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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으로 채운 시간, 사람으로 채운 마음

2024년 연말 결산 1

by 선우비

올해 초만 해도, 거의 1년 만에 브런치를 다시 시작하면서 많은 도전 목표가 있었다. 한 달 단위로 묶어서 새롭게 머릿속에 집어넣은 콘텐츠를 리뷰하자! 그러면 글을 쓰기 위해서라도 영화도 보고, 공연도 보고, 전시도 볼 테니까. 작년에 쓴 단편소설(브런치에 있는 <퀴어하게>)을 장편으로 확장하는 작업을 하자. 무조건 책 한 권 내자 등등.

다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요즘, 날마다 시시각각 들려오는 정세의 엄중함에 정신머리가 없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할 건 해야겠다는 생각에 연말결산을 해본다.


1. 올해 브런치를 보니 대부분 여행기다. 올 한 해 무얼 했는가 스케줄러를 주욱 살펴봤는데, 겨울엔 스키장, 봄엔 통영과 도쿄, 여름엔 광주, 선유도, 가을엔 후쿠오카, 참 많이도 다녔더라. 여행기를 안 쓰면 오히려 이상한 해였다. 부지런히 여행기를 썼고, 쓰다 보니 넘쳐나서 결국 두 권의 전자책에 담아냈다. 올해 목표 중 하나였던 책 한 권 내기를 초과달성했다. 이것만으로도 올해는 갓생을 했다고 자부한다. 오스씨가 툭하면 내뱉던, "내가 건강하게 여행할(스키 탈) 날이 앞으로 얼마나 남았겠냐."는 말이 거둔 성과이기도 하다. 듣기에 참 무서운 말인데, 결과적으로 우리의 삶이 풍요로워졌다. 그래, 이제는 시간에 잡아먹히기 전에 하고 싶은 거 다 하셔도 되는 나이다.

내년에도 아마도 여행기가 하나 나올 것 같은데, 부디 변동 없이 계획대로 진행되길 간절히 바라본다.


2. 그 여행기는, 친하게 지내왔던 부산의 게이커플 두 쌍과 함께 괌여행을 하고 나서 쓸 예정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합동결혼식을 올리고, 미국정부가 주는 결혼증서를 받아올 것이다.

'미국의 결혼증명서를 받아오자 프로젝트'는 올해 3월부터 시작되었다. 부산퀴어문화공동체 <홍예당>에서, 동성혼 법제화 운동을 하는 <모두의 결혼> 활동가를 연결시켜 준 게 그즈음이었다. <모두의 결혼> 활동가들은 한국의 동성 커플의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전국을 다니며 커플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었다. 부산에도 내려온다며, 홍예당을 중심으로 모여있는 커플들을 소개받고 싶어 했다. 처음엔 열심히 일하시는 모습이 안쓰러우니 그냥 해주자…에 가까웠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우리가 아주 큰 선물을 받게 되었다.

인터뷰를 담당한 활동가가 자기 커플이 하와이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증서를 받은 경험담을 들려주었는데, 어찌나 재미있게 말을 잘 풀어내던지 "그럼 우리도!"가 튀어나온 것이다. 2025년이 우리의 결혼 20주년이니, 그보다 좋은 선물은 없다 싶었다.

처음엔 우리끼리의 기념 정도로 추진하던 이야기가 갑자기 커진 것은, 성민커플/명진커플이 자기들도 인터뷰하고 싶다고 말하면서부터다. 한 달 후 다시 부산에 온 <모두의 결혼>과 인터뷰를 마친 그들은 우리처럼 감화가 되었는지, 자신들도 결혼하고 싶다고, 이참에 아예 하와이 결혼 원정대를 꾸리자고 제안해 왔다. 우리는 여러 번 모여 계획을 세웠고, 이런저런 조정 끝에 괌에서 결혼하는 것으로 최종결정을 내렸다.

이 이야기는 서울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들에게도 전해졌는지 이후에 많은 분들의 응원이 있었고, 그 과정 자체가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갔다. 그래서 내년에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면 곧바로 여행기를 쓰지 않을까 싶다. 부디 즐겁고 의미 있는 여행기가 나올 수 있길, 바라본다.


3. 연장전 상에서 언젠가부터 <홍예당>은 나의 삶에 작은 이정표를 세워주는 단체가 됐다. 2022년에 홍예당에서 진행한 에세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는데, 그때 만들어진 결과물(중년 게이 부부의 제주 한달살기)을 가지고 브런치에 도전해 곧바로 합격의 목걸이를 받았을 뿐 아니라, 제주 여행기를 썼던 경험이 전자책 <남자 둘이 손 잡고 한달살기>로 이어졌다. 2023년에는 단편소설 쓰기 프로젝트에 참여, <퀴어하게>를 완성하면서 소설 쓰기에 다시 집중할 수 있었고, 올해는 홍예당 장편소설 쓰기 프로젝트 <별장 동인>이 가동, 현재 모임을 통해 <퀴어하게>의 장편화를 진행하고 있다. 총 5 챕터 중 두 편이 완성됐고, 현재 세 번째 챕터를 진행 중이다. 1년 프로젝트라서 이제 절반이 지나가고 있는데, 부디 내년에 예정대로 완결을 볼 수 있다면 좋겠다.


4. 올 한 해도 병원에 들락날락, 참 이 놈의 육체는 한 해 한 해 늙어감을 선명하게 선언한다. 임플란트 대열에 동참하면서 기계인간에 살짝 다가갔고, 비뇨기도 문제, 허리도 말썽, 도수치료를 해도 도무지 변화가 없고, 하여간 온몸이 난리다. 이젠 만성질병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신세가 된 건가. 내 또래들은 이제부터 '살기 위해 산다'고들 하는데, 나도 그 길로 확 떠밀려버린 듯하다. 사는 의미를 자꾸 만들어대지 않으면 살기 위해 사는 것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할 것 같아 걱정이다.

겨우 이 정도의 육체적 불편함만으로도 때때로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데, 올 해는 유난히 슬픈 소식이 많았다. 연초에 동갑내기 친구 와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여름에는 한 살 어린 우성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너무 늦게 접하기도 했다. 죽기엔 너무나 젊은 나이들이었고, 죽은 이유조차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저 황망할 뿐이다. 언제 어떻게 이 세상을 떠날지, 날 때는 순서대로 태어났지만 떠날 땐 누가 먼저일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뼛속까지 각인된 한 해였다. 스트레스받을 때마다 "여행 가자!"는 오스씨의 발작에, "노후 대책 안 해요? 돈 모야야지!" 반대하던 평소의 태도를 누그러뜨린 이유이기도 하다.

이미 충분히 슬픈데도, 한 해를 마감하는 요즘, 또 한 명의 죽음 소식을 들었다. 훨씬 젊은 친구였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기에 그 비애는 훨씬 컸다. 누가 어떻게 잘 살고 있다는 소식보다는 죽었다는 소식이 더 자주 들리는 이유가 뭘까. 내 나이 53. 확실히 인생 후반기에 들어섰다.


5. 한 달 단위 콘텐츠 리뷰는 1,2월이 지나자 금방 시들해졌는데, 영화관에 가지 않게 된 탓이 컸다. 2024년도에 영화관에서 어떤 영화를 봤는지 세보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괴물>,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 <추락의 해부>, <오키쿠와 세계>,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패스트 라이브즈>, <듄 파트 2>, <가여운 것들>, <파묘>, <대도시의 사랑법> 딱 열 편이더라. 그중 9편이 3월까지 본 거고, 그 이후 9개월 동안 딱 한 편 봤다.

성인이 되어 혼자 극장에 다니기 시작한 이래로, 군복무 기간을 제외하곤 가장 적은 수의 영화관람을 기록한 해였다. 보통은 그 두 배 이상을 관람해 왔다. 그렇다고 안방극장에서 본 것도 아니었다. 영화라는 매체가 나의 삶에서 사라졌다. 위에 나열한 어떤 영화도, 그 대단했던 <괴물>도, 팬심 가득 담아 억지로 발걸음 했던 <대도시의 사랑법>도, 영화를 다시 사랑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이유가 무엇인지는 나중에 생각해 봐야겠다. 분석조차 귀찮을 만큼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애정이 식어버렸다.


6. 대신 클래식 공연에 대한 글을 부쩍 많이 쓰게 되었다.

난 클래식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도 아니고, 그 복잡다단한 세계에 크게 발을 디디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 수박 겉핥기만 해도 클래식은 맛있다. 왜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좋다. 일본어 가사를 하나도 알아듣지 못해도 마냥 좋은 8-90년대 제이팝(주로 락그룹 노래) 같은 거다. 잘 알지도 못하고, 그래서 공연을 그렇게 많이 보면서도 감히 클래식과 관련된 포스팅을 할 생각도 못했었는데, 새해 벽두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냥 쓰면 안 돼?

그래서 써봤는데, 오오... 그저 쓰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세계를 알아버렸다. 베토벤이 왜 좋아? 누가 물으면 몰라, 밖에 대답할 수 없었는데, 베토벤이 왜 좋은지 글로 쓰면, 뭔가가 써진다. 참 신기하다. 앞으로도 그런 근본 없는 클래식에 대한 포스팅을 계속해보고 싶다. 이건 새해에도 도전 목표!


7. 조금이나마 주변인들을 걱정시키지 않고 살기 위해 다시 수영을 시작했다. 그동안 유튜브 보면서 대충 배운 대로 했지만 조금도 실력이 늘지 않아서, 거금을 투입해 개인 강습을 받고 있다. 처음엔 마구잡이로 배운 자세 때문에 힘들었지만, 자세가 잡히면서 앞으로 쭉쭉 나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내 몸이 얼마나 엉망진창으로 굳어있었는지도 통렬히 반성하게 되면서.

우울은 수용성이라서 물에 잘 녹는다고 하더니, 수영을 할 때는 영법에 집중하느라 잡생각이 들지 않는다. 부디 수영강습이 끝나있을 때는 자/배/평/접 마구마구 구사하면서 펄펄 날아다닐 수 있길... 아픈 허리도 싹 낫길.


8. 홍예당을 통해 알게 된 젊은 퀴어들과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수다도 떨고, 집회도 나가는 등, 그 어느 때보다 젊음과 부대끼고 있다. 다들 20 초반부터 30대 초/중반의 나이. 나 53/오스씨 65. 그 사이를 메꿔줄 4-50대 퀴어들이 없다. 혹시 이 글을 보고 있는 부산 거주 40-50대 퀴어가 있다면... 같이 놉시다! 홍예당의 문은 중년들을 위해서도 활짝 열려있습니다! 여기, 끝내주게 유익하고 재미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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