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정보:
9월 24일, 수요일. 전시 하루 전날.
선선해진 날씨에 오토바이 타는 맛이 제법 좋다. 비 예보가 있었지만 굳이 오토바이를 타고 전시 장소인 게이바 '클로즈'로 향했다. 왠지 오토바이가 필요해질 것 같은 예감.
도착하니 이미 모리와 태오가 전시 작업에 한창이었다.
일전에 우리 전시에 조언을 많이 해주셨던 '작가님'이 오늘도 함께 해주셨다. 다른 전시 공간인 게이바 '1988 라운지'에서 사진 배치 등을 이미 도와주셨다고. 현역 작가이신데도, 우리 전시에 이렇게 시간을 내주시는 게 참 감사하다. 돈 많이 벌어서 언젠가 그분 작품을 사고 싶은데, 제발 이번 생에 그 꿈을 이룰 수 있길...
전시가 열릴 클로즈의 다크룸은 가게 비품이 모두 치워져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이번 사업을 시작하자고 먼저 말 꺼낸 건 나지만, 몸 고생은 사장님들과 젊은 친구들 몫이다. 미안하고, 고맙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가지고 간 황남빵 기증!
이번 전시는 두 명의 사진작가가 각자의 방식으로 담은 범일동을 두 공간에 나누어 전시한다. 마르스는 필름카메라로, 태오는 디지털카메라로 작업했다. 흑백사진으로 구성된 태오의 작업은 붉은 벽과 너무 잘 어울려서 '클로즈'에 전시하기로 했다.
원래는 ‘악당’에서 전시를 하려 했다. '악당/(구) 루팡' 자리가 범일동에서 가지는 상징성과 나의 각별한 애정 때문이었다. 다행히 악당 사장님도 흔쾌히 공간을 내어주셨다. 그렇게 일을 진행하려다가, 마르스와 함께 클로즈에 놀러 온 날, 그 다크룸에 완전히 사로잡혀버렸다.
붉은 벽의 강렬함, 벽의 좁은 간격이 주는 밀도감. 이건 그냥 전시 공간이 아니라 작품과 면대면으로 호흡을 맞추는 내밀한 극장 같았다.
사장님께 전시를 하고 싶다고 조심스레 말씀드렸는데, 흔쾌히 허락해 주셨을 뿐 아니라 너무 좋아해 주셨다.
사진은 조각접착제로 큰 것부터 하나씩 부착. 전시 공간의 특성과 관람 동선을 계속 고려해 가며 사진을 재배열하는 태오의 모습은 정말 멋졌다. 평상시엔 그냥 아기 같은데, 일에 집중하는 모습에서 프로페셔널한 분위기가 물씬.
조명은 다이소표 캠핑용 알전구를 설치했다. 다크룸의 분위기에 딱 어울렸다. 어쩐지 영화 <화양연화>의 한 장면처럼.
그런데 건전지가 모자랐다.
“누가 다이소 좀 다녀와주면 좋겠는데요…”
역시 오토바이가 필요할 거 같더라니! 건전지를 사 오고 나니 이번엔 전구가 더 필요하단다. 또다시 출격. 인근 다이소들을 돌아다니며 싹쓸이.
아이들이 계속 몸을 움직이는 동안 나는 클로즈 사장님과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다. 살아가는 이야기, 노후 이야기. 우리 둘 다 나이가 있으니까.
“오랫동안 이 가게 해주시면 좋겠어요. 진짜 좋은 공간이에요.”
인사치레 섞인 말에 사장님이 웃으시며 말씀하신다.
“빨리 돈 벌어서 육십 되면 놀고 싶어요.”
우리 또래 대한민국 남자들이면 한 번쯤 꿈꾸는 파이어족의 로망. 하지만 지금의 애인과의 나이 차이를 생각하면, 그것도 쉽지 않겠지.
“그냥 희망사항인 거죠.”
그렇게 웃는 얼굴이, 요즘 정년을 앞두고 안달복달하는 오스씨랑 겹쳐 보였다.
잠깐 상상해 봤다.
‘내가 게이바를 운영한다면 어떨까?’
지맨 형님처럼 다양한 손님들과의 수다를 즐기며 오래 해나갈 수 있을까, 아니면 가끔 등장하는 진상 손님 때문에 지쳐 하루라도 빨리 손 털고 싶어 질까?
홍예당 일을 곁에서 지켜보며 빛만큼 그림자도 종종 만나게 된다. 다행히도 좋은 사람들이 훨씬 많아서, 어둠이 그리 무겁게 느껴지진 않는다. 현장 1선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좋은 면만 취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게이바나 홍예당이나 결국 게이(퀴어)들을 위한 공동체 공간이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울타리를 만들어주고, 유흥과 위로를 제공한다는 점에서도 닮았다.
"얼추 다 된 거 같아요."
아이들이 전구 작업을 마치고 돌아왔다.
전시 작업이 끝날 즈음, 공간이 딱 완성되었을 때의 기분은 말로 다 하기 힘든 뿌듯함이 있다. 장소와 사진, 조명과 분위기가 정말 잘 어우러졌다. 솔직히 말하면 장소가 반은 먹고 들어갔다.
클로즈 사장님,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클로즈 전시 작업을 마치고 우리는 '1988 라운지'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사장님의 정성이 느껴졌다. 전시 준비를 위해 가게를 정리해 두셨고, 인테리어의 한 축을 이루던 술병탑을 모두 정리한 후, 술 병 하나하나에 물을 채워 가게 밖에 다시 진열해 두셨다.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어가는 일인데... 평소 1988 라운지의 깨끗하고 상큼한 이미지가 괜히 만들어진 게 아니구나 싶었다.
사장님은 조명 설치에도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셨고, 결과적으로 1988 라운지만의 색깔이 더욱 또렷하게 살아났다.
그렇게 해서 마치 서로 다른 계절을 가진 공간처럼, 대조되며 조화를 이루는 전시가 완성됐다.
클로즈는 거칠고 날 것의 이미지를 기반으로 재개발의 상처를 보여주고,
1988 라운지는 따뜻한 유대와 게이 공동체의 아늑함이 느껴진다.
마르스는 퇴근하자마자 달려와 자신만의 감각으로 셀카존을 다시 정돈했다. 역시, 듬직하다.
모든 걸 마치고 보니 어느덧 밤 8시.
마침내 전시 준비팀이 모두 모여 고깃집으로 갔다. 하루 종일 몸을 움직인 아이들은 거의 흡입 수준으로 고기를 먹었다.
고생 많았다.
그리고, <일동졸업> 전시 첫날이다.
원래는 모리가 전시장을 지키기로 했지만, 뭔가를 가지러 간 사이 내가 잠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밖엔 하필 비가 오고, 이 거리는 원래 낮엔 사람도 별로 없다.
나 혼자 한 시간째.
게이바 안엔 재즈 음악이 흐르고, 나는 조용히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찍고, 노트를 펴고, 연필을 쥐고 이 글을 쓰고 있다.
손님이 오지 않는 가게에 앉아 있는 주인의 마음이 살짝 이해가 되려는 찰나.
가게 문이 딸랑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온다.
<일동졸업>, 드디어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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