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스씨도 함께 전시장에 있었다.
그날은 단순히 전시회에 대해 설명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창원에서 올라온 30대 게이 한 분이 다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나이 든 아저씨 게이를 보면 꼭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다며, 결혼 압박이나 커밍아웃 같은 고민들을 진지하게 털어놓았다. 들어보니 내가 정확히 그 나이 때 겪었던 것들이었다. 내 과거와 그 시절 품었던 희망을 떠올리며 몇 마디 건넨 뒤, 마이크를 오스씨에게 넘겼다. 두 사람은 한참을 마주 보고 이야기했다.
‘나이 든 게이가 젊은 게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새삼 고민해 보게 된 순간이었다. 홍예당에서 꼭 이와 관련된 프로그램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영구모임에서 자주 마주치는 레즈비언 친구들도 전시장을 찾아주었고, 성민 커플은 “축일동졸업”이라는 리본이 달린 꽃바구니를 안겨주었다. 폴님도 잊지 않고 참석해 자리를 따뜻하게 밝혀주셨다.
전시장 한편에 마련해 둔 방명록에는 감동적인 후기들이 빼곡하게 쌓여갔다. 그중 한 편을 소개한다.
"20대 중반까지 은둔으로 지내다가, 몇 달 전 첫 범일 데뷔한 게 생각나네요.
그렇게 이쪽 활동하면서 차츰 알아갈 때 즈음, 범일동의 '졸업' 소식을 처음 들었습니다.
부산에서 이제 막 이쪽 세계에 대해서 알게 되었는데, 사라진다?!
참으로 아쉽고 안타까운 감정이 듭니다.
하지만 일동을 다니며 마치 집 같은 편안한 첫 느낌은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저는 과거의 범일동을 알지 못하지만, 이번 전시로 조금이나마 과거를 경험해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있구나. 나는 혼자가 아니구나. 저를 위로해 주고 격려해 준 범일동은 저의 가슴에 영원히 남을 것 같습니다.
이번 '범일 졸업‘은 단순히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 되길 바랍니다.
좋은 전시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전시회의 마지막 날, 우리는 전시의 이름 그대로 “일동졸업식”을 열기로 했다.
책에 인터뷰로 참여해 주신 게이바 사장님들을 전시장으로 초대해, 우리끼리 소박하면서도 귀엽고 의미 있는 졸업식을 해보자는 취지였다.
총 9분과 인터뷰를 했고, 개인 사정으로 참석이 어려운 분들을 제외하고 6명의 사장님이 친구, 가게 종업원과 함께 자리해 주셨다. 사회는 성우로도 활약 중인 목소리 좋은 휴고가 맡아주었다.
‘교장선생님 훈화말씀’을 패러디한 순서에서는, 가장 연장자이신 오스씨가 “일동졸업에 부쳐”라는 제목으로 ‘좋은 말씀’을 낭독했다.
"제가 범일동을 처음 찾게 된 건, 90년대 후반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부산에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 많지 않았습니다....(중략)... 오늘 이 자리는 단순한 작별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지켜온 역사를 기념하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벌써 많은 가게들이 떠났지만, 우리가 남기는 이야기와 기억은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또 어딘가에서 우리는 새로운 아름다운 추억들을 쌓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부산 게이 커뮤니티의 소통 창구가 되어준 사장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상장과 꽃다발을 전달했다.
상의 이름은 “무지개 안식처 상”
상장에 적힌 문구는 다음과 같다:
"귀하는 오랜 시간 OO을 운영하시며 많은 이들에게 따뜻한 쉼터와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셨습니다. 험한 세상 속에서도 변함없이 문을 열어 우리를 맞아주신 마음에 깊이 감사드리며, 그 자리를 지켜주신 수고와 애정에 존경을 표합니다. 함께 걸어갈 오늘과 매일을 응원하며, 깊은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이 상을 드립니다."
사장님들은 쑥스러워하면서도 기쁨을 감추지 못하셨다.
"나 학교에서 상 받은 이래로 40년 만에 처음으로 상 받아봤어."
살짝 물기가 맺힌 눈으로 웃으시던 그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괜히 나까지 뿌듯해졌다.
식을 마친 뒤, 자유로운 대화의 시간이 이어졌다.
"범일동에 장사하는 사람으로 며칠이지만 주인공이 된 기분이어서 좋았어요. 사실 (재개발 때문에) 이전 가게를 접고 나서 기분이 안 좋았거든요. 이런 자리가 마련돼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고 추억을 그리게 되었어요. 주최해 주신 분들께 너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사장님들끼리는 다들 친분이 있으실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이날 처음 만나는 분들도 계셨다.
서로 새로 옮겨갈 지역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고, “우리 가게 옆으로 와요~” 하는 유쾌한 말도 오갔다. 낯선 자리에서 시작된 인연들이 천천히 이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인터뷰 때 여러 사장님들이 말씀하셨던 “범일동 사장님들 간의 네트워크가 생겼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정말로 조금씩 실현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이런 만남은 우리 같은 문화단체에게도 소중한 경험이었다.
일방적으로 무언가를 ‘주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주고받으며 자부심을 나누는 자리. 이런 행사가 앞으로도 계속되길 바라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모든 순서가 끝난 뒤, 우리는 함께 단체사진을 찍었다.
게이바를 30년 넘게 다녔지만, 사장님들과 사진을 함께 찍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이번 졸업식은 내게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작고 깊은 감동의 순간이 되었다.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오스씨와 함께 소파에 쓰러져 그대로 잠들었다.
무언가를 다 마쳤다는 해방감에 온몸이 스르르 풀려버린 것 같았다.
깨어나 휴대폰을 확인하니, 모리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사장님들이 추석에 고향 오는 게이들을 위해 전시를 연장하자고 하셨어요.”
전시는 추석이 끝날 때까지, 10월 8일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추석 연휴에 부산 범일동을 찾는 분이라면, 한 번쯤 전시장에 들러보시길.
사라져 가는 골목 어딘가에서, 우리의 기억은 아직도 따뜻하게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