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천명+1의 신년계획 3탄
“서울 모임에 오는 사람들에게 당신들을 보여줬으면 좋겠어요.”
부산 성소수자 부모 모임에 처음 나갔을 때, 서울에서 지원사격 오셨다는 지인님(성소수자 부모 모임 운영위원)의 목소리에 반가움이 묻어났다.
“나는 오십, 파트너는 예순둘이고, 17년째 결혼생활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우리를 소개했을 뿐인데…
전문상담사로 활동하고 있는 지인님에게 어린 성소수자들이 자주 묻는단다.
“나이를 먹어도 계속 성소수자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젊을 때만 이러다가 나이 들면 결혼해서 이성애자로 살아가는 걸까요?
아니면 늙어서도 계속 연애 상대를 찾아다녀야 하는 걸까요?”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물으면, 그들이 이용하는 커뮤니티(종태원이든 인터넷이든)에 나이 든 게이가 거의 안 보이기 때문이란다.
“결혼생활을 하는 나이 든 게이 커플의 존재가 애들한테 희망을 줄 수 있거든요.
우리도 안정적인 미래를 만들 수 있다고.
사실 저도 제 아이가 커밍아웃한 이후로 그게 가장 두려웠어요.
우리가 죽고 나서 우리 아이가 혼자 외롭게 사는 건 아닌지.
다른 부모님들도 그 걱정을 가장 많이 하세요.”
동성애자 커뮤니티에 데뷔한 지 어언 27년, 심하게 고인물인 나로서도 처음 듣는 내 존재의 의의였다.
그냥 애인하고 헤어지지 않고 17년을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에게 롤모델이 되고, 희망이 될 수 있다니, 눈물 나도록 서글픈 이야기였다.
씁쓸한 현실이지만, 지인님의 말처럼 생각해보니, 확실히 다른 세계가 펼쳐지는 느낌도 없지 않았다.
이세계(異世界)에 떨어졌더니
주책맞은 게이 커플이 누군가의 롤모델?
... 이랄까?
갑자기 대단한 인물이라도 된 양 목에 힘이 들어가고, 옆에서 긁어달라며 건조한 등을 내미는 오스씨가 지혜를 숨긴 현자처럼 보인다.
사실 이야기를 들려준 지인님 역시 그냥 게이를 아들로 둔 어머니일 뿐이지만, 내 눈에는 희망의 아이콘이었다.
성소수자 자녀를 응원하고 힘을 보태는 부모라니, 그런 부모들이 많아진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달라질까 상상만 해도 행복하다.
이렇듯 소중한 사람을 열심히 사랑했을 뿐인데 누군가에게 희망이 될 수 있다면, 엉뚱 발랄 커플인 우리도 이세계를 구하러 떠나는 원정팀의 일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세계에 입성하면 일단 주민들이 모이는 주막이나 여관에 가서 새로운 세상의 정보를 얻는 것부터 시작한다.
때마침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타에서 「동성파트너와 함께 나이듦을 준비하는 법」이라는 강의를 시리즈로 진행하고 있었다.
동거를 시작하는 커플이라면 임대차계약 하는 법, 명의는 어떻게 할 것인지,
이별하는 커플이라면 재산분할은 어떻게? 반려동물은 누구에게?
외도한 파트너에게 위자료 청구는 가능한가?
나이 든 커플이라면, 보험에서 파트너를 수익자로 지정하는 법, 노후 재산관리, 상속과 유언 등등,
지난 십여 년간 우리가 머리를 쥐어 뜯어가며 고민했던 문제들이 속속 등장했다.
17년 전에 해주지, 그럼 덜 힘들었을 텐데, 하는 원망이 들 정도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정보들이었다.
준비된 발제가 끝나자 커플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하나같이 ‘법적, 사회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관계의 불안정’에서 기인한 문제들이었다.
대체로, 나도! 나도! 손 번쩍 들어 동의를 표하고 싶은 내용이었지만, 우리에게는 이미 지나간 파도도 꽤 됐다.
우리가 극복한 방법들을 들려주고, 더 나은 방법이 있는지 같은 경험을 한 커플이 있다면 물어보고 싶기도 했다.
인터넷 줌을 통한 강연이어서 사백 명이 넘는 엄청난 수가 참여했는데,
그들 모두가 저마다의 불안 요소들을 몽땅 풀어놓고, 자기들만의 극복기를 공유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읽은 책, 『알페스,*퀴어(권지미 지음)』에도 같은 문제의식이 담겨있었다.
“한국 퀴어 운동의 문제는 경험이 축적되지 못하는 것이다.”
선대의 경험이 쌓이지 않으니 후대는 항상 같은 고민을, 같은 출발선에서 해야 한다는 한탄이었다.
내가 속한 게이 커플의 세계도 사정이 비슷하다.
‘우리 둘만 행복하면 된다’라는 생각으로 커뮤니티에서 분리된 채 살아가는 커플이 생각보다 많다.
맨날 보이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지면 신고할 일이 아니라 축하할 일이란 속설이 있을 정도다.
주변에 게이가 있으면 바람이라도 피울까 봐 걱정인지, 고립이 두 사람의 사랑을 더욱 돈독하게 만들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는다.
하지만 열정도 어느 정도 잦아들어 상대를 나의 반쪽으로 받아들이는 티격태격 단계에 돌입하면, 사소한 갈등으로도 휘청거리기 일쑤다.
경험치 제로 상태에서, 자기의 깜냥으로만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작은 돌부리에도 쉽게 넘어지고, 넘어진 이의 손을 잡아주지 못해 곧바로 이별로 나아간다.
혹시라도 동거나 그 이상을 준비했다면, 이별이 몰고 올 혼돈은 극악의 수준으로 올라간다.
이성애자들의 결혼을 생각해보자.
가족, 지인들뿐 아니라 직장, 국가까지 나서서 참견하고 도와주려고 난리다.
교보문고에 들어가 행복한 부부생활, 결혼생활로 검색하면 얼마나 많은 책이 있는지 깜짝 놀라게 된다.
그렇게 지원이 빵빵해도 오랫동안 남이었던 사람과 관계를 지속하기란 쉽지 않다.
사방에 이혼이라는 지뢰가 널린 길을 두 사람이 다리를 묶고 이인삼각으로 피해가야 한다.
하물며 게이의 결혼생활이라니.
온 우주가 도와줘도 시원찮은데, 다들 아시다시피 이 나라에는 게이 커플을 위한 지침서 하나 없다.
어쩌면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커플들이 문제가 아니라, 다양한 정보와 대안에 접속하고 싶어도 응답해줄 수 없는 게이 커뮤니티의 상황이 문제일지도 모른다.
이세계 구원 원정팀의 임무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
“자기야, 내가 글 쓰는 브런치 앱 있잖아.
거기에 매거진 만드는 기능이 있는데, 우리가 아는 커플들을 인터뷰해서 잡지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오스씨에게 물었더니,
“오, 좋은 아이디어다. 그런데 그런 인터뷰가 사람들에게 정말 도움이 될까?”
반기면서도, 큰 기대를 하지 말라고 미리 방석을 깔아준다.
타인의 경험과 비교하면서 “게이 커플은 어쩔 수 없는 건가.” 좌절하거나,
“쟤들은 잘사는 것 같은데, 우린 왜 이 모양이지?” 자격지심을 느낄 수도 있으니까.
세상일이 다 그러하듯, 출발선에서 한발 물러날 이유는 셀 수 없이 많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는 것도 진리.
비록 과정에서 상처를 입을 수도 있을지언정,
서로가 서로를 가르쳐줄 수 있는 관계를 많이 만들어서,
그저 오래 같이 살아서가 아니라,
그 비결을 후대에 잘 건네줬다고 정당하게 박수받았으면 좋겠다.
한 해의 마지막 날, 부산에서 ‘동거하는’ 네 커플이 모인 송년회 자리에서 넌지시 이야기를 꺼냈다.
꺅! 우리 얘기 써줘! 정도의 열광은 아니지만, 해보면 재미는 있겠다는 반응이니 일단은 청신호.
“먼저 인터뷰하는 법부터 공부하고.”
설레는 마음에 살짝 제동을 걸어보지만, 어쨌든 계묘년 새해부터 괜찮은 목표가 하나 더 생겼다.
출발이 좋다.
참고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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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정규환님이 진행하는 '사이드에세이클럽'에 참여하면서 적은 글입니다.
주제는, 일상을 Rewind, 그렇게 Be kind.
같이 수필쓰기에 참여하실 분은...
정규환 블로그: https://blog.naver.com/jgh5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