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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년기

난 여름잠을 잔다.

파뤌기 (1)

by 선우비

1.

한국 1등 음악 앱인 유튜브뮤직에서 구독자 수 1.75만 명. 아직은 극소수만 아는 가수, 쿠잉.

쿠잉은 스스로를 ‘여름 가수’라 부른다.
그래서 주로 여름을 앞두고 신곡을 내고, 여름에 콘서트를 연다.

작년, 홍대 상상마당에서 열린 쿠잉의 콘서트를 보러 갔다가 오스씨와 나는 발을 오동동동 구르며 외쳤다.
“라이브 너무 잘해! 내년에 또 오자!”

하지만 이후 활동이 잠잠해서 혹시 가수 활동을 접었나 걱정했는데, 고맙게도 얼마 전 새 EP가 나왔고, 콘서트 공지가 떴다. 나는 캘린더에 예매일을 저장하며 손꼽아 그날을 기다렸다.

예매 당일, 오스 씨와 나는 멜론티켓 창을 띄워놓고 긴장한 채 컴퓨터 앞에 앉았다. 실시간으로 내 손을 빠져나갈 포도알(좌석)을 두려워하며, ‘무조건 앞자리만 노리지 말자’며 마음을 비우고 클릭했다.
그런데 세상에. 단 하나의 포도알도 없었다.

내가 1등이었다.

“난 창 끌게. 네가 예매해.”
옆에서 오스 씨의 힘 빠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전 나온 새 앨범 타이틀곡은 이전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히트공식을 반복하기보다, 하고 싶은 걸 조금 더 욕심낸 느낌이었다. 나는 그게 좋았다. 예전 곡들처럼 자꾸 찾아 듣게 되진 않았지만, 데뷔 5년 차쯤이면 이런 시도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만 그렇게 생각했나 보다.
(그랬다. 공연에서 쿠잉 본인도 새 앨범 반응이 미지근했다고 토로했으니.)

공연일이 가까워져도 좌석은 끝내 매진되지 않았다.


6월 서울 퀴어퍼레이드 이후 한 달 만에 다시 서울에 가는 길.
우리는 최대한 돈을 아끼기로 했다. 기차표는 콘서트 시간에 맞춰 끊고, 저렴한 숙소를 잡고, 체크아웃하자마자 부산행 기차를 타는 일정.
총 26시간 여행, 그야말로 ‘콘서트만 보는’ 하루였다. 서울행에 대한 설렘은 없었다. 오히려 해치워야 하는 출장 같은 기분이었다.

“7만 원짜리 콘서트 하나 보는데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간다. 우리 이번을 마지막으로 내년엔 오지 말자.”
“그러자.”
허탈함이 전염됐다. 오스 씨도 내 표정을 닮아갔다.

그렇게 큰 기대 없이 찾은 콘서트.
막상 막이 오르자, 나는 1년 만에 더 단단해진 쿠잉의 공연력에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노래 실력은 물론, 공연을 이끌어가는 진행 솜씨가 일취월장해 있었다. 2시간 동안 그녀의 다양한 매력이 꽉 들어찬 무대. 배가 부르다 못해 터질 만큼 충만했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나는 오스 씨에게 소리쳤다.
“우리 내년에도 또 오자!”
“그러자, 그러자!”

방탄소년단처럼 내가 콘서트에 안 갈수록 팬들이 더 좋아하는(경쟁자 제거) 스타들도 있다. 쿠잉은 그렇지 않다. 우리 같은, 남쪽 먼 곳에서라도 달려오는 팬들이 있어야 콘서트를 계속할 수 있다. 실제로 당일에도 현장 판매분이 남아 있었다.

평생 누군가를 덕질하며 살았지만,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임하는 팬질은 처음이다.
스타를 향한 선망 대신, 왠지 안타까운 마음이 앞서는… 이런 팬심도 괜찮을까?

어찌 됐든, 새로운 덕질의 시작인 건 분명하다.
그리고 어쩐지 나쁘지 않다.


2.

김훈 작가의 산문집 《연필로 쓰기》를 읽다가 이런 대목을 발견했다.


결혼이란 오래 같이 살아서 생애를 이루는 것인데, 힘들 때도 꾸역꾸역 살아내려면 사랑보다도 연민이 더 소중한 동력이 된다. 불같은 사랑, 마그마 같은 열정은 오래 못 간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대개 이기심이 섞이게 마련이고, 뜨거운 열정은 그 안에 지겨움이 들어 있어서 쉽게 물린다.
연민은 서로를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다.
연민에는 이기심이 들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사랑이 식은 자리를 연민으로 메우면, 긴 앞날을 살아갈 수 있다.
오래 연애하다가 결혼한 부부가 성격 차이로 이혼했다는 말을 흔히 듣는다. 연애를 오래 했으면 서로 성격을 잘 알 터인데, 성격 차이로 이혼했다는 말은, 이른바 사랑이 사그라진 자리에 연민이 생겨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랑은 단거리이고 연민은 장거리이다. 빚쟁이처럼 사랑을 내놓으라고 닦달하지 말고 서로를 가엾이 여기면서 살아라.


꼭 이 글이 아니더라도, “상대가 불쌍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진짜 사랑의 시작”이라는 말을 종종 들어왔다. 작가가 말하는 연민은 ‘정’이라는 단어로도 번역된다. ‘정’이라는 말에는 어쩐지 짠한 기운이 묻어 있다.

사귄 지 10년이 다 되어가던 어느 날 아침, 오스 씨가 이런 말을 했다.

“나 어제 침대에서 울었어. 네가 먼저 자고 있었는데, 늦게 방에 들어가서 보니까… 갑자기 짠해 보여서 눈물이 막 나더라니까.”

그때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자기, 갱년긴가 봐.”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가 오스 씨의 마음이 ‘사랑’에서 ‘연민’(정)으로 넘어간 순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이후로도 그는 여러 번, 내가 자고 있는 모습을 보면 눈물이 난다고 했다.

나는?
한 번도 오스 씨의 잠든 모습을 보며 울어본 적이 없다. 대신, 입을 헤 벌린 채 자는 엽기적인 모습을 슬쩍 찍어 다음 날 “짜안!” 하고 보여준 적은 있다.

사랑이 사그라진 자리에 연민이 싹트는 거라면, 나의 사랑은 아직 식지 않은 건가 보다.

그렇게 믿기로 했다.


3.

곰은 겨울잠을 자고, 나는 여름잠을 잔다.

곤충들이 고치를 벗고 날개를 펼치는 여름이 되면, 나는 오히려 집안에 틀어박혀 하염없이 잔다.
높은 온도, 뜨거운 태양빛이 두렵다. 낮에는 가급적 움직이지 않고, 해가 져도 열대야라면 역시 나서지 않는다. 가만히 앉거나 누워서, 그저 이 숨 가쁜 더위가 하루빨리 물러가길 기다릴 뿐이다.

올여름은 특히 더 더웠다. 에어컨을 집에 들여놓은 이후 가장 오래, 자주 틀었던 여름. 사람도 만나지 않고, 운동도 하지 않고, 오로지 먹고 자기만 반복했다. 덕분에 4킬로그램이 몸에 얹혔다. 비싼 돈 주고 산 여름바지들이 하나도 맞지 않을 만큼 아랫배가 불러왔다. 그 불편함 때문에 더 나가지 않았다.

지구가 지금보다 덜 더웠던, 더 젊었던 2000년대 초에는 어땠을까.

뭐, 양상은 비슷했다.
돌이켜보면 내 연애는 여름만 되면, 별다른 이유 없이 파탄 났다. 데이트조차 하기 싫었고, 헤어진 뒤에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러 나갈 의욕이 없었다. 나는 살짝 춥게 느껴지는 가을밤에 연애를 시작해, 매미가 울기 직전에 헤어지곤 했다.
내 생애에 걸쳐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을 모두 함께 보낸 남자는 단 두 명뿐이다.

뭣도 모르고 시작한 첫남자와 지금 오스씨, 끝남자.

여름보다 더 사랑한 사람이 달랑 둘이라니, 이거 너무 슬픈데?


그렇게 싫어하는 여름인데, 나는 여름을 닮은 것들을 좋아한다.
여름 느낌 물씬나는 댄스음악, 하드보일드나 무협 같은 뜨거운 사내들의 이야기, 화끈하고 헐벗은 섹시가이.

마치 작렬하는 태양을 피해 스스로를 그늘에 가두고 살면서도, 그 열기에 반응해 거대화되는 음지식물 같다.

지구온난화로 해마다 여름은 더 뜨거워질 거라고 한다.
그렇다면 내 미래는… 그다지 밝지 않다.

역시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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