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했으니까 일단 스키부터 4
X5 시즌권을 사면 리조트 숙소를 할인된 가격에 예약할 수 있다. 예약 페이지가 열리는 날, 오스씨와 나는 컴퓨터 앞에 나란히 앉아 거의 경기하듯 마우스를 움직였다. 결과는 평일 숙소만 성공.
아쉽지는 않았다. 닷새 연속으로 스키를 탔으면 주말에는 쉬는 게 맞다. 주말 슬로프는 사람으로 붐비고 리프트 줄은 길어지고 설질은 빠르게 망가진다. 애초에 큰 기대는 없었다.
대신 근처 도시로 나가 보기로 했다.
첫 목적지는 강릉.
짐을 빼 차에 싣고 교동 짬뽕집으로 향했다. 몇 해 전 첫 방문 때는 줄이 너무 길어 포기했던 곳이다. 이번에는 오픈 시간에 맞춰 갔다. 주차 자리를 찾느라 한 바퀴 도는 사이 가게 문이 열렸지만 다행히 자리는 남아 있었다.
교동짬뽕은 호불호가 갈린다고 들었는데 나는 분명 불호다. 매운 짬뽕을 안 먹은 지도 오래됐다. 어느 순간부터 짬뽕은 나에게 너무 강한 음식이 되었다.
오삼불고기에 이어 짬뽕까지.
맵찔이로 착실하게 성장하는 중이다.
몇 년 사이 이 동네의 진짜 대장은 장칼국수로 바뀐 듯했다. 가게마다 그 메뉴를 크게 내걸어 놓았고 젊은이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다음에는 우리도 장칼국수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정말 큰 일에는 대세에 역행하길 즐기지만 이런 소소한 것들은 또 남들 하는 건 다 따라 하는 편이다.
교동에는 소품 가게가 많아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나는 연필과 스티커를 샀고, 오스씨는 스즈키 유이의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를 골랐다. 이번 여행에서는 소설 쓰기에 집중하기로 해서 나는 책을 사지 않기로 했다.
주문진 호텔에 체크인하고 오후 네 시 반쯤 풍물시장으로 향했다. 토요일이라 사람으로 가득했다. 가숭어와 성대를 오만 원어치 샀다. 생선을 사면 시장 끝 ‘활복’ 부스에서 회를 떠 준다.
이미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오십 분을 기다려서야 회를 받을 수 있었다. 이 정도일 줄 알았으면 그냥 횟집에 갔을 것이다. 먹기도 전에 기력이 빠졌다.
기다리다 새우튀김을 하나 사 먹었다. 그것만큼은 정말 맛있었다.
회와 양미리 구이를 더 사서 호텔 방의 작은 테이블 위에 펼쳐 놓았다. 모두 합쳐 칠만 팔천 원. 하지만 새우튀김 말고는 크게 인상적이지 않았다. 절반 가까이를 남기며 주말 회센터는 다음부터 피하자는 데 의견이 모였다.
근처 술집에서 맥주 한 잔을 더 마시고 호텔로 돌아왔다.
슬로프를 떠난 하루라 그런지 몸이 조금 느슨했다.
부츠를 신지 않은 발이 가볍게 느껴졌다.
스키여행을 시작한 이후로 밤 열 시만 되면 눈이 감긴다.
유튜브 의사들이 권고한 삶이 되어가고 있다.
조식을 먹자마자 올마운틴 스키를 취급하는 스키숍에서 문자가 왔다. 스키와 바인딩을 합쳐 이러이러한 조건으로 할인해 주겠다는 제안이었다.
여섯 해 전 카빙스키를 살 때도 비싸다며 한숨을 쉬었는데, 그보다 한 단계 더 올라간 가격이었다.
전화를 걸어 제일 싼 모델로 부탁했다.
본전을 생각하면 앞으로 몇 년은 꾸준히 눈 위에 서 있어야 한다.
원래는 여행을 마치고 서울에서 천천히 사려 했다. 그런데 기왕이면 여행 중에 받아 바로 타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일주일은 용평, 그다음은 하이원으로 이동할 예정이다.
그 사이 주말에 서울에 들러 스키를 받기로 했다.
동해에서 1박하려던 계획을 접고 강남 호텔을 예약했다. 재작년에 조카가 결혼했던 그 호텔이다. 걸어서 십 분 거리에 가게도 있고, 오스씨 형님 집도 가깝다.
서울에 가는 김에 오스씨 가족들을 보기로 했다.
이런 가지치기 여행, 참 좋다.
호텔을 나와 주문진해수욕장을 걸었다.
겨울 바다는 비어 있었고 바람도 거칠지 않았다. 스키장에서 며칠을 보내다 바다를 보니 눈이 조금 쉬는 느낌이었다.
주문진의 자랑거리인 아들바위를 보고, 방탄소년단 정거장에도 들렀다. 한때 열성 팬이었던 나에게는 작은 성지 같은 곳이다.
다만 요즘은 팬심이 한결 잦아들었다.
김연아 때도 그랬다. 나는 스타가 활동을 멈추면 자연스럽게 관심을 거두는 편이다. 사람보다는 예술가의 작업물을 더 좋아한다.
물론 다시 활동하면 또 슬며시 마음이 들썩이는, 그런 라이트 팬.
하지만 요즘 아이돌에 조금 지쳐 있어서 다음 달 컴백해도 예전만큼 좋아할지는 미지수다.
부디 날 다시 미치게 해 주라, BTS.
점심으로 막국수를 먹고 강릉 아르떼 뮤지엄에 갔다.
부산 영도에서 한 번 본 전시지만 오스씨의 노인 할인에 마음이 움직여 다시 찾았다. 전시는 여전히 좋았다. 무언가를 본다기보다는 빛 속을 걸으며 시각과 청각으로 자극받는 느낌이다.
몇 번을 가도 크게 질리지 않을 것 같다.
강릉 시내로 돌아와 고래서점에서 식빵을 샀다. 서점이지만 의외로 식빵 맛집이다.
그리고 결국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임경선의 《태도에 관하여》.
이번 여행에서는 소설 쓰기에만 집중하겠다고 결심했는데 그냥 무너졌다.
이런 류의 패배는 나쁘지 않다.
저녁 무렵 다시 용평 타워콘도로 돌아왔다.
미리 부탁해 둔 덕분인지 이전에 묵던 바로 그 방을 다시 배정받았다. 장기 숙박객에 대한 작은 배려가 고마웠다.
며칠 사이 이 방이 조금 익숙해졌다.
이제 다시 용평 생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