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의 뜨거운 재회

지천명+1의 신년계획 1탄

by 선우비
옛 선인들은 나이 오십을 지천명이라 칭하며
“하늘이 만물에 부여한 원리를 아는 나이”라고 추켜세웠지만,
나의 오십은 온통 혼란의 도가니였다.


세상은 전염병으로 박살 났고, 오스씨의 어머니는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고 계셨다.

우리 집도 난리였다.

누군가가 아파트 현관에 밤낮없이 오물을 투척했다.

현관에 CCTV를 달았지만 세상이 온통 마스크 투성이라 인물을 특정하기 힘들었다.

어머니를 선산에 모시고 온 다음 날 마침내 범인을 잡았다.

그냥 감이 이상해서 현관 앞에 숨어있었는데 딱 그때 범인이 나타났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알려준 거라 믿었다.


범인은 같은 아파트에 사는 조현병 환자였다.

우리보다 덩치가 크고 눈빛이 사나운 젊은 남자였다.

검은 옷에, 검은 모자, 검은 마스크... 스릴러 영화에서 막 빠져나온 것처럼 보였다.

그는 우리를 국가기관에서 자신을 감시하기 위해 파견한 사람이라 여겼다.

경찰은 현행법상 누가 상해를 입기 전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손을 뺐다.

환자의 어머니는 “우리 아이는 해치지 않아요.”를 주문처럼 외웠다.

그녀의 드러난 피부는 온통 멍으로 덮여 있었다.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나온 그는 이제 마스크도 쓰지 않고 물건을 던져댔다.

경찰은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유튜브에서 조현병 환자로 검색하면 대체로 끔찍한 이야기가 많았다.


나의 정신과 주치의는 잠시 피해있으라고 조언했다.

이사를 심각하게 고려하는 와중에 전국적인 부동산 광풍으로 집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반면 팔아야 하는 우리 집은 갑자기 천장에서 누수가 시작됐다.

여러 전문가를 불렀는데 원인이 다 달랐다.

윗집과의 신경전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협조적이더니 나중에는 배 째라는 식으로 돌변해서 법률적인 도움을 알아보러 다녀야 했다.

몇 년째 누수를 잡지 못해 이사도 못 가는 사연들이 유튜브에 즐비했다.

신경이 찢어질 대로 찢어져 우울증 약의 밀리그램을 계속해서 높였다.

누군가 우리를 도망가지 못하도록 꽉 잡고는 조금씩 조금씩 절벽으로 미는 느낌이었다.

삼재가 끼었다는 말로는 부족한, 험난했던 한국 나이 오십이 그렇게 지났다.

그리고 올해, 만 나이 오십이 다시 돌아왔다.

1월 1일이 되자마자 이를 악물고 신년계획을 세웠다.

기존의 사고방식으로 살면 더는 행복할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뜨거운 재회


첫 번째 계획은 그동안 데면데면한 관계로 지내왔던 책과 다시 친해지기였다.

난 책 모으는 게 취미여서 많은 책을 소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패드를 장만하자 종이책의 시대는 끝났다는 주장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면서 책장을 싹 정리해 버렸다.

환경 보호를 위해서라도 미래는 전자책의 시대여야 했다.

집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수천 권의 단행본과 만화책을 스캔해서 아이패드 안에 넣어버렸다.

초기에는 전자책을 읽었지만, 아이패드의 진짜 매력은 전자책이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깨달았다.

대한민국의 다수가 그러했듯 나 역시 유튜브 프리미엄 가입자가 된 것이다.


필요한 정보를 찾기 위해 더는 책을 뒤적거리지 않았다.

클릭 몇 번이면 원하는 정보를 찾아낼 수 있었다.

몇 개의 주제를 깊게 아는 것보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으로 무장해야 세련된 사람으로 취급받는 시대였다.

구글 검색을 잘하는 사람이 21세기의 지식인이라는 말들이 떠돌았다.

사실 유튜브 교양 채널들을 탐험하다 보면 아는 것이 많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책을 읽은 것처럼 요약정리해주는 채널들을 구독하고 좋아요를 열심히 눌렀다.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게 살아가는 깨어있는 중년 남자 이미지는 덤이었다.

그렇게 일 년에 책 열 권도 읽지 않으면서 똑똑한 사람인 척하며 살아왔다.


그렇게 얻는 정보들은 사실 ‘알아봐야 쓸데없는 잡다구리’ 일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를테면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이 무엇인지 알고, 각각의 작품 속 주인공의 갈등과 상황도 알지만, 그게 지금의 나랑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모른다.

누군가 더 깊이 아는 사람과 대화를 할 때 “셰익스피어 아시죠?” 하면 고개를 끄덕이는 청중 이상이 될 수 없는 지식.

거기다 사실관계도 틀리기 부지기수다.

친구들과 대화를 하다가 누구의 정보가 사실인지 검색하는 일이 잦아졌다.

팩트 체크를 했다고 더 깊은 대화로 연결되지도 않았다.

각자 유튜브에서 본 것으로 지식자랑만 하다 헤어지곤 했다.


수다의 소재가 아니라 삶에서 꼭 필요한 정보라면 어떨까.

이유 없이 공격하는 조현병 환자, 누수의 책임을 발뺌하는 이웃을 상대하는 법을 유튜브에서 검색했다.

대체로 냉정하고 살벌한 해결법이 좋아요가 많다.

상대를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파렴치범으로 상정하고 대비하라고 조언한다.

일이 틀어지면 우리가 다칠 수도(심지어 살해당할 수도) 있고, 돌이킬 수 없는 재산상의 손해를 입을 수 있으니 틀린 주장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우리도 한껏 방어적인 태도로 그들을 상대했고, 그러다 보니 감정의 골은 갈수록 깊어졌다.

나는 피해자, 그들은 가해자였고, 통쾌한 사이다 응징만이 사건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사실 나의 영혼은 그러한 갈등을 견딜 수 있을 만큼 강하지 않았다.

독한 생각을 할 때마다 마이너스 기운들이 치솟아 하던 일을 멈추고 소파에 누워버리곤 했다.

상대의 반응에 따라 일희일비 하다보면 시도 때도 없이 우울해졌고, 처방전을 받기 위해 병원을 들락날락했다.

그러다 어느 날 알게 되었다.

나의 적으로 마주한 이웃들의 얼굴도 나만큼 엉망진창이라는 사실을.

그들도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라 자신을 쥐어짜다가 결국 정신과 신세를 지는 처지였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빨리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종용하던 피해자의 모습에서 한발 물러나 지금의 상황을 공부하기로 했다.

도서관에 달려가 조현병 관련 책들을 찾아서 읽고, 누수 관련 책도 탐독했다.

조현병 환자가 왜 그러한 망상을 경험하는지, 환자 자신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그 가족들의 아픔이 얼마나 큰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이웃과 지역공동체가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도.

두려움에 벌벌 떨며 그를 잠재적 살인자로만 본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사건이 벌어지자마자 그 책을 읽었다면 그와 그의 가족들을 이해하고 오히려 따뜻하게 품어줄 기회가 됐을 수도 있었다.


누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이 새는 경로를 하나하나 추적하다 보니, 서로에게 폐를 끼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공통주택 거주자의 처지를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

오늘은 윗집이지만 내일은 우리가 가해자가 될 수 있다.

문제의 원인을 찾는 일은 전문가가 하겠지만, 적어도 그 과정에서 불안해하는 이웃을 다독일 수도 있었다.

얕은 곳에서 만족하지 않고 한 발 더 들어간 지식, 지식과 지식 사이로 선명하게 길을 보여주는 지혜를 찾아내려면 책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나이 오십에 걸맞게 제대로 살기 위해서 난 다시 책장을 채우기로 했다.


그 결과 올해 나는 책과 얼마나 친해졌을까.

책장에 신규입주한 애들을 세보니 오십 권 정도다.

이용하고 있는 도서관의 대출이력조회를 해보니 38권을 빌렸다고 나온다.

완독률 100%는 아니어도, 이 정도면 친하다 못해 열이 확확 나는 뜨거운 관계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난 작년보다 더 지혜로워졌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오스씨에게 물어보니 달라졌다고는 한다.

예전에는 ‘그러지 마’라고 말하면, ‘여보나 그러지 마세요.’ 숨도 쉬지 않고 받아쳤는데, 요즘에는 일단 생각을 하는 눈치란다.

기대에 어긋나는 상황이 전개되면,

논쟁이 벌어지면,

지금 이 상황을 어떤 책에서 봤는데, 그때 저자가 뭐라고 했더라, 떠올리려 노력한다.

그 순간 감정에 휩쓸려 후회되는 행동을 하면 하루 이틀 지난 후 다시 복기해보고 관련 책들을 찾아 읽는다.

적어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의 위험성만큼은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다가오는 신년계획도 첫째는 책이다.

요즘 같은 복잡한 시대의 지천명은, “나는 여전히 아는 것이 없고, 계속 공부해야 한다”가 아닐까 싶다.

그저 삶의 지혜라도 한 조각 수집할 수 있기를 바라며.



참고도서......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744905



이 글은 정규환님이 진행하는 '사이드에세이클럽'에 참여하면서 적은 글입니다.

주제는, 일상을 Rewind, 그렇게 Be kind.

같이 수필쓰기에 참여하실 분은...

정규환 블로그: https://blog.naver.com/jgh5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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