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배운 녀석

Bottle Baby

by 우주별


만약 고양이에게도 의무 교육 과정이라는 게 있다면 우리 집 고양이 젤리는 틀림없이 유급이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입학조차 거부당했을지도 모른다.

녀석은 생후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눈도 뜨지 못한 상태로 내 손바닥 위에 떨어졌다.

그것은 젤리의 잘못이 아니었다. 단지 우연이라는 이름의 신이 주사위를 조금 거칠게 던졌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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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녀석은 '고양이 수업'을 배울 기회를 놓쳤다. 보통의 고양이라면 어미의 그루밍을 받으며 혀의 까슬함을 배우고, 형제들과 뒹굴며 발톱을 숨기는 법을 익혔을 테다.

하지만 젤리의 선생님은 나였다.

불행히도 나는 털을 핥아줄 혀도 없었고(혀는 있었지만...차마) 높은 곳에서 우아하게 착지하는 법도 가르쳐 줄 수 없는 그저 거대하고 둔한 영장류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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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젤리는 '못 배운 녀석'으로 자랐다.

우선 녀석은 세수하는 법을 모른다.

고양이라면 으레 식사 후나 잠에서 깬 뒤 앞발에 침을 묻혀 정성스레 얼굴을 닦아야 하건만 젤리는 그 과정을 쿨하게 생략한다. 덕분에 녀석의 눈가에는 늘 까만 눈꼽이 훈장처럼 달려 있다. 남들은 그루밍을 해서 뽀얀 얼굴을 자랑할 때 젤리는 세수를 할 줄 몰라 눈꼽 낀 꼬질꼬질한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본다.

아침마다 녀석을 붙잡고 눈꼽을 떼어주는 건 온전히 나의 몫이다.

젤리는 그것이 집사의 당연한 의무라고 믿는 눈치지만 내 눈엔 그저 세수 안 해서 꼬질한 게으름뱅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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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이 녀석은 높은 곳에 올라가는 법이 없다.

딱히 고소공포증이 있는 건 아닌데 그저 본능적으로 수직 상승에 대한 욕구가 결여되어 있는 듯하다.

캣타워 꼭대기? 젤리에겐 그곳이 굳이 힘을 써서 올라가야 할 이유가 없는 무의미한 허공일 뿐이다.

녀석은 철저하게 '지구의 중력'을 사랑한다.

내가 소파에 앉으면 옆에 앉고, 내가 침대에 누우면 옆에 눕는다.

수직의 세계를 쿨하게 포기하고 수평의 안락함을 택한 고양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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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이름을 부르면 "엥~" 하고 묘한 비음 섞인 대답을 던지며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들며 달려오는 녀석을 보며 나는 생각한다.

젤리는 어쩌면 전생에 리트리버였는데, 행정 착오로 고양이의 탈을 쓰고 태어난 게 아닐까.

녀석의 '고양이답지 않음'은 소리에 대한 반응에서도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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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고양이라면 질색을 하는 헤어드라이어의 굉음 앞에서도 젤리는 태연하다.

도망치기는커녕 가족들이 머리를 말리고 있으면 그 윙윙거리는 소음을 뚫고 옆으로 다가와 자리를 잡는다. 남들은 '공포'라고 부르는 그 소리를 젤리는 '따뜻한 바람이 나오는 신기한 기계' 정도로 여기는 모양이다.

청각의 예민함마저 학습하지 못한 채 드라이어의 뜨거운 바람을 온몸으로 즐기며 꾸벅꾸벅 조는 녀석을 보고 있노라면 고양이에게 필수적으로 탑재되어 있어야 할 '위기 감지 센서'가 녀석에게만 누락된 것은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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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녀석의 '못 배움'이 절정에 달하는 순간은 따로 있다. 바로 내 품에 안길 때다.

녀석은 내 엄지손가락을 입에 물고 쭙쭙거리며 동시에 뒷발을 팡팡 차기 시작한다.

보통의 고양이가 앞발로 우아하게 꾹꾹이를 할 때 젤리는 보이지 않는 자전거 페달을 밟듯 허공을 향해 뒷발질을 해대는 것이다.

어미 젖을 잘 나오게 하려는 본능이라지만, 플라스틱 젖병으로 키운 녀석에게 그런 인과관계는 무의미하다. 그저 "입에 물고 발로 차면 아빠 냄새가 난다"는 맹목적인 믿음뿐.

내 팔뚝에 생채기를 내는 그 우스꽝스럽고 필사적인 몸짓을 나는 차마 멈추게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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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은 고양이로서 마땅히 배워야 할 사회성을 배우지 못했다.

그루밍도, 사냥도, 높은 곳에서의 낙법도 모른다. 하지만 녀석은 다른 걸 배웠다.

나와 눈을 맞추는 법, 내 목소리에 대답하는 법, 그리고 자기만의 방식대로 온몸을 다해 나를 의지하는 법.

사회화니 학습이니 하는 어려운 말들은 교과서에나 있으라지.

젤리는 내 엄지손가락 하나면 완벽한 평화를 얻는다.

조금 못 배웠으면 어떤가. 이렇게나 사랑스러운걸.

나는 묵묵히 녀석의 엉덩이를 토닥이며 오늘도 내 팔뚝을 녀석의 서툰 발길질에 기꺼이 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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