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위의 작은 소동들

은퇴했으니 일단 스키부터 2

by 선우비

1월 12일, 월요일, 용평


오후 두 시쯤 용평 타워콘도에 도착했다.

웰리힐리와 달리 지하주차장은 한산했다. 주중이라 그런 듯했다. 만 원을 더 내고 얼리 체크인을 했다. 한 달 동안 머물 첫 거점이니 조금 일찍 들어가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타워콘도에서 레드 리프트까지는 실내로 이어져 있다. 그래도 방에서 슬로프까지는 생각보다 멀었다. 스키를 어깨에 메고 복도를 지나고, 다시 건물을 건너야 했다. 시즌 락커는 이미 판매가 끝나 있었다. 슬로프로 나갈 때마다 스키를 들고 이동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조금 번거롭지만, 일단은 감수하기로 했다. 한 달이면 이런 동선도 익숙해질 것이다.

저녁 무렵 첫 용평 스키를 탔다.

X5권은 손바닥 인증만 하면 됐다. 카드보다 훨씬 간단했다. 메가그린에서 몸을 풀고 핑크와 골드를 차례로 탔다.

메가그린에서는 인공눈이 바람을 타고 얼굴에 붙었다. 잘게 부서진 눈 알갱이가 바이저에 부딪혔다. 성가신 눈발이었지만 그래도 반가웠다.

첫 용평 설원이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작은 사고가 있었다.

체크인센터 앞 대리석 바닥에서 오스씨가 발을 헛디뎠다. 스키를 들고 부츠를 신은 채 걷다가 중심을 잃고 그대로 넘어졌다. 투숙객들이 스키를 들고 지나는 길인데도 미끄럼 방지 매트가 없었다.

방으로 돌아와 허리에 파스를 붙여주었다.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마음이 철렁했다.

이 나이에 낙상은 농담이 아니다.

밤이 되자 중앙난방의 열기가 방을 가득 채웠다. 온도를 낮춰도 쉽게 내려가지 않았다. 결국 창문을 조금 열어 두었다. 영하의 공기가 들어오는데도 방 안은 여전히 따뜻했다.

넷플릭스에서 <기묘한 이야기>를 틀었다.

낮 동안의 작은 사건들이 화면 속 이야기와 뒤섞이며 천천히 가라앉았다.

이제 정말 한 달이 시작되고 있었다.


1월 13일, 화요일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오스씨 허리를 살폈다. 다행히 괜찮아 보였다.

식빵을 굽고 계란을 부쳤다. 좁은 숙소에 딸린 작은 주방에서 만드는 아침은 모든 게 빨라진다. 같은 일을 해도 집에서 할 때와는 다른 리듬이 생긴다. 그런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가 우리가 여행 중이라는 사실을 새삼 알려준다.

설거지를 하다가 또 그 냄새를 맡았다.

노른자가 묻었던 그릇에서 올라오는 비린내였다. 세제로 씻어도, 마르고 나면 다시 스며 나온다. 집에서도 가끔 그랬다. 이유를 찾아보려고 인터넷을 뒤져봤지만 명확한 설명은 없었다.

한때 계란은 가장 좋아하던 식재료였다. 요즘은 자연스럽게 손이 덜 간다.

이렇게 하나씩 멀어지는 것들이 있다. 어느 순간부터 그런 멀어짐이 더 익숙한 세계로 들어온 것 같다.


스키장에는 바람이 불고 있었다.

커뮤니티를 보니 며칠 전부터 바람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일단 슬로프로 나가 보기로 했다. 새로 산 콜마 스키복은 두툼해서 웬만한 추위쯤은 막아줄 것 같았다.

하지만 바람은 다른 종류의 날씨였다. 옷은 바람을 막을 수 있어도 마음까지 막아주지는 못한다.

바이저 헬멧과 바라클라바로 얼굴을 가리면 냉기는 막을 수 있다. 대신 안경 안쪽에 습기가 차오른다. 시야가 흐려지고 턴이 조심스러워진다.

결국 두 시간을 채우지 못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점심으로 부대찌개 레토르트를 끓여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글쓰기 도구를 챙겨 횡계 읍내 카페 ‘7 헌드레드’로 갔다.

가는 길에 ‘수미제과’에 들러 감자빵과 고구마빵을 샀다. 예전에는 일부러 찾아오던 빵집이었다. 이번에는 그만큼의 감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최근 부산 남천동 빵들이 도파민의 기준을 너무 높여버린 탓일 것이다.

카페에서 두 시간 정도 글을 썼다.

돌아오는 길에 J마트에 들러 고기와 채소를 샀다. 돼지고기 앞다리살을 소고기 양념에 재워 두었다.

저녁에는 넷플릭스에서 <기묘한 이야기> 마지막 화를 봤다.

7화에서 윌이 커밍아웃하던 장면이 오래 남았다면, 8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거의 모든 장면이 클라이맥스였다. 특히 마지막 장면이 좋았다. 이야기를 그렇게 닫을 수도 있구나 싶었다.

언젠가 내 소설도 저렇게 매듭지을 수 있으면 좋겠다.

재워둔 고기는 기대만큼 맛있지는 않았다. 잔와인을 곁들여 천천히 먹었다.


이번 여행을 준비하며 용평 기반 게이 스키 모임에도 가입했다. 정기 모임은 주말에 열린다고 했다. 우리는 주말마다 다른 스키장으로 이동할 예정이라 참석할 수 없었다.

한 달 전부터 조금 기대했던 일이었는데 아쉬웠다.

그래도 단톡방에 글을 남겼다.

우리는 한 달 동안 주중 내내 용평에서 스키를 탈 예정이라고. 혹시 함께 타고 애프터스키를 할 친구들이 있으면 좋겠다고.

바람은 밤까지 이어졌다.

야간 스키는 포기하고 드래곤 플라자로 걸어갔다. 식당들은 대부분 문을 닫은 상태였다. 로비 테이블에 앉아 오늘 기록을 정리했다.

오스씨는 옆에서 일본어 회화 책을 읽고 있었다.

밖에서는 여전히 바람이 건물을 흔들고 있었지만, 안쪽의 시간은 조용했다.

그렇게 하루가 천천히 지나갔다.


1월 14일, 수요일


오전에 골드 슬로프에서 숏턴 연습을 했다.

몸을 낮추고 리듬을 빠르게 가져가려 했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턴이 조금만 빨라지면 스키가 벌어졌다. 결국 몇 번 더 내려온 뒤 라면으로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는 발왕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작년에는 폭설 때문에 끝까지 가보지 못했던 천년주목숲을 이번에는 꼭 가보고 싶었다.

정상에 도착하니 바람이 꽤 세게 불고 있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가보자는 마음으로 아버지주목까지 걸었다.

왕복 2킬로미터.

무장애길이라고 하지만 눈이 얼어 있어 발걸음이 조심스러웠다.

주목나무에 대한 첫인상은 불쌍하다였다. 기둥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고 가지는 비틀린 채로 뻗어 있었다. 그렇게 상처를 안고 천 년을 버텨온 나무였다.

그 모습을 보며 잠깐 의미를 찾을 수도 있었겠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저 나무는 저 나무의 시간을 살았을 뿐이다.

어머니주목은 다른 나무를 품고 자랐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했다. 함께 자라는 것이 오래 사는 비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가, 곧 바람에 흩어졌다.

정상 카페에는 사람이 많았다.

책을 몇 권 챙겨 왔지만 공부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차 한 잔과 부엉이빵을 먹고 내려왔다. 부엉이빵은 여전히 맛있었다.

스키장에서는 생각보다 걷지 않게 된다. 숲길을 만 보 넘게 걸은 탓인지 무릎이 평소보다 더 쿡쿡 쑤셨다. 다음 스키 여행에서는 걷기를 조금 줄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저녁을 먹고 야간 스키를 나가려는데 문이 잘 열리지 않았다. 프런트에 문의하니 오래된 콘도라 문짝이 틀어지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원하면 방을 바꿔줄 수 있다고 했다.

일단 스키를 타고 와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야간인데도 레드 리프트 앞에는 사람이 꽤 모여 있었다. 리프트를 타려는데 삑 소리만 나고 통과되지 않았다.

오전과 야간 인증이 따로 필요하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다시 인증기를 다녀오는 길이 조금 번거로웠지만 이미 슬로프까지 나왔으니 타기로 했다.

레드 정상에서 내리다 손에 들고 있던 폴을 떨어뜨렸다.

리프트가 잠깐 멈췄다.

나 때문에 리프트가 멈춘 건 생초보 시절 이후 처음이었다. 얼굴이 조금 뜨거워졌다.

다시 올라오는 길에는 앞사람과 동선이 엉키면서 오스씨가 넘어졌다. 크게 다친 건 아니었지만 이런 일들이 연달아 겹치니 괜히 기분이 가라앉았다.

결국 스키를 접고 프런트로 가 방을 바꿔달라고 했다.

새로 받은 방은 엘리베이터에서 조금 더 가까웠고 창밖으로 슬로프가 보였다. 원래 방보다 조금 더 비싼 방이었다.

짐을 옮기고 정리하는 데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래도 창밖에 슬로프가 보이니 마음이 조금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이 정도면 이번 여행의 액땜은 다 했다고 생각하며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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