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0일 토요일, 우리는 대구 퀴어문화축제를 향해 길을 나섰다.
올해 행사장은 대구 시내 228기념중앙공원 옆 차도였다. 작년에는 반월당역 인근에서 열렸는데, 이번 장소는 그보다 조금 더 좁아 보였다.
오스씨와 나는 재작년 대구 퀴퍼 티셔츠(무지개 고양이)를 입고 행사장에 들어섰다. 도착하자마자 공식 부스로 달려가 올해 신상 티셔츠(무지개 꽃)를 구입했다. 디자인도, 천의 질도 모두 업그레이드되어 만족스러웠다. 대구 퀴퍼 티셔츠는 평소에도 부담 없이 입기 좋은 디자인이라 늘 마음에 든다. 내년에는 또 어떤 티셔츠가 나올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홍예당 부스는 무대 가까이에 자리했다. 덕분에 무대를 직접 보지 않아도 행사 진행 상황을 한눈에 알 수 있었고, 전인(홍예당 운영위원이자 가수, 대표곡: 서울 여자 사랑하면 안 돼)의 공연이 시작되자마자 바로 뛰어나가 촬영할 수 있었다.
부스를 잠시 지키다 행사장을 둘러보았다.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홍예당을 방문했던 케세라(부산대 퀴어모임) 친구도 만났는데, 이번에 정식 동아리가 되었다고 해 기념사진을 찍으며 축하 인사를 전했다.
영남퀴어 활동가 민준이는 정기 후원 시스템을 드디어 만들었다며 가입서를 내밀었다. 늘 소수의 인원으로 힘겹게 움직이던 모습이 떠올라, 기꺼이 이름을 적었다. 금액을 정하는 데 잠시 고민했지만, 한 걸음씩 체계를 갖춰가는 그들의 모습이 대견스러웠다.
책과 굿즈를 구경하던 중, 프레스 완장을 찬 젊은 친구들이 다큐멘터리에 들어갈 인터뷰를 요청했다. 머리 희끗희끗한 아저씨 둘이 같은 티셔츠를 입고 다니니 그림이 나온다고 생각했을까?
어떤 다큐인지 자세히 묻지 않았지만, 퀴퍼를 다루는 다큐라면야 다 좋겠지 하는 마음으로 응했다.
Q. 커밍아웃 후회한 적 없나요?
"저는 없어요. 다행히 가족들이 잘 받아줬어요. 오스씨는 펑펑 울면서 고백했는데, 정작 가족들은 다 알고 있었다면서 왜 이제 와서 말하냐고 의아해했대요."
Q. 얼마나 사귀셨어요?
"이십 년이요." (일동 깜짝 놀람)
Q. 동성결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사실 올해 괌에서 결혼했어요." (일동 또 깜놀)
한 사람과 오래 함께 하는 관계는 어떤 느낌이냐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했다.
“된장찌개 같은 사랑이라고 표현하고 싶어요. 편안하고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집밥 같은 느낌.”
예전에 읽었던 책 <같이 산 지 십 년>의 저자가 자신의 사랑을 “물리지 않는 사랑”이라고 정의했는데, 그 표현이 우리와도 참 잘 어울린다고 느낀다.
이번 주 부산 게이바 거리에서 진행되는 <일동 졸업> 전시를 함께 준비 중인 '휴고'와, 우리와 함께 괌에서 결혼식을 올린 '성민커플', 그리고 처음 만난 '영일커플'도 함께했다.
성민커플은 작년에도 대구 퀴퍼에 참여했는데, 올해도 작년 행사 장소로 향했다가 그 자리에 있던 기독교 혐오집회에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들은 여전히 질기게 우리 곁에 붙어 소리친다.
사랑을 배우려 교회에 갔을 텐데, 오히려 미움만 가르치는 지도자들에게 속아 거리에서 조롱받는 존재가 되어버린 모습이 안쓰러웠다.
퍼레이드가 시작되자 우리는 레즈비언 퍼포먼스팀 '레즈히어로즈' 차량을 따라갔다.
1세대부터 4세대까지 이어지는 아이돌 노래에 맞춰 두 시간 가까이 쉬지 않고 춤추고 노래하는 그들의 모습은 열정을 넘어 숭고함까지 느껴졌다. 순간, 나도 완전히 그들의 팬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도로 통제는 엉망이었다.
경찰은 한 차선만 내주고도 흐름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행렬은 곳곳에서 막혔다. 반대편 넓은 차선은 텅 비어 있었는데도 굳이 행렬을 좁혀 그 옆으로 대형버스를 지나가게 했다.
타 도시처럼 도로를 넓게 개방했더라면 금방 끝났을 행진이 괜히 길어지며 모두가 큰 불편을 겪었다.
시민 불편을 핑계로 행사를 축소시키려던 정치적 계산이 오히려 그들의 무능을 드러낸 셈이다.
퍼레이드가 끝난 후 우리는 중국집에서 함께 뒤풀이를 했다.
새로 알게 된 영일커플은 장거리 연애 중이었는데, 함께하는 미래를 위해 여러 시도를 모색하고 있다고 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언젠가 홍예당에서도 커플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기획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와 헤어지고 우리는 신천동 게이 거리를 찾았다. 서울 종로처럼 축제의 여운이 느껴지길 기대했지만, 분위기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우리가 들어간 가게에서도 퀴퍼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거리에서의 자긍심 행진과 대구 게이 거리의 일상이 아직은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는 듯했다.
현재 전국 12개 도시에서 퀴어문화축제가 열리고 있다. 춘천이나 제주 같은 작은 도시에서도 축제가 이어지는데, 제2의 도시 부산에서는 아직 열리지 못하고 있다. 과거 두 차례 시도했지만 혐오세력과 일부 공무원의 방해로 송사에 휘말리며 중단되었다고 들었다.
부산이 굳이 다른 도시와 똑같은 형태의 축제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부산의 커뮤니티가 중심이 되는 축제다. 게이바, 퀴어 단체, 다양한 모임들과 충분히 소통하며, 부산만의 색을 담은 축제를 만들면 좋겠다. 작년 12월 말 서면 거리에서 열린 '메리퀴어스마스' 같은 행사는 그 가능성을 보여준 좋은 예였다.
그리고 언젠가는 혐오세력의 방해가 조금씩 줄어들고, 미움 대신 서로를 이해하려는 목소리가 더 크게 울려 퍼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