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그때 나는 서른둘이었다.
그 시절에도 ‘민주노동당’이 존재했고, 아마도 정당 중 성소수자정책을 냈던 유일한 곳이었는데, ‘성소수자위원회’라는 작은 조직도 운영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곳에서 “게이 나이 40,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의 강연회가 열렸다. 강사가 누구였는지는 이제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의 이야기는 당시 내 마음에 꽤 깊은 울림을 남겼던 모양이다.
얼마 전, 오래된 컴퓨터 파일을 정리하다가 그 강연을 듣고 썼던 글을 발견했다.
오스씨를 만나기 1년 전, 그러니까 스스로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으로 뒤숭숭하던 시절의 기록이었다.
이십 년 전, 서른둘의 내가 남긴 그 글을 오늘 이곳에 다시 소개해본다.
게이 나이 마흔. 그 나이가 되면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억지로 일반화'시켜 이야기해 보자.
게이바에서, 채팅으로, 혹은 소개팅으로 누군가를 만난다. 그리고 연애가 시작된다.
하지만 과연 이 관계가 얼마나 지속될까? 이번엔 얼마나 갈까? 내가 치매에 걸려 벽에 똥칠을 하게 될 때까지 이 사람이 옆에 있어줄까? 이 생각이 드는 순간, 마음 한편에서 연애의 열기가 식어버린다. 상대가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 해도, 이 불안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젊었을 땐 그냥 좋으면 사귀었다. 그저 감정 하나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50대가 넘어가서도 외로움에 지쳐 밤 12시까지 게이바에서 곤죽이 되도록 술 마시며 노래하고 싶지 않다면, 이제는 모든 것을 고려해야 한다.
문제는, 그 모든 고려 끝에 남는 것이 '믿음의 부재'라는 사실이다. 사람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많은 경험으로 이미 잘 알기 때문이다.
낮에는 이성애자인 척, 밤에는 동성애자로서의 삶. 이중생활은 이제 익숙해졌을 법도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이 부조화는 더욱 심해진다.
직장에서는 '저 나이 먹도록 혼자 사는 조금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 누가 물어보면 대답할 말도 미리 정해두었기에 능숙하게 대응하지만, 정작 스스로에게는 한심하기 짝이 없다.
혼자 산다는 것. 사회와 완전히 동화될 수 없다는 그 괴리감은 시간이 갈수록 고독을 키운다.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뱃살은 처지고, 예전 같던 육체적 매력은 줄어든다.
술자리가 많아 간은 혹사당하고, 옆에서 잔소리해 줄 사람도 없으니 담배도 줄지 않는다. 혼자 병들어 간다는 느낌. 끔찍하다.
헬스클럽에 다니고, 수영도 해본다. 하지만 그 노력이 자신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아직 죽지 않았다'는 신호를 시장에 보내기 위한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게이바에 가서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을까 두려워진다. 이젠 돈으로 남자를 사야 하나, 자괴감마저 든다.
결국 이 모든 불안은 한 가지를 말한다.
"나이를 먹으면 게이 생활이 힘들어진다."
중년이 되어갈수록 실감한다. 소위 중년을 좋아한다는 젊은이들… 하지만 그들의 호감은 오래가지 않는다. 함께 늙어가 줄까? 아니, 그 늙어감의 의미를 알기나 할까?
친구들도 변해간다. 이젠 술 마시며 부킹을 바라던 시절은 갔다. 누구는 간경화 얘기, 누구는 폐암 얘기. 그리고 남은 자리엔 고독뿐.
젊은 시절 내 침대를 차지했던 아름다운 청년들은 이제 "살이 늘어졌다", "냄새난다"며 나를 거부한다. 내가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시끄러운 뽕짝이 흐르는 중년 게이바 한쪽뿐이다.
돈이라도 많으면 여행이라도 다니며 스트레스를 풀 텐데… 젊을 때 남자 꼬드기느라 펑펑 쓴 술값과 데이트 비용만 아꼈어도 강남 오피스텔 한 채는 샀겠다.
이제 가진 돈은 어디 한번 아프기라도 하면 순식간에 빠져나갈 만큼밖에 없다. 혼자 늙어갈까 두려워 악착같이 모으다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게이로서의 삶은 더 멀어졌다.
연애시장에서 퇴출 위기, 노후에 대한 불안감. 애인을 사귀어도 불안하고, 없어도 불안하다.
결국, 기혼 게이가 되어 또 다른 이중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가?
정답은… 안타깝게도 그렇다.
* 강사는 이렇게 현상을 정리한 후, 대안을 말해준다.
1) 노인에 대해 알아보기
두려움은 무지에서 온다. 한국 사회에서 노인과 함께 지내본 경험은 드물다. 늙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직접 부딪쳐 보고 알아가자.
2) 경제공동체 만들기
단순히 소비만 하는 게이 모임에서 벗어나, 봉사나 친목 등 생산적인 계모임을 통해 돈도 모으고 의미도 찾자.
3) 법적 제도 마련에 관심 갖기
동성 결혼이나 동거인 사회계약 등 법적 장치를 마련해 관계를 좀 더 안정적으로 만들고, 노후를 대비하자.
이 제안들이 신통찮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이런 이야기를 입 밖에 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이제 시작이다. 머리를 맞대면, 언젠가 더 나은 대안이 나올 것이다.
우리가 함께 늙어가는 방법을 찾아내리라 믿는다.
강연 끝.
"남자 꼬드기느라 펑펑 쓴 술값과 데이트 비용만 아꼈어도 강남 오피스텔 한 채는 샀겠다."
이 표현에서 시대상이 드러나긴 하지만(지금은 절대 못 산다!), 2004년이나 지금이나 대한민국 게이의 처지는 크게 달라지지 않아 보인다.
돈, 건강, 연인,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 이 모든 걸 도와주는 사람도, 지지해 주는 사람도 없이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
특히 강사가 강연에서 말했던 ‘동성결혼’과 ‘동거인 사회계약’(팍스법 같은 제도)이,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제도권 안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더욱 씁쓸하다.
당시 나는 만나는 사람들과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처음부터 그런 대화가 필요 없는, 겉모습이 최우선인 만남이었다. 순간을 즐기는 것이 가장 ‘쿨’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또래 이성애자들이 하나둘 안정적인 자리를 찾아갈 때, 그 모습이 은근히 부러웠다.
더 이상 쿨한 척 모른 체할 수 없었다. 서른만 넘어도 노총각 딱지가 붙던 시대(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현빈에게 노처녀라 놀림받던 삼순이 나이가 29살!)였으니, 나이 듦에 대한 불안을 더는 외면할 수 없었다.
그때 처음으로, 게이로서 ‘정신 차리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장 먼저 선택한 건 소개팅이었다.
겉모습만 보고 상대를 고르던 습관에서 벗어나, 이성애자들이 결혼 상대를 고르듯 신중하고 꼼꼼하게 살펴보기로 했다.
“근면성실하게 자기 일 잘하는 사람으로 부탁드려요.”
게이바 사장님의 도움으로 ‘에겐남 스타일’의 건실한 청년 여섯 명을 차례로 만났다. 직업, 성품, 외모까지 흠잡을 데 없었다. 그래서 놓치기 싫어 노력해 봤지만,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억지로 설레려 할수록 공허함만 또렷해졌다.
"아무리 좋은 조건이어도 끌리지 않는 남자와는 함께 잘 수 없다."
남자는 신체구조상 거짓 오르가슴을 연기할 수 없으니까.
게이의 사랑이 가진 유일한 진실이었다.
그날 밤, 홀가분한 마음으로 채팅방에 들어갔다. 그냥 가볍게 만날 상대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오스씨를 만났다.
그렇게 찾아 헤맸던, "함께 늙어가자."라는 나의 고백에, "긴가민가하지만… 일단 널 사랑하니까 갈 데까지 가보자."라고 대답해 준 남자가, 야한 채팅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소개팅으로 만났으면 그림이 참 그럴듯했겠지만, 세상 일이 다 그렇지. 뜻대로 되는 게 있나. 사랑은 더더욱.
뭐, 결과만 좋으면 되지.
요즘은 꼭 누군가와 함께 살아야만 하는 시대가 아니다. 혼자서도 충분히 자신의 삶을 단단하게 이끌어가는 게이들이 많다.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는 일'은 이제 게이뿐만 아니라 이성애자에게도 선택이지 필수가 아니다.
부디 강연에서 부정적으로 묘사한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하며, 혼자서도 당당히 40대를 꾸려가는 게이들이 많기를 바란다.
반면 나는 혼자 사는 삶을 두려워했던 탓에 강사의 조언을 제법 충실히 실천하며 살아왔다. 어느덧 60대 중반이 된 오스씨를 통해 늙어가는 과정을 매일 새롭게 배우고 있고, 돈 모으는 재미는 못 배웠지만, 아무튼 가계부 열심히 쓰며 살고 있다. 그리고 괌에서였지만 어쨌든 동성결혼도 했다.
돌아보니, 명강의였다.
강의 하나가 누군가의 인생을 이렇게 바꿀 수도 있구나 싶다.
앞으로 강의를 들을 땐 조금 더 신중해야겠다는 작은 교훈도 남는다. 하하.
강연의 마지막 문장을 다시 떠올린다.
“이제 시작이다. 머리를 맞대면, 언젠가 더 나은 대안이 나올 것이다.
우리가 함께 늙어가는 방법을 반드시 찾아낼 것이라 믿는다.”
누군가와 함께하든, 빛이 나는 솔로든,
40대를 앞둔 게이들.
모두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