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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소하게) 불타는 퀴어퍼레이드 연대기

by 선우비

* 주의 : 오래된 기억을 더듬어 쓴 글이라 다소 어긋난 사실관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혹시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주저 없이 알려주세요.


한국의 퀴어문화축제, 그리고 그 부속행사인 퀴어퍼레이드에 대한 내 가장 오래된 기억은 이대역에서 아현역으로 넘어가는 염리동 고개 즈음,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선 옛 골목 어귀의 한 사무실에서 시작된다. 그땐 퀴어문화축제라는 말 자체가 퀴어영화제를 조금 확장시킨 느낌에 가까웠다. 길거리 퍼레이드는 여러 행사 중 하나일 뿐, 지금처럼 중심 이벤트는 아니었다.

친구사이 회장이었던 철민이 형의 부름으로 그 회의에 참석했었다. 아는 얼굴도 있고, 처음 보는 얼굴도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한채윤 씨도 만났던 것 같다. 2001년의 일이었고, 그녀가 운영하던 출판사를 이어받게 되는 것은 그보다 훨씬 나중의 이야기다.

그 해 퍼레이드 장소는 홍대였다. 대학 운동장 한편에서 우리끼리 놀다가 정문에서 리치먼드과자점까지, 고작 300미터 남짓을 왕복하는 대단히 소박한 행진이었다. 무슨 놀이를 했는지는 도통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온갖 정체성의 퀴어들이 모여 게임하고 웃고 떠들던 기억만 희미하게 남아있다. 언젠가는 동대문운동장 근처의 학교 운동장에서, 오징어 게임을 하던 날도 있었다. 게이, 레즈비언, 바이, 다양한 친구들이 모여 그렇게 별 이유 없이 신나게 놀던 시절.


2002년, 이태원에서 열린 제3회 퍼레이드에선 친구사이에서 댄스팀을 조직한다고 해서 덜컥 따라나섰다. 강사까지 불러서 댄스스포츠를 배웠고,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라인댄스를 추며 행진하고, 끝난 뒤엔 가수 지연의 백댄서로 즉석 차출되어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그때 찍힌 사진은 지금도 잘 간직하고 있다.

2002년 이태원 퀴어퍼레이드 한 장면. 당일에 이태원에서 산 저 카우보이 모자는 지금 어디로 갔을까? 팔뚝 문신은 스티커. 왼쪽은 홍석천씨


그다음 해엔 종묘 공원에서 퍼레이드를 했다. 생활한복을 좋아하던 시절이라 사진 속 내 모습이 한복 차림이다. 행사의 구체적인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2004년, 2005년에도 꾸준히 참가했지만, 어쩐 일인지 사진이 남아있지 않다. 서른 초반의 나는 어딘가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던 것 같다.

당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던 드라마 <명성황후>의 흔적이 보이는 캐치프레이즈.
양가위 감독 스타일의 선글라스가 당시 또 유행이었지...


2006년엔 '아름다운 가족상'이라는 걸 받았다. 친구들과 함께 사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주최 측이 상을 줬다. 그런데 그다음 해에 그 친구들과 헤어지고, 지금의 오스씨와 부산으로 내려와 살게 되었다. 마치 연말 예능대상의 저주처럼 — 상 받고 나면 내리막길이라는, 그런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함께 상을 받는 이 중에 최현숙 씨가 보인다. 그나저나 다들 차림새가 ㅎㅎㅎㅎ나의 한복 사랑은 절정에 달하고...

부산으로 내려와 오스씨와 함께 살면서, 이유를 정확히 떠올릴 수는 없지만 그 무렵부터 퀴퍼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아마도 번아웃. 그 한 단어로 모든 것이 설명될 것 같다. 이후로는 조용히, 소소한 삶을 즐기며 살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2017년, 부산에서도 드디어 퀴어퍼레이드가 열렸다. 해운대 구남로 거리에 각종 부스가 차려지고 이후 행진을 했다. 양 옆엔 혐오세력이 피켓을 들고 있었다. 무관심이 가장 큰 적이었던 10년 전 서울과는 다른 풍경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들이 무섭진 않았다. 오히려 조롱의 대상에 가까웠다. 얼굴을 드러내고 행진하는 퀴어들과 반대로 그들은 대부분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특히 젊은 이들일수록. 자기들도 부끄러운 걸 아는 모양이었다. 오스씨는 혹시 아는 사람을 만날까 염려해 행진엔 참여하지 않고 행렬 바깥에서 나를 따라왔다. 한때 친했던 게이 커플과 함께 해운대 거리를 누볐던 기억이 난다.


2018년엔 노르웨이를 여행하게 됐는데, 마침 오슬로에 도착한 날 퀴퍼가 열리고 있었다. 온 도시가 무지개로 물들어 있었다. 공무원, 회사원, 직업별로 깃발을 들고 행진하는 모습이 재미있고도 부러웠다. 행진이 끝난 뒤엔 공원에서 애프터파티가 열렸다. 북유럽 사람들은 대체로 차갑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퀴어나 퀴어의 친구들은 역시나 친절의 의인화였다. 카메라를 들이대도 누구 하나 인상 찌푸리지 않고 환하게 웃어주는 모습에, 단박에 이 나라가 좋아졌다.

생각해 보니 진짜 뚱뚱할 때는 퀴퍼 사진이 없구나... 몸무게와 퀴퍼 참석의 상관관계가... 요때는 다시 살이 빠졌을 때.

오슬로 퀴퍼를 다녀온 후, 다시 한국 퀴퍼에도 나가보자고 마음먹었다. 오랜만에 서울 퀴퍼에 갔지만, 비가 쏟아져 제대로 아무것도 못 하고 카페로 피신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겨우 피어오르던 퀴퍼맨의 꿈이 그날로 다시 접혔다.

그리고 코로나. 긴 공백을 지나, 2024년 오스씨의 퀴어력이 급상승하던 시기, 도쿄 퀴퍼에 가보자고 제안했다.

"옷 쇼핑도 하고 말이지."
처음 참가한 도쿄 퀴퍼. (자세한 내용은 https://brunch.co.kr/brunchbook/gayjapan )

요 착장 귀엽네.

도쿄 퀴퍼를 다녀온 뒤, 같은 해 6월 서울 퀴퍼에도 복귀했다. 처음으로 오스씨도 거리를 걸었다.

"막상 해보니까 별 거 없지?"

"재미있다."

나도 잔뜩 흥분해서 굿즈를 이것저것 사들였고, 예상치 못한 지출에도…후회는 없었다!!! 도쿄와 서울을 비교하며 앞으로 한국 퀴퍼가 가야 할 길에 대해 감히 고민도 하는 등 퀴퍼맨으로서의 역량이 점차 상승하는 와중에,

어찌나 덥던지... 아스팔트 위에서 하는 축제... 힘들다...

그해 가을, 대구 퀴퍼에도 참가했다. 이번엔 홍예당도 부스를 차렸다. 규모가 작아서인지 서울보다는 한층 거리집회에 가까운 분위기였다. 하지만 보수의 심장에서 외치는 구호들은 오히려 짜릿했다. 특히 홍준표 시장의 방해에 대해 법원이 위법 판결을 내리고 손해배상까지 명령한 직후라 더욱 신이 났다. 그곳엔 퀴어만이 아닌, 다양한 사회적 소수자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후 윤석열 퇴진 집회의 가장 열렬한 구성원이 되기도 했다. 퀴퍼가 현실정치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연대의 장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동지라는 말에 딱 어울리는 그런 퀴퍼!


그리고 얼마 전, 2025년 서울 퀴퍼에도 다녀왔다. 이제 우리에게 퀴퍼는 단순한 퍼레이드가 아닌, 가장 즐거운 축제가 되었다. 광안리 불꽃축제도 좋고, 부산 락페도 좋지만, 우리에겐 퀴퍼만 한 축제가 없다. 내가 나이어도 괜찮고, 심지어 레즈비언이 되어도 괜찮은 축제. 누구나 누구라도 될 수 있는 축제. 이런 축제가 부산에도 온전히 자리 잡을 수 있기를 꿈꾼다. 그 꿈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떤 노력을 보태야 할지, 이제부터라도 더 고민하고 실천해야겠다.

게이가 레즈 라이선스를 얻는다니까 너무나 기뻐해주는 한국레즈비언상담소 직원. 누구라도 될 수 있는 축제에 많이 놀러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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