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녜스의 탄생

아이의 세례식

by 우주별

종교에 관해서라면 우리 집은 완벽한 비대칭 균형을 이루고 있다.

아내는 어릴 적부터 가톨릭 신자였고, 나는 철저한 무교다.

나는 종교란 성인이 되어 지금의 딸들이 아이돌을 고르는 것처럼

수많은 아이돌 그룹 중에서 자신의 영혼을 의탁할 단 하나의 '최애'를 고르듯

신중하게 탐색하고 선택해야 할 문제라고 믿어왔다.

하지만 중학교 1학년인 첫째 딸은 내 '자유의지론'을 가볍게 기각하고 스스로 세례를 받겠다고 선언했다.

사춘기 소녀의 결심은 교황청의 칙령보다 강력한 법이라 나는 조용히 백기를 들었다.


문제는 세례명이었다. 나는 어감이 멋지다는 이유만으로 '힐데가르트'를 추천했다.

발음할 때마다 독일 전차 군단 같은 묵직한 울림이 마음에 들었다.

반면 아내는 지혜를 상징하는 '소피아'를 밀었다.

하지만 소신 있는 딸아이는 우리 둘의 의견을 가볍게 무시하고 '아녜스'를 선택했다. 순결한 양(羊).

힐데가르트의 강철 같은 느낌도 소피아의 학구적인 냄새도 없는 작고 단단한 쿠키 같은 이름이었다.

나는 짓궂게도 그 이름을 소재로 삼류 말장난을 시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숙제했어?, 아녜스?"

"뭐?"

"했어, 아녜스(안 했어)?"

나의 회심의 '했어, 안 했어' 드립에 딸아이는 경멸에 가까운 무표정으로 응수했다.

고상한 세례명을 두고 벌이는 아빠의 저렴한 언어유희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겠다는 태도였지만

나는 굴하지 않고 틈날 때마다 "공부는 했으, 아녜스?" 하며 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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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식 당일, 학교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렸을 때 마주한 풍경은 꽤나 극적이었다.

붉은 석양을 등지고 저만치서 딸아이가 어찌 알고 달려오고 있었다.

역광을 받아 실루엣만 보이는 그 모습은 마치 지구를 구하러 온 다른 차원의 사자처럼 비장하고도 아름다웠다.

달려오는 아이의 명찰에 적힌 아녜스를 보고 "아, 이제 정말 힐데가르트는 아니구나."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세례식은 생각보다 가혹했다. 가톨릭 미사라는 게 영혼의 구원보다 하체 근육의 단련을 더 중시하는 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일어나십시오", "앉으십시오". 끝없이 반복되는 스쾃의 향연 속에서 내 중년의 허벅지는 비명을 질러댔다.

그 와중에 아내는 물 만난 물고기였다. 찬송가는 소프라노 톤으로 가장 크게 불렀고, 신부님의 말씀마다 "아멘!" 하고 우렁차게 화답했다. 옆에 앉은 나는 그 열정에 압도되어 점점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 아이의 머리에 하얀 미사포가 씌워지는 엄숙한 타이밍이었다.

나는 이 신성한 순간을 놓칠 수 없다는 일념으로 카메라를 들이댔다.

찰칵, 찰칵, 찰칵. 조용한 강당 안에 경쾌한 셔터 소리가 연발 사격처럼 울려 퍼졌다.

미사포를 쓰다 말고 딸아이가 고개를 돌려 나를 쏘아보았다.

'아빠, 제발 분위기 파악 좀 해.' 말은 없었지만

그 눈빛은 십계명의 열한 번째 계명처럼 명확했다.

눈으로 시위를 하는 언니와 눈치 없이 셔터를 누르는 아빠를 보며 둘째는 킬킬거리며 웃음을 참느라 어깨를 들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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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이 끝나고 '아녜스'가 된 딸아이는 조금 피곤해 보였지만 어딘가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여전히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 아이가 선택한 그 믿음이라는 것이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마주칠 거친 비바람 속에서 작은 우산 정도는 되어주기를 바란다. 비록 그 우산이 아빠가 추천한 튼튼한 독일제 우산(힐데가르트)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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