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했으니 일단 스키부터 1
오스씨가 35년 다니던 직장에서 은퇴했다.
마지막 출근 날, 집을 나서는 모습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맨날 입는 옷을 입고, 같은 가방을 들었다. 다만 돌아오는 길에는 더 이상 내일의 출근이 없다는 것만 달랐다.
퇴직을 축하하는 자리도 몇 번 있었다. 꽃다발도 받았고, 근사한 식사도 했다. 끝은 기념했지만, 아직 무엇인가 시작하지는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우리는 은퇴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써보기로 했다.
꽃다발 대신 눈꽃을, 케이크 대신 설원을 선택했다.
오스씨에게 가장 오래된 취미는 스키였다. 나는 그 옆에서 20년을 함께 다녔다. 하지만 직장을 다니면서, 그것도 부산에 살면서 스키를 취미로 삼으면 대부분 관광스키어로 남게 된다. 시즌에 한두 번, 이삼일 정도 슬로프를 밟는 사람들. 우리도 그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충분히 즐겁기는 했다. 하지만 늘 어딘가에 작은 욕심이 남아 있었다.
조금 더 오래 타보고 싶다. 조금 더 잘 타보고 싶다.
그래서 생각했다.
이번 겨울은 아예 눈 위에서 살아보면 어떨까.
우리는 통합 시즌권을 미리 끊었다. 카드 할인까지 챙기고 나니 괜히 뿌듯했다. 웰리힐리에서 하루, 용평에서 보름, 하이원에서 열흘. 달력에 동그라미를 치며 날짜를 세었다.
스키복을 새로 사고, 내피를 바꾸고, 바라클라바를 고르고, 부츠를 점검했다. 준비하는 시간도 이미 여행의 일부였다.
한 달을 비운다는 건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약속을 정리하고, 집을 비우고, 익숙한 일상의 리듬을 잠시 멈춰야 했다.
그래도 우리는 미루지 않기로 했다.
무릎이 더 굳기 전에.
겁이 더 자라기 전에.
“예전엔 잘 탔지”라는 말만 남기기 전에.
은퇴를 기념하는 여행이라기보다는, 앞으로의 시간을 미리 걸어보는 느낌에 가까웠다.
출근버스 대신 리프트를 타고, 보도블록 대신 설원을 내려오는 한 달.
그 안에서 우리가 좋아하는 일을 어디까지 계속할 수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1월 11일 아침, 우리는 눈을 향해 출발했다.
1월 11일, 일요일, 웰리힐리
달력으로만 기다리던 날이 실제 날짜가 되었다.
경주에서 교리김밥을 사고 군위휴게소에 들렀다. 라면과 김밥을 함께 먹었다. 이동 중에 먹는 음식은 이상하게 더 맛있다.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이 양념처럼 더해지기 때문이다. 별것 아닌 라면 국물도 꽤 근사하게 느껴졌다.
오후 두 시 반쯤 웰리힐리 리조트에 도착했다. 지하 주차장은 이미 만차였다. 외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장비를 꺼냈다. 공기가 차가웠지만 그 냄새가 반가웠다. 눈이 있는 곳의 공기는 도시와 조금 다르다. 차갑고 건조한데도 이상하게 맑다.
하루만 머무는 방, 스탠다드 A형 트윈. 짐을 내려놓자마자 시즌권 등록부터 했다.
카드를 단말기에 올려놓자 짧은 알림음이 났다. 그 순간 어깨가 조금 펴졌다.
앞으로 한 달 동안 이 작은 카드가 우리의 신분증이 된다.
저녁은 간단히 해결했다. 비비고 육개장에 햇반, 김. 여행 첫날의 식사로는 조금 심심했지만, 배를 채우는 일보다 슬로프로 나가는 일이 더 중요했다. 마음이 이미 밖으로 나가 있었다.
저녁 여섯 시 반, 야간 슬로프가 열렸다.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조명이 켜진 설면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오래전부터 익숙한 풍경인데도, 첫날이라 그런지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첫 턴은 어색했다. 몸이 생각보다 굳어 있었다.
두 번째 턴부터 조금씩 리듬이 살아났다. 스키는 이상한 운동이다. 몇 달을 쉬어도 몸 어딘가에 감각이 남아 있다가 어느 순간 슬쩍 돌아온다.
하지만 예전 같지는 않았다. 속도를 조금 줄였고, 턴도 조심스러웠다.
몸이 아니라 나이가 브레이크를 잡는 느낌이었다.
두 시간 정도 타고나니 다리가 서서히 묵직해졌다. 첫날은 여기까지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장비를 정리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샤워를 하고 침대에 기대 넷플릭스를 켰다. 〈기묘한 이야기〉 마지막 시즌이었다.
화면을 보면서도 자꾸 내일 탈 슬로프가 떠올랐다. 어느 코스를 먼저 탈지, 눈 상태는 어떨지, 몸은 얼마나 버틸지.
첫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앞으로 펼쳐질 한 달을 살짝 미리 들여다본 사람처럼, 조금 들뜬 마음으로.
손목의 가민 시계를 켰다. 스포츠 모드에서 ‘스키’를 선택했다.
고도, 속도, 이동 거리, 활강 횟수까지 자동으로 기록된다. 앞으로 한 달 동안 우리의 시간은 이 작은 시계 안에 차곡차곡 저장될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눈 위에서 보낸 하루하루를 가장 정확하게 기억하는 건 이 시계일지도 모른다.
전날 유튜브에서 숏턴 영상을 하나 봤다. 몸을 낮추고 리듬을 빠르게 가져가는 동작이 인상적이었다. 머릿속으로는 충분히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막상 슬로프에 올라가 흉내를 내보니 결과는 전혀 달랐다.
턴은 느렸고, 스키는 자꾸 넓게 벌어졌다. 머릿속에서 그리던 동작과 실제 몸의 움직임 사이에는 늘 약간의 시차가 있다. 생각은 이미 다음 턴에 가 있는데 몸은 아직 이전 턴을 정리하는 중이다.
나이가 들수록 그 시차가 조금 더 길어지는 것 같다.
그래도 두 시간을 꽉 채워 탔다.
다리가 서서히 묵직해졌다. 첫날보다 눈 상태도 조금 더 읽히기 시작했다. 눈 위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설면의 단단함이나 스키의 미끄러짐이 조금씩 몸에 들어온다.
숙소로 돌아와 짐을 정리했다. 웰리힐리에서 조금 더 타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이번 여행의 본진은 용평이었다. 늦게 도착하고 싶지는 않았다.
체크아웃을 하고 근처 인기 맛집인 '둔내막국수로 갔다. 다행히 우리가 마지막 테이블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뒤로 줄이 생겼다.
돼지수육과 칼만둣국을 시켰다. 음식이 나오자마자 젓가락이 바빠졌다. 운동을 하고 나면 음식 맛이 조금 단순해진다. 따뜻하고 짭짤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양이 꽤 많았다. 결국 조금 남겼다.
예전에는 이런 집에서 남기는 일이 거의 없었다. 이런 맛집은 위가 튼튼한 젊은 사람들에게 조금 양보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당을 나오면서 장박 동안 아침을 해결할 식빵도 샀다. 차 트렁크에는 스키 장비와 장을 본 음식이 뒤섞여 있었다.
이제 정말 용평으로 간다.
한 달 동안 가장 오래 머물게 될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