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찍는가

기억력과 사진

by 우주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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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력은 구형 하드디스크와 비슷하다. 배드 섹터가 곳곳에 생겨나서, 어제 점심에 무엇을 먹었는지조차 가물가물할 때가 많다. 아름다운 순간이나 감동적인 장면도 예외는 아니다.

그것들은 시간이라는 바람을 맞으면 모래성처럼 허무하게 흩어져버린다.

내가 셔터를 누르는 행위는 그래서 일종의 필사적인 채집에 가깝다.

구멍 난 주머니처럼 허술하기 짝이 없는 내 기억력으로는 도저히 붙잡아둘 수 없는 시간의 파편들을,

사각의 프레임 안에 가두어 영원히 변하지 않는 화석으로 만들어두려는 나만의 의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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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두 딸을 키우면서 그 투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아이들이 보여주는 표정들과 입가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닦아내며 짓는 무방비한 미소 같은 것들.

그중에서도 나는 유독 역광 사진을 좋아한다.

오후 5시의 햇살이 렌즈 안으로 과하게 쏟아져 들어와 머리카락 끝에 하얗게 머물고,

그 눈부신 빛의 입자가 활짝 웃는 아이의 얼굴과 몽환적으로 어우러지는 그 찰나의 순간들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기록해두지 않으면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증발해 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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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셔터를 눌렀다.

찰칵~

하고 시간이 얇게 저며지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안도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영원히 박제되었다는 안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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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최근 들어 내 카메라는 현관문 옆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날이 많아졌다.

회사 업무가 쓰나미처럼 밀려오면서, 뷰파인더를 들여다볼 마음의 여유가 사라진 탓이다.

사진에 대한 열정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려던 나의 눈은 이제 한글파일의 오타를 찾아내는 데 더 익숙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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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사체의 변화도 한몫했다. 큰 딸아이가 사춘기라는 미묘한 터널에 진입하면서부터다.

어릴 때는 카메라가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지극히 자연스럽고 무방비한 일상의 표정들을 아낌없이 내어주던 녀석이, 이제는 렌즈를 마주하면 조건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거나 시위하듯 화난 얼굴로 표정을 바꾼다.


"찍지 마."


그 단호한 한마디는 셔터보다 빠르게 내 의욕을 차단한다. 아이는 이제 카메라 앞에서 자연스러운 풍경이 되기를 거부한다. 의식하고, 피하고. 그것은 성장의 증거이기도 하지만, 기록자로서의 아빠에게는 일종의 상실이다. 꾸며지지 않은 날것의 아름다움을 포착할 기회는 점점 희박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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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마도 계속 사진을 찍을 것이다.

열정은 조금 식었고 피사체는 까칠해졌지만, 나의 불안전한 기억력은 여전하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시간이 지나 이 사진들을 다시 꺼내 보았을 때 느낄 그 서글픈 따뜻함을 나는 알고 있다.


故 전몽각 선생의 <윤미네 집>이나 평범한 일상의 행복을 담아낸 일본의 <다카페 일기> 같은 사진집들이 이 집착 같은 기록의 습관을 만들어냈다. 사실 내가 처음 카메라를 들었을 때 품었던 소박하지만 야심 찬 꿈도 그런 것이었다.

우리 가족만의 고유한 공기와 냄새가 배어 있는 연대기를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내고 싶다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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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태어나서 시집갈 때까지의 모든 과정을 집요하게 기록한 <윤미네 집>을 보며, 예전에는 '어떻게 딸의 데이트 현장까지 따라가서 사진을 찍었을까?' 하며 피식 웃었는데, 이제는 그 마음을 120퍼센트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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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단순한 기록 욕구가 아니다. 점점 멀어지는 딸의 뒷모습을 어떻게든 붙잡아두고 싶은 아버지의 애절한 구애 같은 것이다.

나 역시 머지않은 미래에, 딸아이의 데이트 장소 맞은편 카페에 앉아 망원 렌즈를 닦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빠가 왜 거기서 나와?"라고 기겁할 딸의 표정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셔터를 누르고 싶어 손가락이 근질거린다. 물론, 그때는 아주 성능 좋은 무소음 셔터 기능이 필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