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퀴어퍼레이드에 가다 2
5. 삼식씨네와 강원씨네
퀴퍼가 끝난 후, 휴고와 함께 게이바 탐방에 나섰다. 마침 부산에서 올라온 테오/키케 커플도 합류해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중, 뜻밖의 제안이 들어왔다. 팟캐스트 <게이피씨방> 진행자 삼식 씨 커플과 다큐 <퀴어마이프렌즈>의 강원 씨 커플이 근처에 있으니 같이 술을 마시자는 연락이었다.
삼식 씨는 이 브런치에도 몇 번 등장했듯, 오스씨와 내가 괌에서 결혼하는 데 큰 도움을 준 인물이다. 우리의 사정을 듣고 해외 결혼 절차를 상세히 알려주며 긴 시간 통화해 준 고마운 사람. 이후 '모두의 결혼'에서 진행한 <사랑하니까 가족이지> 부산 상영회에 게스트로 참여하며 직접 만난 적도 있지만, 뒤풀이를 함께 하진 못해 늘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이번엔 망설임 없이 OK를 외쳤다.
강원 씨 역시 다큐 GV에서 얼굴을 보았기에 내적 친밀감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관객과 출연자의 관계이니 나 혼자만의 친밀감이었다.
삼식 씨의 귀여운 후배까지 포함해 우리 일행 다섯, 저쪽 다섯. 딱 10명이 모였는데, 모양새는 흡사 미팅 자리 같았다. 다만 4 커플이 한 자리에 모였으니, 분위기는 오히려 아주 건전했다.
자기소개와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됐다. 자리 배치 덕분에 나는 주로 강원 씨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됐는데, 역시나 ‘사회를 잘 본다’는 평에 걸맞게 입담이 대단했다. 본인의 이야기도 조리 있고 흥미롭게 풀어내면서, 자연스럽게 모두가 한 번쯤 고민해 볼 만한 화두를 던질 줄 아는 사람이었다.
어쩌다 보니 자연스럽게 서울 팀과 부산 팀으로 분위기가 나뉘었고, 삼식 씨 후배가 전라도 장흥 출신이라는 이야기가 도화선이 되어 지방 퀴어 커뮤니티에 대한 얘기로 확장되었다. 강원 씨는 이름과 달리 부산 출신이고, 얼마 전까지 어머니도 부산에 계셨다고 한다. (아쉽게도 최근 돌아가셨다. GV 때 어머니가 처음으로 아들의 영화를 보러 오셨다며 소개하던 장면이 떠올라 마음이 먹먹했다.)
강원 씨는 홍예당에도 몇 번 와봤다며, 그 아늑한 분위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서로 다른 정체성이 자연스럽게 섞여 어울리는 곳이라는 평가도 덧붙였다. 서울은 각 정체성별 커뮤니티가 워낙 커서 게이, 레즈비언, 젠더퀴어 등 각자 내부에서 충분히 생활이 가능해 정작 사람은 많아도 함께 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새로운 시각이었다. 사실 부산은 문화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인원이 상대적으로 적어 모두가 함께 모여야 뭐라도 할 수 있는 구조다. 사실 이번 범일동 아카이빙 사업도 그렇다. 게이바가 대상이지만 레즈비언, 트랜스 친구들도 함께 한다. 정작 공간의 운영자들은 그들을 반기지 않지만,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잡고 일을 만들어간다.
나 역시 "홍예당의 가장 큰 장점이 그거예요!"라며 동의했다. 홍예당에서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친구들을 만나면서 내 안에 있던 보이지 않는 편견이 얼마나 많았는지 깨달았다고도 고백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주제로 대화가 이어졌다. 게이바에서 단순히 술만 마시지 않고, 이렇게 조금은 '심도 있는' 이야기를 나눈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자리 배치 덕분에 삼식 씨와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게 아쉬웠지만, 다음에도 꼭 이런 자리가 있으면 또 참여하고 싶다. 사실 이런 뒤풀이 때문에라도 서울 퀴퍼에 다시 가고 싶을 정도로.
술값은 전부 강원 씨가 계산했다. 다음에 부산에 오면 맛있는 것 잔뜩 사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이 글을 강원 씨가 보고 “선우비가 잊어버리기 전에 빨리 부산 가자~~~”라고 외쳐주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 같다.
PS1: 강원 씨가 곧 책을 낸다고 한다. 제발 부산에서도 북토크 해 주세요!
PS2: 삼식 씨에게는 <게피방 베스트 에피소드 모음집> 책을 내라고 슬쩍 종용했다. 벌써 7년 차라는데, 아이돌로 치면 베스트 앨범 내고 재계약할 시기 아닌가? 내줘요, 내줘요!
6. 키웨스트 사장형
오래전 이태원에 <키웨스트>라는 게이바가 있었다. 가라오케도, 원샷바도 아닌, 일반 주점 같은 분위기. 무엇보다 밝고 편안해서 친구들끼리 모이기에 딱 좋은 곳이었다. 기억이 맞는다면 하이텔 퀴어모임 <또 하나의 사랑> 정모도 거기서 열렸고, 아마 그 자리에서 만난 누군가와 잠깐 사귀기도 했었다. 커밍아웃 이후 TV에서 사라졌던 홍석천 씨를 처음 본 것도 바로 그곳이었다.
키웨스트 형과 나, 그리고 H(한겨울에 나와 지리산 천왕봉 도전했던 애)는 꽤 긴 인연으로 얽혀 있었다. H와 형이 잠시 사귀기도 했고, 아이샵 사업을 함께 하기도 했고... 하지만 우리의 인연을 단 하나 꼽자면 역시 '파랑이'다.
러시안블루 고양이였는데 이름도 참 단순하게 ‘파랑이’였다. 형네 집에 놀러 갔다가 그만 덕통사고를 당해 분양받았다. 몇 번 새끼를 낳으며 그럭저럭 잘 살다가, 내가 부산으로 내려오면서 결국 고려대에 다니던 어떤 남학생에게 보내야 했다. 그땐 ‘가족’이나 ‘반려’라는 개념이 지금처럼 크지 않았던 시절이라, 그냥 미안할 뿐이다.
오랜만에 만난 형은 여전했다. 외모도, 성격도, 말투도. 그래서 반가웠다. 조만간 남미로 여행을 간다기에, 그 자리에 함께 있던 폴님과 한참 남미 여행 이야기를 나눴다. 폴님은 소문난 ‘남미새’(남미 여행 전문 자타공인 권위자)니까.
나는 옆에서 슬쩍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그런데 형... H 소식은 혹시 알아요?"
이 질문을 던질 타이밍을 계속 노렸지만 결국 끝내 묻지 못한 채 헤어졌다. 그게 조금 아쉬웠다.
7. 무지개 옷을 입은 대구 청년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청년이었다. 그를 처음 본 건 작년 서울 퀴퍼였다. 위아래가 연결된 무지개 점프슈트를 입고 있었으니 자연히 눈에 띄었다. 당시엔 그저 ‘튀는 옷 입은 친구’ 정도로 기억했다가 곧 잊었다.
그런데 얼마 뒤 대구 퀴어퍼레이드에 갔더니 또 그 친구가 있었다.
‘어? 서울에서 봤던 사람이다.’
괜히 반가웠지만, 여전히 아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리고 이번 서울 퀴퍼에서 또다시 그를 마주쳤다.
날이 너무 더워서 그랬을까. 이번만큼은 그냥 모르는 사람으로 지나치고 싶지 않았다. 결국 먼저 말을 걸었다.
“대구에서도 봤어요. 반가워요.”
그는 환하게 웃으며 예쁜 포즈를 취했다. 우리는 한참을 수다 떨다가 "다음 퀴퍼에서 또 봐요!"라고 약속하며 헤어졌다.
이름이라도 물어볼걸.
8.
드랙퀸, 아네싸
2023년 광안리에서 열린 드랙 브런치 행사에서 처음 만난 아네싸. 그날 이후 신기하게도 여러 자리에서 계속 마주치게 되었고, 만날 때마다 함께 사진을 찍는 게 작은 의식처럼 자리 잡았다. 아네싸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라도 다음 퀴퍼에 꼭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