/심포닉 메탈을 빌려와 일본음악의 정서가 전면에 드러난 선율을 탑재, 30여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어두운 작중 분위기와 고딕풍의 스타일링을 고수하는 밴드의 비주얼을 완벽히 보조하고 있다.
이와 함께 음악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기능함과 동시에 영상 작품 속에서는 인물들의 서사를 더욱 증폭시켜주며, 실연 기반의 라이브에서는 여느 록밴드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파워풀한 에너지를 선사. 청취가 반복될 수록 독립적인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인정하게끔 하는 힘이 조금씩 새어나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완벽한 분업 체제에서 나오는 결과물의 상향 평준화가 어찌 보면 KPOP 시스템과 그 궤를 같이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일본 미디어 믹스의 진화가 메인스트림에 의미 있는 균열을 일으키고 있는 작금의 상황을 상징하는 2025년 일본 음악신 속 대표적인 케이스 스터디.
에이프릴블루(エイプリルブルー) < yura >
2019년 첫 정규작 이후 6년만에 선보이는 두번째 앨범으로, 밴드의 지향점이라 할 수 있는 제이팝과 슈게이징/드림팝 간의 보다 강한 연결고리를 구축하는 수록곡들을 만나 볼 수 있다. 거친 질감의 기타를 필두로 감상적인 질주감이 강하게 어프로치 하는 ‘ひらいて’, 조금씩 확장되어 가는 사운드 스케이프가 장르적인 매력을 깊이 있게 구현하는 ‘夜だけが知っている’, 보편적인 선율감에도 충실히 공을 들이고 있음을 알려주는 ‘誰も気づかなくても’ 등 청량하고 투명한 후나소코 하루키의 보컬과 인디 신의 실력파 멤버들이 집결한 탄탄한 세션 사운드가 록 본연의 에너지를 자신들만의 작법을 통해 성공적으로 재해석 중. 전작 대비 UK 록과 이모(Emo)의 요소가 적극 차용되어 단순히 슈게이징 리바이벌을 넘어섰다는 점도 높게 평가할 만하다. 이렇게 싱그러운 노이즈로 장식된 록 뮤직을 또 어디서 만나볼 수 있겠는가. 듣다 보면 가슴 속 어딘가 아련하게 올라오는 여운으로 가득차는 작품.
욘욘(YonYon) < Grace >
이 작품을 단순히 ‘일본음악’으로 정의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하는 의문은 든다. 일본을 중심으로 활동 중인 싱어송라이터이자 DJ인 욘욘의 첫 정규작은, 고향인 한국을 떠나 오랜 기간 동안 바다 건너를 삶의 터전으로 삼아 온 그의 인생이 어떤 궤적을 그려왔는지 알려주는 일종의 증거작과도 같기 때문이다. ‘협업’이라는 개념을 넘어, 뮤지션 스스로가 보더리스를 지향하는 흐름. 그 안에서 음악적으로도 언어적으로도 아티스트로도 명확히 국적을 정희할 수 없는 결과물의 등장은, 그의 특수한 배경을 기반으로 전 세계 시장이 조금씩 하나로 묶여가고 있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키린지와 슬롬이라는 꿈의 이인삼각을 통해 도회적인 댄서블함을 구현한 'Moonlight Cruising', 일본 힙합 신 최고의 프로듀서 중 한 명으로 군림 중인 챠키 줄루가 각각 비트와 선율 중심으로 방향성을 달리해 아티스트의 정체성을 구현한 'U'와 'Life is Beautiful', 엠플로의 타쿠와 수민이 목소리를 보태 마치 존재했던 유닛 마냥 좋은 합을 보여주는 리드미컬한 신스팝 'Dreamin'' 등, 좀처럼 보기 힘든 양국 간 호화 콜라보레이션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우선 추천. 더불어 단순한 언어적 선택을 초월해 음악이라는 매개체가 가진 보편성에 대한 신뢰를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번 더 권하고 싶은 작품이다. 누군가에겐 조금은 비약으로 여겨질지도 모르겠지만, 다시 한 번 절감한다. '한국 음악', '일본 음악'도 결국은 다 같은 '음악'이라는 것을.
쿠라야미사카(kurayamisaka) < kurayamasaka yori aiwo komete >
우리나라에 파란노을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출연했을 때의 충격을, 일본은 이 5인조 밴드를 통해 받고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2022년 EP를 통해 슈게이즈의 신성으로 떠오른 이들은, 이 작품을 통해 초기 사운드를 집대성함과 동시에 팝과 얼터너티브를 횡단하며 기분 좋은 스타일적 배신을 감행했다. 굉음으로 시작해 팝으로 급변하는 구성이 팀의 아이덴티티를 대변하는 ‘kurayamisaka yori ai wo komete’, 본인들의 도시적 감수성을 담아냄과 동시에 전체적인 기타 사운드에서는 넘버 걸의 흔적 또한 감지할 수 있는 ‘metro’, 역시나 선배 밴드인 챠토몬치의 ‘ハナノユメ’의 구성이 연상되는 업템포 ‘sunday driver’, 펑크(Punk)스러운 운용을 동반해 삶에 대한 다층적인 시선을 담아낸 ‘あなたが生まれた日に’까지. 명확한 방향성과 존재감을 뚜렷이 내보이는 연주와 보컬, 여기에 앨범만으로는 만족하기 어려운 폭발적인 에너지 등 이 작품을 거부할 수 없는 이유가 선명히 새겨져 있는 작품이다. 일본 역시 평단과 대중을 동시에 사로잡고 있으며, 영국 음악지 NME가 주목해야 할 신인에게 선사하는 < THE NME 100: Essential Emerging Artists for 2025 >에 일본 아티스트로서는 유일하게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2020년대 중반 인디 록을 관통하는 그야말로 ‘필수 요소’
크랙/랙스(CRCK/LCKS) < まにまに >
“흑백요리사들의 백수저들의 최상의 시너지를 낸다면 이런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그 결과물의 모습을 음악으로 치환한다면, 이 앨범만큼 딱 들어맞는 것도 없지 않나 싶다. 재즈 기반의 커리어로 세션 및 프로듀서 등으로 활약 중인 연주 멤버, 도쿄 예술대학 작곡과 출신으로 사카모토 류이치와 같은 흔치 않은 비클래식계 아티스트로 언급되는 보컬 오다 토모미까지. 그야말로 다들 음악으로는 한 가닥 하는 이들이기에 합을 맞추는 것이 쉽지 만은 않았을 터. 정규작으로 6년 만에 선보이는 이 결과물은, 마침내 각자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와중에도 그 안에 교집합을 만드는 법을 터득. 재즈와 팝의 중간점에서 즉흥성을 최대한 발휘하며 기적과 같은 유기성을 발휘하고 있다.
건조한 기타와 피아노를 업은 채 불안정한 음계로 끝끝내 전진하는 ‘Psycho Sky’, 레트로한 신스 팝에 드럼과 베이스의 용수철 같은 리드미컬함을 부착한 ‘Tiny Mirror’ 등 발을 일부러 맞춰 걷지는 않지만 여러 걸음 끝에 기어코 겹쳐지는 우연과 같은 한 발자국이 카타르시스를 가져다 주는 형국. 각자의 방향으로 힘차게 뻗어나감으로서 성립되는 이 크로스오버 뮤직을 접하니, 얼마 전 서치모스의 복귀공연에서 욘스가 관객을 향해 건네던 MC가 불현듯 떠오른다.
“모두 하나가 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가 된다고 해서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토모오(TOMOO) < Dear Mysteries >
본격적인 유명세를 거친 후 탄생한 두번째 정규작. 러닝타임을 통해 마주하는 그의 음악 세계는 보다 정교해진 로스팅을 거쳐 깊어진 풍미를 자랑한다. 전체적으로 피아노 중심의 메인과 블랙뮤직 기반의 소스로 완성한 인상을 주었던 전작 < TWO MOON >에 비해, 트랙별로 특정 요소를 테마로 잡아 전개하고자 하는 의도가 앨범이 자아내는 향기 속 다층의 레이어를 만들고 있다.
플룻과 같은 관악기를 전면에 배치해 실내악과 같은 무드를 자아내는 ‘あわいに’, 피아노 한 대의 단촐한 구성으로 시작해 점차 고조되는 감정을 점층적 구성으로 풀어 낸 ‘コントラスト’, 모타운이 연상되는 리듬 전개와 더불어 빅 밴드의 가세가 풍성한 선물 꾸러미처럼 다가오는 ‘LUCKY’ 등 타이업 기반으로 탄생한 대중적인 면모가 작지 않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럼에도 하이라이트이자 압권은 역시 ‘ナイトウォーク’. 리버브를 살짝 건 생경한 기타 사운드를 필두로, 디스코와 EDM의 요소를 적재적소에 차용해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나가는 모습에 절로 탄성이 나온다. 특히 각 악기가 최대치로 응축되어 펼쳐지는 후반부의 합주는 듣는 이를 무아지경에 이르게 할 정도. 유망주에서 팝 스타로서의 이적 신고서, 이 정도면 차고 넘치는 증명작이다.
퍼퓸(Perfume) < ネビュラロマンス 後篇 >
사운드의 질감, 신시사이저의 음색, 선율의 지향점 등이 1980년대 뉴웨이브 기반의 레트로를 지향하고 있는 네뷸라로맨스 시리즈. 전편으로부터 이어 받은 이야기는 후편으로 와 화룡점정으로 마무리되는 기색이다. 퍼퓸이라는 브랜드와 일렉트로니카라는 장르를 기반으로 수없이 많은 시간여행을 거쳐 와 이내 다다른 2025년. 이들은 활동 중지 전 마지막 행선지로 남녀노소 모두 호불호가 없을 목적지를 향하되,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닌,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흩뿌려 놓은 유산을 연료로 삼아 ‘자신들만의 네뷸라’에 정착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어느 때 보다도 이펙트를 걷어 낸 보컬과 가급적 아날로그틱한 소리를 활용해, 그간의 커리어 하이라이트에 어울릴 만한 엔딩 크레딧용 BGM처럼 느껴진달까. 우선은 일단락되는 퍼퓸과 나카타 야스타카의 긴 여행, 그 여운을 극대화 하는 OST로서 손색이 없다.
하나 호프(Hana Hope) < Between the Stars >
작품과 가창 전반으로는 일본 로컬라이징 알앤비의 기조를 따르고 있으나, 그 안에 묘하게 진한 영미권의 감성이 묻어 나온다는 점에서 일찌감치 점찍어 두었던 앨범이다. 수준 높은 리얼 세션을 동반해 꽤나 짙은 색채의 블랙뮤직을 수놓고 있으며, 비슷한 방향성으로 데뷔했던 미레이와 비교하면 조금 더 정석적인 흐름 안에서 연주와의 조화를 꾀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띄인다. 여유롭게 리듬을 운용하는 전반부를 지나 댄서블한 곡조로 기존 흐름에 파문을 일으키는 ‘消えるまで’와 아바의 넘버를 신스팝으로 재해석한 듯한 인상을 주는 ‘leave me blind’ 등은 러닝타임에 변곡점을 주는 영리한 선택. 여기에 ‘アカイロ’와 ‘背中’와 같은 팝 발라드까지 가능한 한 넓은 영역의 스타일을 통해 자신의 최대치를 담아내겠다는 의지를 선명히 드러내고 있다. ‘성장과 여행’이라는 테마에 빗대보면, 그가 바라는 아티스로서의 미래는 분명 희망으로 가득차 있을 것이 당연해 보이는 작품.
호시노 겐(星野 源) < gen >
음악을 들으면서 ‘새롭다’고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 점점 줄어드는 것은 사실이다. 애초에 예술이라는 것이 제로부터 만들어질 수 없는, 과거의 소재나 경험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구축되는 재건축 같은 것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은데. 어쨌든 이 작품은 오랜만에 ‘이전에 없던 경험’이라는 이 한 마디를 머릿 속에 딱 떠오르게 만들었다. 의도와 메시지를 고려하며 만들었던 기존의 작법과 이별을 고하고, 그저 ‘만드는 것’에 몰두하며 창작에 대한 순도 높은 즐거움을 파고들고자 한 의도.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스며들고야 마는 ‘일상에 대한 소중함’이라는 감각이 이와 맞물리며 기존의 팬들과 신규 지지층을 함께 끌어들이는데 성공하고 있다. 동시에 일본의 싱어송라이터들이 지금과 같은 글로벌 시대에 자신만의 대중성을 어떤 모습으로 조각해 나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상징성도 빼놓을 수 없다. 국경이나 언어, 정체성을 모두 초기화 시켜놓은채 자신을 재정의해가는 여로 속에서 탄생한, 일본 대중음악사의 수작.
후지이 카제(藤井 風) < Prema >
2집 <LOVE ALL SERVE ALL>이후 차곡차곡 쌓아오던, 명곡 ‘満ちてゆく’을 비롯한 싱글을 모두 배제한다는 과감하고도 무모한 선택. 여기에 전곡 영어 가사를 채택함으로써 처음부터 전세계를 자신의 활동무대로 삼았다는 사실을 재차 공표하며 발매 전부터 이미 많은 화제를 모았던 작품이다. 더군다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뉴진스의 음악작업을 총괄했던 250이 전곡 프로듀싱으로 참여한다는 사실이 더욱 호기심을 자아내기도 했다. 이 전례 없던 일본 싱어송라이터와 한국 프로듀서의 태그는, 아시아의 음악도 얼마든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출 수 있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일종의 선사례로 정착했다.
1980년대~90년대 아메리칸 팝과 소울, 알앤비의 에센스를 주축으로, 어렸을 적부터 가져왔던 해당 카테고리에 대한 경애를 아낌없이 표현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무언가를 재현하거나 재해석하려고 한 것이 아닌, 그 역사 속으로 잡입하려 한 수록곡 속 능청스러움에 있다. 최대한 힘을 빼고 원전에 접근하려한 그 애티튜드는, 미니멀한 구성을 추구하는 250의 방향성과 맞아 떨어지며 2025년 작임에도 불구하고 ‘클래식’이라 칭해도 어색하지 않은 무드를 구축하고 있다. ‘제이팝’으로서의 측면을 어쩔 수 없이 의식하고자 했던 이전까지의 자신과 거리를 두고, 보다 넓은 세계를 지향하려는 첫걸음을 야심차게 내딛은 그 의욕작. 지금까지의 여정은 정말 시작이라고 봐도 과언은 아닐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