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우 - 어둠 뚫기
"... 우리는 어떤 글을 좋다고 느끼는 걸까요. 이건 제 생각인데, 오늘날 독자가 책에서 원하는 건 내밀한 공명 같아요. 언젠가 자신도 겪었으나 그게 무엇인지 모른 채 막연히 흘려보냈던 시절을, 애써 덮어두고 잊어버리려 했던 상처를, 사랑하는 이에게도 차마 발설할 수 없었던 욕망을 작가가 정확한 문장으로 표현해 냈을 때 그걸 좋다고 느끼는 거죠. 경험적으로는 이미 아는 건데 언어로는 미처 몰랐던 것을 선명한 인지의 단계로 끌어올려주는 글. 그래서 텍스트를 경유해 타자 혹은 세계와 연결되는 듯한 감각을, 자신이 혼자가 아니었음을 깨닫는 순간을 좋아하는 거죠."
박선우 작가의 첫 장편소설 <어둠 뚫기>에서 발췌했다.
"정말 그러네..."
머릿속이 환해졌다. 오랜 물음이 해결되는 순간이었다.
난 항상 궁금했었다.
"무협/판타지/SF/ 추리 등의 소위 장르문학은 좋은데, 한국문학에는 왜 재미를 못 느낄까? 세계명작이라 불리는 작품이나 외국의 유명한 소설들은 좋은데, 한국문학은 특히나 지루하고 뻔해 보일까?"
특히 작가의 개인적인 삶과 사랑을 서사의 기반으로 삼는 소설일 경우엔 더! 더! 더! 읽어내기 힘들었다.
위의 문장에 해답이 있었다.
이성애자 작가들이 풀어내는 인물의 삶과 사랑에 "공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같은 시대,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지만, 그래서 역사적 서사라는 측면에서 세대적 일치감은 공유한다 할 수 있지만, 실상 이성애자와 동성애자가 삶에서 길어 올리는 심상이란 같을 수 없다. 제도적으로 가족을 꾸리지 못하고, 아이를 가질 수 없도록 규정된 한국 남성 동성애자라도 "마치 내 이야기처럼 내밀하고 공명할 수 있는" 감동적인 가족 서사, 당장 떠오르는 게 있나? 없을걸? 사랑이야기, 박상영의 등장 이전까지는, 아마도 내 기억에 따르면, 없을걸?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문학은 죽었다'가 문학계의 화두였다.
지금도 그 주장이 유효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최근 들어 한국문학이 퀴어의 이야기로 돌파구를 마련했다는 말이 심상찮게 들린다. <어둠 뚫기>는 문학동네 소설상을 수상한 작품이라 책의 말미에는 심사평도 실려있다. 어떤 심사위원은 "어머니를 향한 애증을 그려낸 남성 퀴어의 이야기라면 이제는 조금 익숙할 뿐만 아니라 제법 반복된다고 생각했"단다.
정말? 익숙하다고?
어머니를 향한 애증을 그려낸 이성애자 남성의 이야기가 백만 개, 천만 개 나올 동안 이제 겨우 두서넛 정도 나왔을 텐데?
우리는 여전히 배고프다.
좋다고 느낄만한 글이 더더더더더더더더더더더더 필요하다.
..... 내가 "겪었으나 그게 무엇인지 모른 채 막연히 흘려보냈던 시절을, 애써 덮어두고 잊어버리려 했던 상처를, 사랑하는 이에게도 차마 발설할 수 없었던 욕망을 작가가 정확한 문장으로 표현해 냈을 때" 느끼는 그 감동적이고 짜릿한 쾌감을, 이성애자들이 한국문학에서 선사받았던 그 충만한 시간들을, 우리도 더더더더더더더더더더더더더더 많이 많이 느끼고 싶다.
익숙하고 반복된다고?
어디서 엄살을!
(참고로 해당 심사평에서 인용만 따왔을 뿐, 해당 심사평이 익숙하다고 폄훼하는 내용은 전혀 아님을 명시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좌충우돌 시절의 경험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들. 그동안 한국문학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내밀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어느 누구에게도 발설할 수 없었던, 그래도 잊히고 지워져서 이제는 내 기억인지조차 알 수 없는 그런 이야기들이다.
이런 장면들 때문에, 최근에 문단에 등장한 퀴어작가들이 한없이 소중하다.
이제는 우리도 공명의 시대로 들어섰다.
한때 나는 아버지 또래의 남자들을 만나 섹스했다. 여기가 말하는 아버지 또래란 이십 대 청년을 의미하지 않는다. 중년에 접어든 남자들, 내 또래의 자식이 한둘 있을 것 같은 남자들. 그러니까 단순히 나이 든 게이가 아니라 결혼한 부인도 있고 장성한 아들도 있을 것 같은 남자들(그런 이들은 딱 보면 알 수 있다. 대부분이 왼손 약지에 결혼반지를 끼고 있거나 휴대전화 바탕화면을 가족사진으로 설정해 놓았으니까. 관계 중 아내에게서 전화가 오면 아무렇지 않게 받기도 했다. 도무지 그런 걸 숨기려고 하질 않았다), 나는 그런 남자들을 만나 섹스했다.
그들의 특징은 관계 중 절대로 웃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웃음 금지. 그들에게 아들인 남자와의 섹스는 뭐랄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닭 잡는 행위에 가까웠다. 종종 그런 느낌을 받았다. 내가 도축당하고 있는 듯한 기분. 그들은 시종일관 강압적이고 무뚝뚝했다. 온몸에 - 머리부터 발끝까지 -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그들과의 섹스는 대체로 즐겁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이따금 그들을 찾아갔다.
(박선우 장편소설 - 어둠 뚫기 중에서...)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내가 번개를 했던 이유는 그 과정에서만 획득할 수 있는 자유로움을 누리기 위함도 있었다. 일생에 걸쳐 오늘 단 하루, 한두 시간 외에 다시는 만나지 않을 이와 섹스하는 것. 그것은 과거와 미래의 나로부터 - 어쩌면 현재의 나에게서도 - 뚝 떨어져 나오는 듯한 감각을 선사했다. 나는 낯선 장소에서 이름 모를 남자와 알몸으로 뒹구는 동안에 내가 살던 세계로부터 홀연히 해방될 수 있었다. 엄마가 아는 나. 지인들이 아는 나, 회사 동료들이 아는 나, 작가로서의 나는 물론이고 내가 아는 나로부터도 유리되어 일종의 비체가 될 수 있었다. 비체이자 순수한 주체가 됐다. 여기서 순수함은 나를 규정하거나 옭아매는 타의 혹은 자의조차 전무한 진공상태를 의미한다. 한 글자도 쓰여 있지 않은 백지. 아무도 거닐지 않은 눈길로의 진입이랄까.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사회통념상 지극히 부정하고 타락한 짓을 벌이는 동안에만 생애 근원적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니. 나는 오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날 남자들 앞에서만 나 자신을 새로이 창조해 낼 수 있었다. 나조차 몰랐던 나의 욕구, 한계. 가능성, 용기, 속물성, 페티시. 저열함, 두려움, 너그러움 등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건 글쓰기와 닮은 구석이 있었다. 나는 백지에 나를 한 줄씩 써 내려가면서, 눈 위에 발자국을 꾹꾹 눌러 남기면서 내가 아닌 나를 향해 다가갈 수 있었다. 나를 잃어버리면서 나를 만날 수 있었다.
(박선우 장편소설 - 어둠 뚫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