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구영신(送舊迎新) 친구들

지천명+1의 신년계획 2탄

by 선우비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


우울증 진단 이후 나의 유튜브 알고리즘은 온갖 심리학을 배달하는데 열심이었다.

나의 쓰라린 마음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무엇을 해야 이 답답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누구를 옆에 붙이고, 누구를 인생에서 제거해야 하는지,

전 세계 박사님들과 출판사 판매담당자들의 조언으로 머릿속이 꽉 차 버렸다.


몸과 마음을 써서 할 수 있는 일은 나 혼자 노력하면 되지만, 문제는 역시 인간관계였다.

베스트셀러 『미움받을 용기』의 저자도 외치지 않았던가.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라고.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 그들을 내 인생에서 제거한다면 난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그래서 신년계획 두 번째는 인간관계 다이어트로 정했다.

방법은 간단했다.

평소 내 신경을 건드리는 사람들을 소환해서 그들의 장단점을 저울질한 후, 유지와 손절을 선택했다.

많은 이들이 가차 없이 손절리스트에 올랐는데, 개중에는 우리와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왔던 친구도 있었다.

유머 감각이 뛰어나 같이 놀면 심심할 틈이 없어서 좋긴 한데,

뭐랄까,

자꾸 내가 변변찮은 사람처럼 느껴지게 된달까?


이를테면, 단체채팅방에 살짝 자랑에 가까운 근황 소식을 올린다고 해보자.

무엇을 샀다, 어디를 놀러 갔다 하는.


“제주 펜션에 갔는데, 일몰이 끝내줬어. 벌레만 없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올린 이의 기대 반응: 일몰 너무 멋있었겠다. 우리도 가고 싶다. 부럽부럽! 그 정도 비경이면 벌레는 감수해야지.


그의 반응: 이구, 벌레 무서우면 펜션이 아니라 호텔에 갔어야지.


뭐야 씨발, 묘하게 밉살스러운 말이다.

나의 행동에 긍정보단 (걱정하는 척하는) 부정 쪽 반응이 확실히 많다.

그렇다고 지적하면 오히려 내가 옹졸한 사람처럼 보일 테고, 아무튼 찜찜하다.


“나를 자꾸 유치한 놈으로 느끼게 만든 죄.”


땅! 땅! 땅! 손절봉을 내리쳤다.


“괜찮겠어? 가뜩이나 친구가 없어서 난리인 애가.”


이미 환갑이 넘은 오스씨는, 나이를 먹으면 주위에서 사람이 사라지는 게 더 걱정이라고 했다.


“자기야, 내가 얼마 전에 ‘50부터는 인생관을 바꿔야 산다’라는 책을 읽었어.

내용이 뭐냐 하면,

난 사실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래.

그걸 인정하래.

그러니까 괜히 무게 잡지 말고, 자존심, 꿈, 사람은 다 버리고 오로지 나만을 위해 살래. 남 신경 쓰면서 인생 낭비하지 말고.”


내가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면, 내 신경을 긁고 있는 저들도 대단하지 않다는 말이다.

안 만난다고 내 인생이 더 피폐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내 인맥 다이어트의 희생양이 되었고,

1년이 다 되가는 지금까지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걸 보면,

그들에게도 나는 없어도 그만인 사람이었나 보다.

씁쓸하지만 꼭 해야만 했던 나만의 새해 의식, 일단은 성공.


가버린 인연이 있으면 오는 인연도 있다.

작가 김비님은 올해 내 인생에서 가장 인상적인 컴백이다.

우리는 이십 년 전, 내가 서울에 살면서 여러 출판 관련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편집자와 작가로 만났다.

그 일들은 의욕과 비교해 결과물이 그렇게 좋지 않았고,

일과 사람 관계로 번아웃 상태가 되어버린 나는 지금의 애인을 만나서 서울을 아예 떠나버렸다.

인생을 리셋하고 싶은 욕망으로 기존의 관계들을 멀리했고,

늘어놓았던 일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는 와중에,

김비님으로부터 우리가 만들어낸 결과물을 삭제해달라는 메일을 받았다.

더는 치열하게 현실과 부딪치며 싸우지 않는 내 모습에 실망했다는 내용이 첨부되어 있었다.

부끄러움과 죄책감이 우리 사이를 꽉 채웠고, 그게 그녀와의 마지막이었다.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은 올해 부산퀴어문화플랫폼 홍예당에서 진행한 글쓰기 모임에서였다.

제주 한달살이를 하면서 새삼 글쓰기에 대한 열망이 활활 타오를 때였다.

그녀가 글쓰기 선생님으로 참여한다는 공지를 보고는 신청을 할까 말까 한참을 망설였다.


“자기, 변하고 싶다고 했잖아. 안 해본 거 하면서 산다고.”


오스씨가 옆에서 부추기고 격려해주었다.

올 한해 자신을 긍정하라고 용기를 주는 책들을 많이 읽어서였을까,

아니면 오랜 시간이 지나 민망함도 퇴색되어서였을까.

덜컥 신청을 해버렸다.


첫 모임에서 나를 대면한 그녀는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그리고 참여한 사람들을 둘러보며 웃으며 말했다.


“이분이랑은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네요. 잘 지내셨어요? 제가 마지막에 마구 쏘아붙였죠?”


어? 오랜... 만이네요, 더듬거리며 어색한 웃음만 나누겠지, 긴장하고 있었는데,

너무나 시원하고 호탕한 인사였다.


“그래었나요? 기억이 안 나는데.”


그렇게 헤헤거리자, 우리 사이를 채우고 있다고 생각했던 온갖 부정적인 기운들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녀는 삼 개월간 나의 글 선생님으로 격려와 채찍을 마구 휘둘렀고,

십여 년을 잊고 산 글쓰기의 재미를 확실하게 찾아주었다.

그녀는, 가족을 제외하고는, 관계가 틀어졌다가 다시 이어진 내 인생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갈등이 있었음을 숨기지 않았고, 초연한 모습을 확실하게 보여줌으로써 상대도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평소에는 잊고 살아가지만, 돌이켜보면 헤어져서 아쉬운 사람들이 꽤 있다.

당시에는 내가 그들을 감당할 수 없었거나, 그들에게 나는 피하고 싶은 존재였을 것이다.

허심탄회한 대화라는 훌륭한 도구가 있었는데,

미움받을 용기를 내지 못해서 불만이 쌓이고,

결국 헤어질 결심을 하게 만든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서로에게 느끼는 불편함이, 불변의 속성이거나 ‘적대적 MBTI’가 아니라,

대화를 나누며 맞추어나가야 할 요철에 불과하다고,

그저 서로를 이해하는 데 조금만 더 친절하면 될 문제라는 걸 당시에 알았다면 우린 계속 친구로 남았을까?


만약 우연히라도 그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피하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 시절 우리는 여기저기 아팠고, 서로에게 살짝 게을렀는데,

지금 다시 보니 너무나 반갑다고 또렷하게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참고도서........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597671


이 글은 정규환님이 진행하는 '사이드에세이클럽'에 참여하면서 적은 글입니다.

주제는, 일상을 Rewind, 그렇게 Be kind.

같이 수필쓰기에 참여하실 분은...

정규환 블로그: https://blog.naver.com/jgh5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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