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교 꼬막과 백운동정원

우당탕탕 남도 여행기 2

by 선우비

여름 꼬막은 역시 미완의 맛


아침 9시, 부산을 출발했다. 목적지는 강진 백운동 정원. 남해고속도로를 따라가면 되는 간단한 길이지만, 문제는 점심. 여행의 테마가 ‘남도 먹거리’인데 고속도로 휴게소 음식으로 때울 수는 없지 않은가. 벌교를 지나는데 꼬막을 그냥 지나칠 수 있나.

사실 우리에겐 벌교에 얽힌 슬픈 기억이 있다.

2007년, 오토바이 여행 때였다. 목포까지 부지런히 갔다가 돌아오는 길, 벌교 즈음에서 타이어가 펑크 났다. 무리한 장정(왕복 약 1000km)의 결과였다. 가까스로 수리점에 들어섰더니 사장님의 한마디.
“재고가 아예 없당께잉. 큰 데서 와야 쓰니께 월요일이나 돼야 올 거라잉.”

결국 무려 이틀을 벌교에서 묶여야 했다.

오토바이를 잃고 뚜벅이가 된 우리는 할 일이 없었다. 그저 끼니마다 “나가 참말로 원조랑께!”를 외치는 꼬막집을 찾아다니는 것뿐. 정확한 상호는 기억 안 나지만, 당시 인터넷 평이 제일 좋은 집이 제일 맛있었던 건 분명하다. 뚱뚱이 시절의 나(90kg 육박)조차도 다 못 먹을 만큼 꼬막 요리가 한 상 가득 차려졌고, 인사치레로 “잘 먹었습니다” 했더니 주인장이 이렇게 말했다.
“지금 여름이라 냉동 꼬막 쓰니께 맛이 덜허제. 겨울 제철 되믄 또 와잉.”

이틀 동안 꼬막만 먹다 보니 물려버렸다. 마침내 수리된 오토바이를 몰고 벌교를 벗어나기 전, 마지막 식당에서는 꼬막 대신 ‘맛’이라는 조개를 먹었다. 갯벌 체험할 때 구멍에 소금 뿌리면 쏙 튀어나오는 그 길쭉한 조개다. 그러나 냉동 조개 맛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교훈만 얻었다.

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뱃속이 싸르르…
“자기야, 나 배가…”
“어? 나도인데!”

국도 변에 실례를 할 수 없으니 다시 벌교로 돌아가 이틀간 먹었던 모든 걸 탈탈 털어냈다. 그 뒤로 벌교는 우리에게 급X의 도시가 되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찾지 않았다.

하지만 꼬막을 워낙 좋아하는 내가 벌교를 그렇게만 기억하는 건 안타까웠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기억 덧칠’을 하기로 했다. 네이버지도를 켜고 꼬막 맛집을 검색. 가장 평점이 높은 집을 찍고 갔는데… 허탕. 영업 중이라더니 문이 닫혀 있었다. 지방 소도시 맛집은 꼭 전화 확인하고 가자.

결국 리뷰 수 1위인 <정가네원조꼬막회관>으로 향했다. 기대가 컸지만, 낙지호롱은 짜고 꼬막탕수육은 퍽퍽했다. 여름 꼬막은 크기도 작고 맛도 밋밋했다. 괜히 가짓수 많은 꼬막정식 말고 꼬막비빔밥 하나만 먹자는 교훈.

급X의 기억을 좋은 기억으로 덮으려던 시도는 반쯤 실패. 예전 아지마잉 말마따나, “꼬막은 겨울에 와야제~” 가 진리였다.

그 시절 사진이 남아있었다. 사진 속 왼쪽 끝 붉은색 프리윙이 부품을 기다리고 있다.


정약용이 사랑한 풍경 속으로


우리의 첫 여행지는 강진 백운동 정원이다. 부산에서 강진읍으로 들어가기 전 만날 수 있는 곳이자, ‘강진 반값 여행’ 조건 중 하나인 “대표 관광지 인증샷”을 충족시켜 주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관광지였다.

장마가 시작될 거라며 기상청이 엄포를 놓아 우비까지 챙겨 왔는데, 당일은 전날 내린 비 덕에 하늘은 맑고 구름은 투명했다. 보기만 해도 시원한 풍경에 기분도 덩달아 가벼워졌다. 월요일이라 입구의 <백운동 전시관>은 문을 닫아 바로 ‘백운동 원림’ 표지판을 따라 들어갔다.

오후 두 시, 직사광선은 매섭게 내리 꽂혔지만, 원림에 들어서자 금세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나무들이 하늘을 가려 빛이 잘 닿지 않았고, 폭우가 남긴 개울물은 콸콸 넘쳐흘렀다. 다양한 나무와 꽃, 물길이 어우러져 시선을 붙잡았다. 어떤 꽃은 더위에 지쳐 고개를 숙였고, 어떤 꽃은 안간힘을 쓰며 마지막 꽃잎을 활짝 열고 있었다.

정원이라기보다 계곡과 숲을 품은 마을 같았다. 17세기 학자 이담로가 조성한 별서 정원, 다산 정약용이 ‘백운동 12경’을 읊었던 곳. 선비들이 누각에 앉아 차를 나누고 시를 지으며 풍류를 즐겼다는데, 나도 그 자리에 앉으면 오랫동안 막혀있던 소설의 한 대목쯤 떠올릴 수 있을까.

그러나 더위 탓이었을까, 숲을 지나 도착한 정원보다 둘레 산책로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높이 솟은 대나무 숲이 더위를 몰아내줄 것 같았다. 대나무길로 들어서니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가 사각사각 귓가를 간질였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걷다 보니 굉음을 내며 흐르는 개울이 나타났고, 몇 번 망설인 끝에 결국 발을 담갔다. 물결이 품은 냉기가 발끝부터 온몸으로 퍼지자 전신이 찌릿찌릿 살아났다.

열기를 식힌 뒤에야 본격적으로 정원을 둘러봤다. 남도 3대 정원이라는 이름값처럼 건물과 나무, 꽃과 물길이 조화로웠다. 사방이 트인 누각에 앉아 땀을 식히며, 잠시 영감을 기대했지만 조상들은 아무런 힌트도 주지 않았다.

'그래, 내 소설과 이 정원은 장르가 다르니까.'

기둥의 작은 구멍으로 말벌 한 마리가 기어드는 모습을 한참 바라보기도 했다. 시골 출신이면서도 벌레 공포증이 생긴 내게는 섬뜩한 장면이었지만, 백운동의 청명한 기운에 젖어서인지 그마저도 평화롭게 보였다.

사람이 없어서인지, 햇볕이 쏟아지는 풍경 때문인지 몸이 나른해졌다. 땀이 맺히기만 하고 흘러내리지 않는 것도 신기했다. 새로 산 손선풍기 덕인지, 원림이 가진 힘인지. 숲길을 걷다 보니 푸릇푸릇 물든 단풍잎이 눈에 띄어 가을에 다시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약용이 노래한 12경을 다 느껴보진 못했지만, 계절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줄 곳임은 분명했다. 여름엔 개울에 발을 담그고, 가을에는 단풍을, 겨울에는 눈 덮인 정원을… 사계절을 품은 그림 같은 풍경이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다.

반값 혜택이 아니더라도 강진은 충분히 찾아올 만한 곳임을 시작부터 깨닫게 되었다.


출입금지라는 말보다 이런 상냥한 표현이 좋다.


우당탕탕은 여행의 묘미


이번 여행의 제목에 ‘우당탕탕’을 붙이지 않을 수 없다. 집을 나서자마자 핸드폰을 두고 온 걸 깨닫고 되돌아갔고, 충전기에 꽂아둔 모기 기피제와 등산 스틱도 놓고 왔다. 기대에 부풀어 찾아간 꼬막 정식집은 하필 휴일. 그러나 진짜 하이라이트는 강진 읍내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예약한 호텔에 도착했는데, 예약자 명단에 내 이름이 없는 게 아닌가. 패닉 상태로 확인해 보니 날짜를 하루 늦게 잡아둔 것이었다. 지난달 서울 퀴어퍼레이드 때도 같은 실수를 저질러 허둥지둥 호텔을 잡았는데, 또라니! 이번에도 아고다 앱의 특유의 ‘요일 한 칸 밀림’ 함정에 제대로 걸린 것이었다.

다행히 결제 전이라 무료 취소가 가능했고, 평일이라 방도 넉넉했다. 새로 예약을 마치자 호텔 측에서 우리 사정을 딱하게 여겼는지 무료 업그레이드까지 해줬다. 욕조에 스타일러까지 갖춘 깨끗한 객실. <더원비즈니스호텔>, 고마워요.

우당탕탕한 여행길, 그래도 결론은 늘 해피엔딩이길 간절히 바라본다.


강진 읍내에서 마주친 방구차의 소독 현장. 수십 년만이다. 꺄~ 소리 지르며 연기 속으로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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