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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일은 정말 모른다!

법원 방청 갔던 대학생, 7년 뒤 법정의 '고인물' 되다...

by 산뜻한

얼마 전, 싸이월드 BGM처럼 아련한 옛 블로그 글 하나를 발견했다. 쓴 날짜를 보니 무려 2014년 7월 25일. 풋풋한 대학생이었던 내가 친구와 교대역 법원에 방청을 다녀와 잔뜩 상념에 젖어 써 내려간 글이었다. "누군가의 한 인생이 결정 나는 순간이니 얼마나 거대한 순간인가"라며 가슴이 콩닥거렸다는 대목에선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오늘 나는 이곳에 가보았다. 교대역에 있는 법원에.

사실 예전에 한번, 대학교 1학년 때 나 혼자 법원 투어를 하려고

법원에 들어가서 방청을 하려고 한 적이 있다.


그 때 경비아저씨한테 여쭤봤는데 굉장히 퉁명스럽게 지금은 방청이 끝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발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그게 벌써 2년 전 일이다.


친구 OO이랑 오래 전부터 약속을 잡고 법원에 가기로 했었다. 그 전 날에는

이상하게 기대가 되면서 설레는 기분도 들었다. 원래 잘 설레고 그런 적이 없었는데,

무언가 기대가 되었다.


그리고 교대역에 내려서 OO이랑 만나서 곧바로 법원 방청에 들어갔다.

우리는 무슨 할 일을 정해 놓으면 가차없이 달려가는 스탈이다.

뭐 노는 것이든, 뭐 같이 하는 것이든 말이다.


우리는 고등법원부터 갔다. 조금의 우여곡절을 겪고 312호인가에 들어갔는데,

세상에나, 이미 재판은 개정중이었고 바깥에는 말로만 듣던 변호사와 피고인 가족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들어간 법정은 강간이나 추행, 절도와 같은 조금 중형범죄에 대한 재판이 이뤄지는 공간인 것 같았다.

그곳에서 제일 많이 들은 말은, "존경하는 재판장님", "편취", "항소", "기일" 이 정도인 것 같았다.

신기했던 것은 똑같은 판사, 검사가 동일한 사건을 계속 맡아서 한다는 것이었다.


정말 신기했다. 보는 내내. 한 1시간 30분 정도 방청을 했는데, 5-6 사건은 본 것 같았다.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들 속에 강간, 추행처럼 큰 범죄로 기소된 피고인들이 오고갔다.


가장 인간적이면서, 가장 사람이 나약해지는 순간인 것 같았다.

범죄자라는 이름을 떠나서, 그냥 한 인간이 가장 나약해지는 순간...

보는 내내 가슴이 콩닥거렸다. 누군가의 한 인생이 결정나는 순간이니 얼마나 거대한 순간인가.

빠르게 지나가는 순간 속에 누군가에게는 정말 크나큰 영향력이 되는 순간들이,

누군가에게는 통쾌한, 누군가에게는 억울한 순간들이 결정나는 것이다.


보는 내내 숙연할 수 없었던 것은 그것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늘 들었던 생각은, 영화 레미제라블을 봤던 때와 같은 순간이었다.

불우한 가정환경, 그리고 따돌림, 주위에서 들려오는 욕, 나쁜 친구들, 그리고 소외

그런 환경들이 갖춰지고 이뤄진 범죄에 대해서

누구의 탓을 하는 것이 맞는 걸까.

범죄를 저지른 사람의 탓만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과연 나에게도 그런 상황이 갖추어졌을 때,

그 사람이 사는 인생을 살았을 때

백 퍼센트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있을까?

물론 어떤 환경, 정말 나쁜 환경 속에 처해 있더라도

꿋꿋하게 이겨내며 희망을 갖고 오히려 타의 모범이 되는 삶도 많다.

그리고 범죄는 피해자의 인생에 대한 모독이며 이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하지만 그런 불우한 환경 속에 처한 사람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

우리는 누구의 탓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정말 백 퍼센트 그 사람의 몫만으로 돌릴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든 환경 탓인지, 아니면 그런 환경 속에서 그 사람을

구해주지 못한 주변 사람들 탓인지, 국가 탓인지.

피고인이 범죄를 저지를 수 없는 환경을 최대한 방지하고,

그런 환경 속에서 꺼내주고,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 아닐까?


어떤 범죄에 대해서 높은 양형만 부과하고 갱생을 도와주는 의무를 저버리는 것은

올바른 국가의 역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범죄를 저지른 것에 대해서 피고인은 그에 합당한 처벌을 응당히 받아야 하지만

결국 그 사람에 대한 처벌을 부과하는 것은, 이차적으로는 피고인이 다시는 그런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올바른 사회 구성원으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들어주는 기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회 갱생에도 꼭 초점을 맞출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암튼 ㅎㅎ.. 이렇게 나의 법원 방청기는 막을 내린다!

늘 그렇듯 법원 방청기의 끝은 식도락으로 마무리 되었으며,

교대역의 감자탕집에서 OO이랑 수다를 떨며 마무리 되었다. ㅎㅎㅎ

인간관계에 대한 그 수다는 나를 참 행복하게 했다.

모든 가식을 (예의는 빼고) 버리고 속마음을 꺼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때의 나는 몰랐다. 2년 전, 경비 아저씨에게 퉁명스러운 거절을 당하고 발걸음을 돌렸던 그 법원의 문턱을, 7년 차 변호사가 된 내가 앞으로 몇천 번은 더 넘나들게 될 줄은. 교대역 중앙지법은 물론이고, 대한민국 방방곡곡의 경찰서와 검찰청, 법원이 나의 주된 활동 무대가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존경하는 재판장님"을 외치기까지


블로그 속 20대 초반의 나는 한껏 진지했다. 고작 한 시간 반 남짓 방청을 해놓고는 "강간, 추행, 절도" 같은 단어에 무게감을 느끼고, "존경하는 재판장님", "편취", "항소", "기일" 같은 법률 용어가 신기해 열심히 주워섬겼다. 피고인의 불우한 환경을 보며 "이 범죄는 과연 누구의 탓일까?"라는, 레미제라블 급의 거대 담론을 펼치기도 했다.


지금의 나는 어떤가. "존경하는 재판장님"은 이제 내 직업적 추임새가 되었고, 의뢰인의 인생이 걸린 그 '거대한 순간'들은 매일같이 처리해야 할 '업무'가 되었다. 물론 그 무게감을 잊은 적은 단 하루도 없다. 다만, 대학생의 눈으로 본 법정의 비장함과 변호사의 눈으로 본 법정의 현실 사이에는, 교대역 13번 출구에서 312호 법정까지의 거리보다 훨씬 더 큰 간극이 존재했다.


그때는 몰랐다. 똑같은 판사, 검사가 동일한 사건을 계속 맡는 게 신기하다고 했지만, 사실 그건 '형사합의부'라는 시스템의 당연한 일부라는 것을. 빠르게 지나가는 5-6개의 사건들 뒤에는, 변호사가 밤새워 기록을 검토하고 의견서를 써 내려간 수십 시간의 노고가 숨어있다는 것을.


인생은 실전이다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범죄와 환경의 상관관계를 고민하던 내가 이제는 그 '불우한 환경'을 어떻게든 유리한 양형 자료로 만들어 재판부에 호소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피고인이 범죄를 저지를 수 없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 아닐까?"라던 치기 어린 질문은, "그래서, 이 사람의 딱한 사정을 어떻게 하면 판사님 마음에 와닿게 전달할 수 있을까?"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고민으로 바뀌었다.


인생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말, 이럴 때 쓰는 게 아닐까. 그저 막연한 호기심과 설렘으로 향했던 교대역 법원. 그날의 경험이 내 무의식에 어떤 씨앗을 심었던 걸까.


글의 마무리에 등장하는 친구는 여전히 나의 가장 친한 친구다. 우리는 이제 법원 근처 감자탕 집이 아니라, 각자의 삶의 터전 근처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그땐 그랬지" 하고 웃는다. "모든 가식을 버리고 속마음을 꺼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참 다행스러운 일"이라는 마지막 문장은, 7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없는 진리다.


어쩌면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여전히 사람의 이야기에 가슴이 뛰고, 부조리한 현실에 분노하며, 의뢰인의 억울함에 함께 잠 못 이룬다. 다만 이제는 콩닥거리는 가슴을 부여잡는 대신, 차가운 법리로 무장하고 싸울 뿐이다.


오늘도 나는 법원으로 향한다. 10년 전, 그 대학생이 느꼈던 설렘 대신 익숙함과 책임감을 가득 안고서. 교대역 감자탕의 맛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의 콩닥거리던 마음만은 잊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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