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책 : 같이 산 지 십 년

2024년 연말 결산 2

by 선우비

1. 올해의 책


선우비의 <남자 둘이 손잡고 한달살기>가 가장 의미 있는 책이지만, 이걸 선정하면 좀 뻔뻔하니까, 대만의 작가 천쉐가 쓴, '레즈비언 부부, 커밍아웃에서 결혼까지'라는 부제가 붙은, <같이 산 지 십 년>을 뽑는다.


"한 사람이랑 오래 살면 서로 무덤덤하지 않아? 그걸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오래 산 커플의 단점(?)을 지적당할 때마다, 공감 가는 것도 있지만, 뭐라 반박하고 싶은데, 꼭 집어서 뭐다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대신 어떤 '맛'이 떠오른다.

"우리 집 된장은 아주 잘 익어서 다른 조미료 풀지 않고 된장만 끓여도 맛이 구수해!"

... 같은, 관계가 농익었을 때 느낄 수 있는 그 특유의 짜릿한 감칠맛이 있는데, 이걸 뭐라 멋들어지게 표현을 해야 할까. 고민이었다.

<같이 산 지 십 년>에는 이런 표현이 있었다.


<비포 미드나이트>를 보고 왔다. 영화 속 남녀 주인공은 무려 18년을 함께했다.

18년 뒤, 사랑은 더 이상 로맨틱하지 않았다. 시간이 가져다준 굳건한 감정만이 남아 있었다. 우리는 일용품의 틈 속에서 사랑을 한다. 흔한 일용품 틈에서 서로 의지하며 평범한 삶을 영위하곤 한다. 이런 사랑이 좋다. 구수한 향이야말로 가장 진실된 향기일 테니까.


로맨틱하지 않지만, 굳건한 감정.

일용품의 틈 속 사랑.

구수한 향.


내가 요리를 하고, 그가 설거지를 하고, 그가 빨래를 하고, 내가 건조기를 청소하고, 내가 먼지를 빨아들이면, 그가 물걸레 청소기를 돌리는, 일용품 틈에서 서로 의지하며 평범한 삶을 영위하는 것.

이거다.

내가 찾았던 오래된 커플의 사랑을 정의하는 데 적절한 표현.

앞으로 우리의 사랑은 '굳건하고 구수한 사랑'이다.


한편, 얼마 전 부산 서면거리에서 열렸던 '부산 퀴어스마스' 행사에서 나이 든 게이 커플을 대표해서 "동성애자로 살아도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다. 늙어서도 아주 행복하게 사는 내가 그 증거다." 같은 취지의 발언을 해줄 것을 요청받았는데, 사실 남 앞에 나서서 말하면 못생겨지는 병에 걸린 사람이라 못하겠다고 고사하길 여러 차례, 결국 추운 날씨에 애들이 애쓰는데 힘이라도 보태자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며 그러마 했었다.

발언문을 작성하고 집에서 연습을 했는데(아.. 못하겠다고 말해야지, 하지만 애들이 고생인데... 무한반복), 행사 당일 아침에 부산 퀴어활동가 한 분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국회에서 윤석렬 탄핵이 실패해, 온 국민이 답답하게 느끼던 시점이었다. 부산에서는 5년 만에 다시 개최되는 퀴어들의 거리 행사여서 다들 방방 뛸 예정이었는데, 갑작스러운 비보로 차분하게 진행될 거라는 말을 들었다.

처음에는 발언을 취소하겠다고 말했다가, 시간이 지나자, 어쩌면 내가 젊은이들에게 해줄 말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서 보았던 어떤 문장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대만의 동성결혼 합법화 투쟁 과정은 "2보 전진, 1보 후퇴"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다.

국회와 행정부에서까지 통과된 평등법이 반대자들의 요구로 시행된 국민투표로 무위로 돌아간 적이 있었다. 그때 실망한 젊은이들이 절망감에 스스로 세상을 등지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책에는 당시 작가가 젊은이들에게 호소하는 글이 있었고, 너무 감동적이어서 메모장에 따로 적어 기억해두고 있었다.

나이 들어도 잘 삽니다, 걱정 말고 계속 퀴어로 살아갑시다, 보다는, 행사에 올 많은 젊은 퀴어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어서, 무대에 올라 낭독했다.


부디 어제의 좌절 때문에 시대가 역행했다고, 미개한 세상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하지 말기를 바란다. 우리가 어떤 세상에서 살아갈지는 우리 자신만이 결정할 수 있다.


내가 당신을 직접 안아줄 수 없으니 스스로를 안아보자.

스스로를 꽉 안아주자.

우리를 위해 몸소 나서준 이들을 똑똑히 기억하며, 그 따사로운 얼굴을, 간절한 목소리를 떠올리며.

목소리를 내본 적 없던 그들이 이번에는 목소리를 내준 것이다.

추악한 얼굴은 생각하지 말고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생각하자.

그들은 진실로 존재하며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약속 하나 하자.

우리 같이 잘 살아나가자.


누군가 너를 사랑해.

누군가 너를 사랑해.

누군가 너를 사랑해.

누군가 너를 사랑하고 있어.

절대로 포기하지 마.


누군가 너를 사랑해를 반복할 때 울컥해서 목소리가 좀 이상하게 나왔지만, 박수가 크게 나와서, 생애 최초로 거리 무대에 올라 마이크 잡은 일이 흑역사로 남지는 않은 것 같아 다행이었다.

이 정도면 올해의 책이 되기 충분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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