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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년기

당근 이용 정지와 타가메 겐고로

파뤌기 (2)

by 선우비

4.

당근 거래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거래 후기를 남겼다.
그런데 갑자기 “앞으로 5년간 이용 불가”라는 계정 정지 공지가 떴다.

좋은 제품을 싸게 팔아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을 막 해낸 참인데, 이게 무슨 황당한 일이지?

놀라서 재로그인을 해도 똑같이 ‘5년 정지’ 팝업만 떴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나처럼 이유 없이 정지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해킹설, AI 오류설… 하지만 길어야 한 달 정지라는 글이 대부분이었다. 5년이면 사실상 ‘영원히 하지 말라’는 말 아닌가. 짜증이 확 치밀었다.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처럼 나도 고객센터에 문의했다. 며칠 뒤 도착한 답변은 “부적절한 신체 노출 이미지 발송”이 이유라는 것.
말도 안 된다.

내가 판 건 토스터기와 구둣주걱이었다. 사진도 딱 제품 모양만 찍은 것뿐이었다. “무슨 말이냐, 증거를 보여달라”라고 다시 남겼다.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마치 AI가 복붙한 듯 지난번과 똑같았다.

그깟 당근 안 쓰면 그만이지, 하고 휴대폰을 내려놓으려다 문득 생각났다. 제품 사진을 올린 뒤 사진첩에서 지웠지만, 사진앱의 휴지통은 아직 비우지 않았다는 사실을.

휴지통을 열어 사진을 복원해 하나씩 확인하는데…
어머나.

토스터기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찍은 마지막 사진에, 내 그것(?)의 끝 부분이 살짝 나와 있었다.
아침 샤워 후 몸을 말리며 허겁지겁 찍던 중 벌어진 참사였다. 살짝 떨어져 찍은 제품의 앞, 옆 사진은 안전했지만, 위에서 찍을 때는 몸이 제품에 가까이 다가갔던 모양이다. 하필 테이블 색이 피부색과 비슷했고, 가장자리에 삐죽 보인 정도라 눈치 못 챘던 것이다.

순간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다시 살펴보니 문제의 사진이 있네요. 글을 지워주시고… 죄송합니다.”
부랴부랴 사과 메시지를 남겼다.

하…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참 모골이 송연하다.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헤드라인들.


“50대 남성,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불특정 회원들에게 성기 노출.”
“문제의 노출남, 알고 보니 중년 좋아하는 게이. 거래자도 중년 남자로 밝혀져.”
“‘그런 의도로 나에게 접근한 줄 몰랐죠. 게이인 줄 알았으면 2천 원 말고 더 깎아달라고 했을 텐데.’”


아찔하다.

앞으로는 벗고 있을 땐, 절대로, 그 어떤 사진도 찍지 않겠다.

더불어, 당근 계정이 막혔으니, 토스터기 구경하러 들어갔다가 못볼 꼴 보고 신고를 하신 최초의 발견자님께 사과를 할 방법이 없다. 이 글을 보지는 못하겠지만, 그분께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


5.

앞서 난데없이 변태로 몰려서 억울하다는 사연을 쓰고 나서 이런 얘기를 하려니 조금 머쓱하지만…
타가메 겐고로라는 일본의 게이 만화가가 있다.

일본에는 여러 게이 잡지가 있고, 그중 덩치 큰 남자들을 주로 다루는 잡지에 그의 만화가 연재됐다. 근육질, 사내다운 남자들을 정교한 데생으로 그려내는 실력 덕분에 인기가 많았지만, 내용은 대부분 BDSM이라 호불호가 꽤 갈렸다. 그냥 변태 만화가라고 호도당할 수도 있지만, 시대가 변하고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해도가 올라가서인지 그는 서구권에서는 꽤 유명한 아티스트로 인정받고 있다.

신주쿠 게이거리에 가면 게이 비디오와 각종 용품을 파는 가게가 있다. 그곳에서 타가메 겐고로 같은 게이 작가들의 만화를 판매한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변태적 상상력의 한계가 없고 금기를 과감히 깨부수는 그의 작품을 무척 좋아했다. 일본 여행 때마다 한 권씩 사 모았고, 그의 책은 읽고 나면 언제나… 힘이 쭉 빠지곤 했다.

처음 그의 책을 사들고 귀국할 때, 오스 씨가 긴장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세관에서 꺼내 보라고 하면 어떡해?”


그의 작품 세계는 게이 만화 세계에서도 마이너 중의 마이너인데, 의외로 한국 인터넷에서 그는 꽤 유명인사다. 남초커뮤니티에서 작품의 일부 컷이 밈으로 쓰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성애자 남성들로 추정되는 남초커뮤인들은 왜인지 서로를 ‘게이’라고 부르면서, 게이 만화에서 가져온 짤을 즐겨 쓴다. 신기한 인터넷 세상.

대충 이런 밈. 네이버에서 검색해도 금방 찾아진다.

그런데, 평생 게이 SM 만화 한 길만 파던 그가, 어느 날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일본 NHK에서 그의 작품을 드라마로 만든다는 뉴스였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NHK에서 타가메를??”

알고 보니, <아우의 남편>이라는 만화를 그렸더라. 캐나다에 살던 쌍둥이 동생이 어느 날 죽었고, 동생과 동성 결혼한 캐나다인이 일본으로 와서 함께 지낸다는 이야기. 설정에서 겐고로 특유의 막장이 연상되지만 EBS에서 만들어도 될 법한, 한없이 건전한 만화였다.

한국에도 번역 출판이 되어 바로 사서 읽었다. 과연, 동성애에 대해 애매모호한 입장을 가진 이들에게 선물하기 딱 좋은 내용이었다.
그가 이런 작품을 그렸다는 것도 놀랍고, 그의 전작들을 알면서도 해당 작품을 드라마로 만든 NHK도 대단했다. 작년 도쿄 퀴어 퍼레이드에서도 NHK 부스를 본 기억이 있다. 그게 진짜 공영방송이지. 한국 방송, 도대체 얼마나 뒤처져 있는 거야.

<아우의 남편>의 대성공 이후, 그는 <우리의 색채>라는 청소년의 정체성 찾기 만화도 출간했다. 완전히 양지로 나온 셈이다. 그의 하드코어 한 작품을 좋아하던 나로서는 조금 아쉬웠다.

그러던 중, 그가 서울 프라이드 엑스포에 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뭍 게이 사이트들이 소소하게 들썩였다.
나도 ‘그와의 대담’ 신청 페이지가 열리기만을 학수고대했다.

하지만 막상 날짜가 다가오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진 그의 작품에 사인을 받고 싶다.

청소년물 말고, 일본에서 사 온 찐한 게이물에 받고 싶다.

무겁고 두꺼운 그 책들을 들고 가기도 뭣하지만, 무엇보다, 그런 찐덕후 같은 모습을 행사장에 온 뭍 게이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

오스 씨는 “맘대로 해”라 했지만, 결국 포기했다.
쿠잉 콘서트를 다녀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서울을 가나. 돈도 없다! 가 결정적 이유였다.

한숨 쉬며 티켓팅을 포기하고 한 시간 뒤, 프라이드 엑스포 페이지에 들어가 봤다.
다양한 행사들이 티켓 경쟁을 하는 중에… 타가메와의 대화만 매진이었다.

한국에서도 나처럼 그를 통해 위로(?) 받았던 팬들이 이렇게나 많았구나.


아쉽지만, 이번엔 행사장을 다녀온 후기를 인터넷으로 읽는 걸로 만족해야겠다.

언젠가 또 그가 부산에라도 온다면, 그때는 그 무겁고 두꺼운 책들을 바리바리 다 싸들고 갈 것이다.
오래전에 출간되어 이미 너덜너덜해진 그 작품들을 내밀며, 꼭 말할 거다.

“선생님, 저를 이렇게 오래… 아주 오래~~~위로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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