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특집 단편극장 1
* 연휴 동안, 세기말 PC통신과 인터넷 초창기 동성애자 커뮤니티를 배경으로 한 오래 묵혀둔 초단편소설 5편을 공개합니다. 당시의 공기와 낯선 설렘을 함께 느껴보세요. 즐거운 한가위 보내세요!
1. 엘(L)로부터
휴대폰이 또 울렸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호수야, 나 엘이다. 큰일 났다.”
“뭔데요.”
“제이하고 케이, 드디어 헤어졌대.”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엘 형의 말투는 흥분으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누가 물어봤어요, 형한테?”
“아니 그냥… 그렇다길래 알려주려고.”
엘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목소리를 낮췄다.
“근데 왜 헤어졌는지 아니?”
“형, 그만 얘기해요.”
“아냐, 잠깐만 들어봐. 오늘 내가 새로운 사실을 들었거든. 나 처음엔 제이만 바람피운 줄 알았어. 근데 알고 보니 케이가 먼저 피랑 잤다지 뭐냐. 하여간 케이 그 애는 처음 봤을 때부터 벅차 보였어! 그것도 모르고 사람들은 애꿎은 제이만 탓하는 거 있지. 제이만 불쌍하지 뭐냐!”
나는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을 줬다. 엘의 말소리가 귓속에서 멀리 울렸다.
“형. 지금 제이와 바람피운 사람이 난 거 알고 전화한 거죠?”
잠시 정적이 흘렀다.
“커플 깨진 얘기가 그렇게 재밌어요?”
오늘만 벌써 다섯 번째 전화였다. 어제는 열 통. 이제 두 명만 더 오면, 이 모임 구성원 전부가 내게 연락한 셈이다.
2. 와이(Y)로부터
또 벨소리가 서늘하게 울렸다.
“호수야, 나 와이 형이다.”
“……또요?”
“할 말이 남았다.”
“형, 전 할 말 없어요. 어제 다 얘기했잖아요.”
“야, 너 정말 나쁜 놈이다. 세상에 할 짓이 없어도 그렇지, 애인 있는 사람을 꼬드기냐?”
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
“너, 형이 말하는데 왜 웃어!”
“형은요? 저랑 같이 안 잤어요?”
나는 목소리를 낮췄다.
“우리가 그날 한 건, 도덕적으로 아주 훌륭했나 보죠?”
전화기 너머로 숨이 턱 막히는 소리가 들렸다.
“형, 혼자 도덕군자인 척하지 말고 전화 끊어요. 그리고 충고할 시간 있으면, 형이나 제대로 살아요.”
뚝, 하고 전화가 끊겼다.
나는 차가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와이 형이 제이의 상대가 나였다는 사실을 늦게 알고는 다시 전화를 해온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애인 될 것처럼 말해 유혹해서 하룻밤 잔 후에, 입 싹 씻고 형 동생하자고 말한 주제에 나를 훈계한다니…
세상 참 우습다.
3. 제이(J)에게
핸드폰에 저장된 전화번호를 꾹꾹 눌렀다.
“제이 형, 저예요.”
“호수구나. 밥은 먹었어?”
“네. 형은요?”
“아직. 모임 애들한테서 전화 많이 왔지?”
나는 피식 웃었다.
“아파 죽는다고 해도 이렇게 전화 안 왔을걸요.”
“그래. 원래 사람이란 게 다 그렇지. 자기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스캔들이거든.”
그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많이 힘들지?”
“각오한 일이에요.”
나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근데 형, 케이한테는 전화해 줬어요?”
“아직. 사실… 용기가 안 나.”
“형이 왜요? 잘못한 건 케이잖아요. 일은 케이가 먼저 저질렀잖아요.”
“그렇긴 한데… 그래도 내가 죄진 기분이야.”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화가 나지만…”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아마 그 인간 지금쯤 속으로 좋아 죽을걸요. 겉으론 사람들한테 위로 전화받으며 불쌍한 척하겠죠.”
“그러지 마. 어쨌든 내가 먼저 끝내자고 한 거니까.”
“끝내자고 말하기 전에, 케이는 바람피운 걸 자랑처럼 떠들었잖아요. 그럼 끝내자고 하지, 그럼 울고불고 매달려요?”
“그래. 알았어. 왜 네가 더 흥분하고 그러냐?”
“생각할수록 분통 터지잖아요. 재미는 걔가 다 보고, 욕은 우리가 다 먹으니까.”
“그만해라. 소문이야 시간이 지나면 잊히겠지. 중요한 건 우리 마음 아니겠니?”
나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네. 미안해요. 형이 더 힘들 텐데…”
“아니야. 따지고 보면 너도 피해자야. 괜히 나랑 케이 사이에 끼어서… 네가 더 힘들지.”
그의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그 다정함이 나를 더 아프게 했다.
“우리 퇴근하고 만날까?”
“좋아요. 힘든 하루였는데 어디 가서 술이나 한 잔 해요.”
“그럼 7시에 이태원 젝스에서 보자.”
“그래요.”
며칠 전, 우리 셋은 술을 마셨다. 좁은 테이블 위에 잔들이 엉망으로 흩어졌다. 케이는 술에 취해, 자기가 바람피운 얘기를 자랑처럼 떠들었다. 제이 형은 상대가 누구인지 묻지도 않았다. 그저 잔을 놓고, 아주 조용하게 말했다.
“이제 그만하자.”
케이는 적반하장으로 소리쳤다.
“당신, 나보다 호수를 더 사랑했지! 그러면서 왜 나랑 사귀자고 했어?”
그리고는 날카롭게 덧붙였다.
“마음에도 없는 말 하지 말고, 호수한테나 가버려!”
그 순간까지 가만있던 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제이 형, 저… 형 좋아해요. 예전부터.”
그리고 모든 게 산산이 부서졌다.
그날 이후 케이는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제이형과 내가 옛날부터 좋아하는 사이었으면서 자신을 물 먹여 왔다고, 그동안 그것도 모르고 속고 살아온 시간이 억울하다며 하소연하고 다녔다.
4. 피(P)로부터
“여보세요?”
“나다.”
“형이 웬일이야.”
“소문 들었다.”
“그 얘기라면 그만해요.”
“그래. 전화 많이 받았겠지. 다들 같은 모임 사람들이니까. 근데… 난 걔네 둘 깨진 거, 하나도 안 아쉽다. 처음부터 안 될 사이였거든.”
“형,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뭔데?”
“케이랑 잔 사람, 형 맞죠?”
침묵이 흘렀다.
“…….”
“왜 저한테 전화했어요?”
“호수야. 너 정말 제이랑 사귈 거야?”
“네. 그럴 거예요. 왜요? 내가 제이 형이랑 사귀면 형한테 뭐 손해를 끼치나요?”
“말을 왜 그렇게 하니? 난 그냥… 네가 안 좋은 소문의 중심이 되니까 걱정돼서…”
“형, 저 바보 아니에요. 엘한테서 다 들었어요. 케이가 형에게 매달린다면서요? 형은 그냥 심심풀이로 잤을 뿐인데, 이렇게 꼬일 줄은 몰랐죠?”
“…….”
“ 형이 귀찮다고 내 사랑까지 방해하면 되겠어요?”
“……미안하다.”
“미안하면 이만 끊어요.”
뚝, 통화가 끝났다.
마치 전투를 치른 뒤 같다. 세상의 모든 도덕군자들이 알고 보니 모두 우리 모임에 있었나 보다. 어차피 모임은 쫑 났고, 이제 다시는, 서로 얼굴 맞댈 일도 없을 것이다.
이제 남은 건 한 사람뿐이다. 용진이 형.
모임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는 그에게 끌렸다. 하지만 ‘우유부단함의 극치’라 불리며, 자기 마음 하나 솔직히 드러내지 못하는 인간이 그였다. 그런데도… 아니, 그래서 더 간절히 바라는 내 마음이 답답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 형이 먼저 나에게 전화를 걸어올 리는 없겠지.
5. 케이(K)로부터
휴대폰이 울렸다. 이름을 확인한 순간, 가슴이 싸늘해졌다.
“나야, 케이.”
“…….”
“왜 아무 말도 안 해?”
“전화 왜 했어?”
“친구끼리 전화도 못 해?”
“너 같은 친구 둔 적 없어.”
“호수야, 왜 네가 화를 내? 열받을 사람은 난데?”
나는 차갑게 웃었다.
“네가 뭐가 열받아? 어차피 제이 형이랑 헤어지려고 했잖아. 내 덕분에 욕 안 먹고 끝났으면 됐지, 고마워해야지.”
“넌 내가 바람피워서 제이랑 헤어진 줄 알아?”
케이가 낮게 웃었다.
“멍청한 호수. 제이 형은 예전부터… 아니, 처음부터 너만 봤어. 모임에서도 늘 네 쪽만 바라봤잖아. 그걸 내가 몰랐겠니? 난 그걸 견디다 못해 바람피운 거야.”
“…….”
“근데 너는 용진이 형만 쳐다봤지. 제이형에게는 관심도 없었잖아.”
나는 숨을 깊게 삼켰다.
“고작 그런 얘기 늘어놓으려고 전화했니?”
“호수야, 제이 형은 착한 사람이야. 넌 그 사람 실망시키지 마.”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해.”
뚝, 나는 전화를 끊었다.
케이와는 동갑이고 처음에는 모임에서 매우 친했었다. 하지만 이제 우린 더 이상 친구도 뭐도 아니다. 케이는 제이형과 사귀기 전, 한번 용진이 형과 잔 적이 있다. 모임 뒤풀이에서 용진이 형이 술에 취해 떨어지자, 케이가 그를 자기 집에 데려가서 재우겠다고 나섰다. 그리고 며칠 후 나에게 용진이 형과 잔 얘기를 자랑스레 들려주었다.
“호수야, 그 형 생각보다 몸 좋더라.”
그 이후로 난 케이를 더 이상 친구로 여기지 않게 됐다. 겉으로는 아무리 친한 척을 해도, 모임에서 만날 때마다 반갑다는 듯이 인사를 나눠도, 제이형을 사귀게 되고 은근한 자랑을 늘어놓는 것을 웃으며 바라봐주곤 했어도, 케이는 내 친구가 아니었다.
더 이상은.
6. 용진이 형으로부터
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하자마자 손끝이 떨렸다.
“여보세요?”
“호수니? 나다. 용진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형이 웬일이세요?”
“그냥… 뭐 하나 싶어서.”
“형은 원래 저에게 전화 같은 거 안 하는 사람이잖아요. 소문 듣고 저한테 잔소리하려고 전화한 거죠?”
“호수야.”
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너 정말 제이를 사랑하니?”
나는 말문이 막혔다.
“대답해 봐.”
“…….”
“네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어. 혹시 충동적으로 그런 선택을 한 게 아닌가 싶어서.”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형… 그게 무슨 의미예요?”
“네가 진짜 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게 더 중요한 거잖아.”
나는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형, 저 원하는 사람 있어요. 정말로…”
전화기 너머로 길게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알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내가 조금만 더 용기 있었더라면, 널 이렇게 힘들게 하지 않았을 텐데.”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울면서도 웃었다.
“형…”
“일단 만나서 얘기하자. 이따 7시에 종로에서 보자.”
“네. 갈게요.”
전화를 끊자마자 나는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야호.
드디어 용진이 형에게서 사랑 고백을 받았다. 오랫동안 기다린 순간이,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다니.
재훈의 말이 옳았다.
‘그 형을 흔들고 싶다면, 질투심을 이용해.’
안 하려고 했다. 하지만 케이의 말에 화가 나서 나도 모르게 제이 형을 도구로 삼아버렸다. 사람들의 비난 전화가 몰려오던 그 순간조차, 용진이 형이 내게 반응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늘 모임에만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던 사람이니까. 누구보다 평판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야. 인생은 정말이지 예측 불가였다. 그리하여 생은 의미...
이제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승자는 나다. 제이 형에게는 미안하지만, 사랑은 어떤 장벽도 넘어서 쟁취해야 하는 것이다.
“종로야, 기다려. 내가 간다!”
후후.
세상은, 이렇게도 아름답다.
7. 마지막 통화
“용진이 형, 저 제이예요.”
“그래, 제이야.”
“호수는요?”
“제이야. 호수는 그만 잊어라. 걔 아마 이태원 젝스엔 안 나타날 거다. 너도 알잖아. 마음이 다른 데 있으면 몸만 붙잡고 있어도 소용없다는 거.”
“…….”
“상처는 좀 되겠지만 곧 잊힐 거다. 작은 소모임이란 것이 원래 이렇게 물고 물리는 관계에서 못 벗어나는 거고, 너처럼 여린 애는 거기서 늘 상처만 받게 돼 있어.”
“네…….”
“내가 다시는 상처받지 않게 해 줄게.”
“좋아요. 형. 이젠 더 이상 시시한 감정다툼에 휘둘리는 일 없을 거예요. 한참 늦었지만 형의 프러포즈 받아들일게요.”
“고맙다. 그럼 이따가 너희 회사 앞에서 보자.”
글쎄, 사랑은 쟁취하는 거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