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로 데뷔 30주년이 되었다

by 선우비

게이는 되는 게 아니라 태어나는 거라는 게 정설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게이들은 자신이 언제부터 남자를 좋아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마치 대부분의 남자들이 ‘언제부터 여자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대신, 게이들은 자신이 처음 게이 커뮤니티에 발을 디딘 날을 아주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날을 흔히 ‘데뷔일’이라 부른다. 누가, 언제부터 이 단어를 쓰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원래는 연예계에서 쓰이던 말일 텐데, 한번 대중에게 얼굴이 알려지면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기 힘든 연예인처럼, 게이도 한 번 커뮤니티의 공기를 맛본 순간 다시 벽장 속으로 돌아가기 어렵다는 점에서 빌려온 표현이 아닐까 싶다.

나 역시 그날을 선명히 기억한다.
1995년 7월 31일. 내 데뷔일이었다.


1994년, 연세대 대학원생 서동진 씨의 커밍아웃은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다. ‘나 같은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라’ 생각하며 살아온 수많은 게이들이 그날 이후 깨어났다. 그는 당시 신문에 삐삐 번호까지 공개하며, 정보에 목마른 전국의 게이들을 서로 연결해 주었다.

그 시절 나는 군 복무 중이었다. 면회를 온 전 여자친구(잠시 사귀었다가 친구가 된)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내가 보기엔 오빠도 게이 같아. 서동진 씨 삐삐 번호 알려줄 테니까, 제대하면 연락해 봐.”

제대하자마자 번호로 연락했고, 그는 나를 ‘친구사이’라는 모임에 연결해 주었다.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바로 그 ‘친구사이’다. 당시 사무실은 종로가 아니라 연남동 기사식당 골목 건물 2층에 있었다.


사무실 오픈 시간은 저녁 7시.
나는 두 시간이나 일찍 도착해 건물 주변을 맴돌았다. 혹시 ‘이상한 차림’의 사람들이 드나들면 그대로 돌아가려고. 나 자신은 지극히 평범하다고 생각했지만, 사회가 심어준 편견은 나에게도 그대로 있었다. 괜히 화장 잔뜩 하고 여장한 사람이 있을 것만 같았다.

7시 무렵, 한 남자가 사무실로 들어갔고, 곧 불이 켜졌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2층 계단을 올랐다.
안에는 까무잡잡한 피부에 마른 체형의 남자가 있었다. 그는 친절했지만, 하이톤 목소리가 괜히 거슬렸다. 그냥 (홍석천이나 김똘똘처럼) 끼가 많은 사람일 뿐이었지만, 그런 사람을 접한 경험이 없어서인지 단 둘이 있자 살짝 무섭기까지 했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산더미처럼 많았는데도, 동성애 관련 글과 종로 게이바 광고가 실린 소식지만 챙겨 들고는 곧바로 나왔다.

광고 속 전화번호를 눌러 찾아간 곳은 <썸씽>이라는 게이바였다. 지금으로 따지면 '이비스 앰배서더 인사동 호텔' 맞은편 건물 2층에 가게가 있었다. 30대 후반의 게이 커플(추정)이 운영하던 그곳에서 나는 게이 커뮤니티 입문 수업을 받았다. 게이와 트랜스젠더의 차이, 나이·취향별 바의 분류와 위치, 매너, 조심해야 할 유형까지. 손님은 나 혼자였고, 두 시간 내내 그들의 ‘교사 모드’ 강의가 이어졌다.

“여긴 진짜 위험한 사람 많아. 조심 또 조심해야 돼!”

계산하려 하자 데뷔 축하한다며 금액을 깎아주더니,
“어떤 스타일 좋아해?”
“멋지게 생긴 아저씨요.”
바로 근처 중년 게이바 <리바이벌>로 직접 데려다줬다.

"오늘 처음 나온 앤 데, 이상한 손님 말고 제대로 된 사람 소개해주세요."

리바이벌 사장에게 당부도 잊지 않았다.


<리바이벌>은 종로 중년 게이들의 성지였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속으로 환호했다. ‘이 많은 사람들이 다 게이라니!’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사장은 교감 선생님 같은 인상의 중년 남자였다. 썸씽 사장에게 ‘인수인계’를 받은 그는 옆에 앉아 허벅지를 슬쩍 쓰다듬으며 물었다.
“어떤 사람 좋아해?”
“사장님 같은 사람요.”
넉살을 떨었더니 맥주가 공짜로 생겼다. 그리고 또 한 번의 경고.
“처음 만난 사람이랑 절대 자지 마. 사기꾼도 많고 병 걸린 사람도 많아. 너 같은 초짜만 노리는 인간들도 많고."

하지만 25살 호르몬 덩어리 귀에 그런 말이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한여름 짧고 가벼운 옷차림이 대다수인 공간에서, 그는 검은 긴바지와 흰 긴팔 셔츠 차림이었다. 말끔하고 지적인 분위기. 조각 같은 얼굴과 늘씬한 몸, 당시 인기 배우 정보석을 빼닮은 미남이었다.

맘에 드는 사람에게는 맥주를 보내는 문화가 있던 시절, 나도 맥주를 보냈다. 잠시 후,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부르더니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오늘이 데뷔라고요?"

그리고 이어진 비슷한 레퍼토리의 강의…


그렇다.

인터넷도 없고,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동성애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접하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그 공백을 메우듯, 게이바 사장을 비롯해 먼저 데뷔한 선배(?)들은 기꺼이 교육자의 역할을 자처했다. 사회적 지위도, 학력도, 생활 수준도, 삶을 대하는 철학도 제각각이지만, ‘게이’라는 정체성 하나로 모여 서로 정을 나누고 사랑을 주고받는 사회. 서로의 신상은 가급적 묻지 않는 것이 예의였고, 이름조차 모른 채 하룻밤을 함께 보내는 일도 낯설지 않았다.

그 사회의 위험을 먼저 겪어본 선배들은, 처음 나온 후배를 보면 일단 걱정부터 했다. 경고하고, 또 경고했다.

하지만 학교 다닐 때도 선생님 말은 귓등으로 흘려듣던 내가, 그런 충고를 귀담아들을 리 없었다.

결국 몇 번은 몸으로 부딪혀 깨져보고, 돈으로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선배들의 귀한 말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새 그 말을 후배에게 전하는 입장이 된다.

그래서 나의 데뷔날은 수십 병의 맥주와, 몸에는 좋지만 귀에는 쓴 정보들로 가득했다.
물론, 그것만 있었던 건 아니다.


난 계속되는 흥분과 쏟아붓듯 마신 맥주 탓에 결국 필름이 끊겼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 여관방 침대 위였다. 옆에는 정보석을 닮은 냉미남이 벗은 팔다리로 나를 단단히 끌어안고 있었다. 처음 만난 사람과는 절대 자지 말라던 그 입으로, 내 젖꼭지를 물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난 그에 대해 여러 가지를 알게 됐다.

그가 그 더운 날에도 긴 옷으로 온몸을 감췄던 건, 패션에 고집이 있어서가 아니라 지나치게 마른 팔다리 때문이었다. 특히 종아리에는 굵은 핏줄이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다. 냉미남 이미지를 부여했던 차갑게 느껴졌던 그의 눈빛은, 한쪽 눈이 유리로 만든 의안이어서였다.


하룻밤을 보낸 다음 날부터 그는 나를 따라다녔다.

우리는 1년 6개월쯤 동거했다. 헤어진 뒤에도 자주 만났고, 내가 게이 커뮤니티에서 벌인 대부분의 일들에 그가 참여했다. 서로에게 새로운 애인이 생기면 축하해 주고, 그 애인들과도 함께 어울렸다. 내 전 애인들 중 상당수는 그와 친구가 됐다.

연인으로 시작했지만, 헤어진 뒤에도 그는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형제, 가족이었다.

그리고 서로의 마지막 연애가 끝난 뒤, 필요에 의해 다시 함께 살기 시작했다. 그 시절 우리는 네 권의 책을 같이 만들었다. 우리의 동행은 내가 오스씨를 만나 부산으로 내려와 정착하기 직전까지 이어졌다.

그 후에도 그는 종종 부산에 내려와 나를 찾았다. 그러다 어느 날 병을 얻었고, 몇 년의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내 데뷔일은, 첫 섹스를 한 날이자 첫 애인을 만난 날, 그리고 유일한 게이 형제를 얻은 날이기도 하다. 매년 이 날이면 게이바에서 술을 마시며 축하한다.

오늘 밤은 어디로 갈까. 아직 정하진 않았지만, 벌써 설렌다.



‘친구사이’ 사무실에서 나를 처음 맞이해 준 끼순이 형은 오준수 씨였다. 당시 그는 단체 부회장을 맡고 있었다. 그로부터 1년 뒤, 내가 ‘친구사이’ 회원이 되면서 다시 그를 만나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말년에는 서울대병원에서 투병 생활을 했다. 병문안을 갔던 그날의 공기, 그리고 그 시절 사회에 짙게 깔려 있던 에이즈에 대한 공포와 차별을 떠올리면, 지금도 마음이 먹먹해진다.

검색하다 그에 대한 기사가 있어서 첨부한다.

https://www.huffingtonpost.kr/news/articleView.html?idxno=78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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