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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성 좋던 그 엉덩이

by 선우비

부산으로 내려올 때만 해도 나는 ‘회를 못 먹는 남자’였다.
날생선의 미끈거림, 초장에 푹 찍어 꿀꺽 삼키는 그 과정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그런데 또 이상하게도 만화 <미스터 초밥왕>에 빠져서, 초밥은 좋아했다.
이런 불합리한 입맛을 가진 나를 위해 오스씨가 데려간 곳이 있었으니, 당시에도 오마카세 방식으로 운영하던 O스시였다.

사장님은 대학에 출강까지 나갈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고, 그가 쥐어주는 초밥들은 다른 곳에서는 맛볼 수 없는 독특함이 있었다.
하나씩 코스처럼 내어주시다가 내가 특히 맛있게 먹은 초밥은 한 번 더 쥐어주기도 했다.
비싼 가격 탓에 기념일 같은 특별한 날에만 가던 곳이었는데, 어느 날 확장 이전을 하더니 넓어진 만큼 주인장과의 거리가 멀어져 발길을 끊게 되었다. 나랑 비슷한 느낌을 받은 단골이 많았던지 가게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닫았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고, 그 가게의 기억도 흐릿해졌다.
그러다 얼마 전, 집 앞을 걷다 우연히 새로 생긴 일식당을 발견했다.
호기심에 살짝 들어가 보니, 이다바에 서 있는 익숙한 모습.

“어어? 혹시 예전에 O스시에서…”
“맞습니다.”

아저씨의 푸근한 미소에 그 시절의 공기가 스르르 되살아났다.
그 자리에서 바로 먹을 수 있냐 묻자, 예약제로만 운영한다는 말에 아쉽게 발걸음을 돌렸다.

예전의 좋은 기억을 되살려줄 누군가를 다시 만나는 건, 나이가 들수록 더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안다.
그래서 이번 20주년 기념일은 반드시 이곳에서 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며칠 전, 드디어 다시 마주한 그의 손끝에서 빚어진 요리들.
첫 번째로 나온 야채절임을 입에 넣자, 오래 묵은 기억이 한꺼번에 피어올랐다.

창의적이면서도 깊이를 잃지 않는 맛.
그래, 그 시절 모든 게 낯설고 서툴던 부산살이를 버틸 만하게 해주던 바로 그 맛이었다.

그때의 시간과 풍경, 그리고 우리가 함께 쌓아온 이야기까지 접시 위에서 다시 살아났다.


처음 만난 날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늘 엇갈린다.

그날 우리는 밤 12시, 창경궁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하지만 약속 전달이 정확히 되지 않아 서로 다른 장소에서 기다렸다.
결국 ‘퇴짜 맞았다’는 비참한 마음으로 돌아서려던 찰나, 연락이 닿아 1시쯤 가까스로 만났다.

오스씨는 지금도 내가 친구들과 술 마시다 늦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아니다!
그는 돈화문 앞에서 기다렸고, 나는 창경궁 담벼락에 붙은 작은 공원 벤치에서 기다렸다.
당시 우리는 ‘1회용 파트너’로 만나는 거여서, 다짜고짜 여관으로 직행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관계에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못했던 나는, 본게임 전에 조금이라도 대화를 나누려고 굳이 벤치가 있는 공원을 약속 장소로 정했던 거다.

마침내 만나게 된 우린 둘 다 살짝 토라진 상태였다.
12살이나 연상인 그에게 욕은 못하겠고, 대충 얘기하다가 집에 가야지 싶었다.

“(여관은 집어치우고) 술이나 한 잔 할래요?”

시종일관 딱딱한 표정을 하고 있던 오스씨도 그러는 게 좋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며 앞장서 걸었다.


그때 오스씨는 얇고 실키한 아르마니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런데 그 바지가… 엉덩이 사이로 살짝 말려 들어가 있었다.
속칭 ‘엉덩이가 바지를 먹은’ 상태였다.

‘아, 저거 빼주고 싶다.’

자꾸 그 생각을 하다 보니, 갑자기 그 엉덩이 라인이 엄청나게 섹시하게 보였다.
짜증과 서운함이 눈 녹듯 사라지고, ‘오늘은 무조건 이 남자를 자빠뜨려야겠다!’라는 욕망이 솟구쳤다.

나는 시끄러운 게이바 대신, 길가에 테이블을 놓은 조용한 술집으로 그를 이끌었다.
대충 맥주 한잔 꺾고 빨리 여관으로!!!

그런데 놀랍게도, 건배가 오갈수록 말이 술술 통하는 게 아닌가.
처음 만났는데도 공통 관심사가 많아서 쉴 새 없이 조잘댔다.

결국 므흣한 생각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거의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마시고 떠들었다.
정작 여관에 들어가서는 너무 취해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후문.

스무 해가 지나 오스씨의 첫인상은 가물가물해도,
그 엉덩이만큼은 아직도 HD 화질이다.

“저 엉덩이는 꼭 잡아야 한다.”

그날의 결심이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다.
고맙다, 먹성 좋던 그 엉덩이야!


36E40C96-3770-4D4E-849E-D5A410748B34_1_105_c.jpeg 수영구 퀴어 모임 친구(이웃집오소리 걔)가 준 기념일 케익. 고맙다, 진짜 예쁘고 맛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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