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십리 해수욕장 걷기, 해창막걸리

우당탕탕 남도 여행기 6

by 선우비

비와 모래, 술이 만든 남도의 하루


강진을 떠나 우리가 향한 곳은 완도군 신지면 명사십리해수욕장.
올여름 단 한 번도 해수욕장을 가지 않은 우리는, 이곳을 첫 번째 물놀이 공간으로 점찍었다.

전날 밤부터 내린 비는 많이 잦아들었지만 고금대교와 장보고대교를 건너는 동안에도 간간이 빗발을 보였다. 그런데 해수욕장에 도착하니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좋긴 좋은데 말이지… 전날까지 그렇게 뜨겁던 공기를 장마 초입을 알리는 빗줄기에 차게 식혀, 물속에 들어갈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장을 즐길 방법이 있다. 바로 맨발 걷기.
이름처럼 ‘밝고 고운 모래’가 발가락 사이를 부드럽게 훑고 지나가는 감촉이 기가 막혔다. 그동안 맨발 걷기 한답시고 전국의 모래사장을 숱하게 섭렵했지만 이보다 완벽한 곳은 없었다. 엄지 척! 게다가 백사장이 얼마나 깨끗하던지. 이런 청결이 마을 사람들의 부지런한 손길 덕분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그래서 나는 해수욕장을 터전 삼아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바가지 운운하는 여론에 쉽게 휩쓸리지 않는다.

한참 걷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숨을 데라고는 없는 넓은 백사장에서, 뛰어 돌아가기도 이미 늦었다. 비에 젖으면 머리카락이 다 빠진다는 유사과학을 철석같이 믿는 오스씨조차, 결국 빗속을 느긋하게 걸었다. 그만큼 매력적인 해변이었다.

이왕 젖은 김에 그대로 바닷물에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여전히 추웠다.
작년 선유도에서 5일 머물 때도 뻑하면 비가 오더니, 부산만 벗어나면 왜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건지. 우리의 여름 여행과 해수욕은, 참 궁합이 안 맞는다.

아쉬운 마음으로 명사십리를 떠나 완도읍에 잠깐 들러 전복빵을 하나 사 먹고, 다음 목적지가 있는 해남으로 길을 잡았다. 완도는 다음 기회에 제대로 즐기기로.

수영복을 입은 채로 맨발걷기. 젖은 모래가 발에 닿는 느낌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쫀쫀하다.

원래 계획은 두륜산 케이블카를 먼저 타고 대흥사로 가는 것이었지만, 비는 멈출 줄 몰랐다. 결국 순서를 바꿔 대흥사로 향했다.

푸소 주인아주머니에게 추천받은 ‘호남식당’에서 버섯탕으로 점심을 먹고, 우산을 쓴 채 ‘물소리길’로 들어섰다. 계곡을 따라 난 길 양옆으로는 커다란 단풍나무가 늘어서 있었다. 단풍철이면 얼마나 화려할까, 상상만으로도 멋졌다.

대흥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한국의 대표 선찰이다. 신라 말에 창건되어 천 년 넘는 역사를 지녔고, 특히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이끈 서산대사가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하다.

물소리길이 끝나자 곧바로 일주문이 나타나고, 한옥호텔을 지나 백화당을 스쳐 가면 가람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먼저 대웅전에 들러 절을 올리고, 전각들을 천천히 돌아본다. 오스씨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사찰에 오면 전각마다 들러 부처님께 절을 올렸었다. 그 간절한 마음도 3년이 지나자 점차 옅어지더라. 어머니는 이미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야, 생각하니 불상을 봐도 시큰둥하다. 아, 간사한 인간의 마음. 뭐, 기복신앙으로 정착한 불교 탓이려니…

사찰을 다 둘러보고, 한옥 호텔에서 운영하는 찻집에 들어가 세작을 시켰다. 노트를 꺼내 그동안 밀린 여행기를 쓰려했지만, 이상하게도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사실 이번 여행 내내 그랬다. 책을 읽다가도 어느새 손이 핸드폰으로 향한다. 소셜미디어 앱을 열고, 쓸모없는 정보들 사이를 기웃거린다.

“아예 핸드폰이 없어야 돼!”
번뜩 정신을 차리고 책을 다시 집으며 중얼거렸다. 나중에 이 말이 씨가 되어 참혹한 결과를 빚을 줄, 이때는 정말 몰랐다.
“그러게, 걱정된다.”
오스씨의 한마디. 하지만 본인도 내 걱정할 처지는 아니다. 시간만 나면 폰게임을 하고 있다.

“템플스테이 하면서 핸드폰 중독에서 벗어나볼까?”
슬쩍 떠봤지만, 예상대로 돌아온 답은 고개 젓기.
“절밥엔 꼭 김치가 나오잖아. 발우공양할 때 음식 남기면 안 되잖아.”
아휴, 이 토착 왜구!

* 오스씨는 한식 반찬을 싫어해서 입도 안 대지만, 비슷한 음식을 가이세키 요리처럼 예쁘게 차려내면 또 잘 먹는다. 특히 한식 재료의 투탑인 배추와 무를 증오하고, 김치는 종류를 불문하고 냄새조차 싫어한다. 최애 음식은 우동과 소바다.(겨우 이 정도로 토착 왜구를 참칭 하다니…. 진짜 토착 왜구들께는 죄송)


비는 멈추지 않았고, 결국 케이블카는 포기했다. 이제 마지막 목적지. 해남 여행의 하이라이트, ‘해창막걸리’ 본사로 간다.

해창막걸리는 100년 전통의 양조장에서 빚어지는 막걸리로, 다른 막걸리보다 알코올 도수가 높고(대표적으로 9도·12도), 걸쭉하고 깊은 맛으로 유명하다. 특히 ‘막걸리의 롤스로이스’라는 별명을 가진 프리미엄 18도 제품까지 있다. 막걸리는 좋아하는 수영구 퀴어모임 친구들이 입이 마르게 칭찬하던 술!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시음을 권유한다.

“9도로? 12도로?”
당연히 공짜라면, 조금이라도 비싼 12도다!

막 입에 넣자 요거트 같은 질감에 상큼함이 번졌다. 역시는 역시랄까, 한 모금에 마음을 빼앗겼다. 곧바로 수영구 모임 아지트로 보낼 세트를 주문했다. 9도 3병, 12도 3병. 그리고 우리 몫으로 12도 한 병. 술을 담을 보냉백도 샀는데, 마당에 주차된 오래된 베이지색 롤스로이스가 프린트된 디자인이 마음에 쏙 들었다.

소문대로 정원도 근사했다. 작지만 정갈한 일본식 정원에 한국식 석물이 섞여, 이국적이면서도 친근한 느낌. 특히 700년 수령의 백일홍이 압도적인 자태를 뽐냈다.

본사 건물 전체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우리는 오래됐습니다. 장인입니다.”
이런 우아한 전통주 마케팅, 너무나 멋지다. 병을 따기도 전에 이미 그 멋에 취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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