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타자마자 아프기 시작하다

은퇴했으니 일단 스키부터 5

by 선우비

1월 19일, 월요일, 용평


오스씨는 전날부터 감기 기운이 있었지만 아침에는 괜찮다며 스키장으로 나섰다.

밤새 눈이 내려 설질은 극상에 가까웠다.

이틀 쉬고 다시 슬로프에 서니 몸이 조금 낯설었다. 첫 두 번 정도는 턴 타이밍이 어긋났다. 하지만 몇 번 더 내려오자 감각이 금세 돌아왔다. 스키는 쉬었다 타면 오히려 몸이 가벼울 때가 있다.

전날 유튜브에서 본 방식을 다시 시도했다. 가파른 경사에서도 턴이 한결 수월하게 이어졌다. 설질도 좋았고 새로 익힌 감각도 마음에 들었다.

평소보다 삼십 분을 더 탔다.

몸이 말을 듣는 날이었다.

점심을 먹고 나니 오스씨는 감기 기운이 슬슬 올라오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읍내 카페 투어는 빠질 수 없다며 굳이 나갔다가,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누웠다.

결국 저녁 스키는 접었다.

잠깐 망설였다.

오스씨를 두고 혼자 나가 볼까.

그의 손에 이끌려 스키장을 드나든 지 이십 년. 혼자서라도 더 타고 싶다고 느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새로 익힌 기술을 조금 더 시험해 보고 싶었다.

스포츠는 묘하다.

꾸준히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재미가 붙고, 재미가 붙으면 욕심이 생긴다. 그다음부터는 속도가 붙는다.

자전거도 그랬다.

하지만 욕심을 다루지 못하면 결국 몸 어딘가가 값을 치른다.

왼쪽 슬개골은 이미 한 번 경고를 보냈다.

이번에는 조심해야 한다.

남은 저녁 시간.

소설 구상은 끝났고 이제는 쓰기만 하면 되는데 가져온 노트북 자판이 손에 익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독수리타법이라 키감이 맞지 않으면 문장이 더디게 나온다.

그 징크스를 벗어나 보겠다고 자판을 챙겨 오지 않았는데 역시는 역시였다.

대신 지난해 쓴 에세이들을 정리했다.

프로젝트 이름은 〈퀴어하게 2025〉.

원래는 지금 쓰는 장편소설의 제목이었지만 통 크게 넘겼다.

숫자를 붙이고 나니 이름이 오히려 또렷해졌다.



1월 20일, 화요일


이 방의 보일러는 창문을 닫아두면 실내 온도가 이십팔 도까지 올라간다. 집에서는 이십이 도에 맞춰두고 겨울 실내복을 입고 지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조금 버거운 온도다. 결국 창문을 조금 열어두고 잤다.

그 탓인지 아침에 일어나니 목이 칼칼했다. 침을 삼킬 때마다 따끔거렸다.

나는 감기가 늘 목에서 시작된다.

조금 걱정은 됐지만 증상이 가벼워 스키장으로 갔다. 전날부터 스키어로서의 삶에 부스터가 달린 상태였다. 몸이 조금 불편해도 지금은 멈추고 싶지 않았다.

슬로프가 열리자마자 레드 리프트를 타고 한 번 길게 내려왔다.

다시 타려는데 기계가 멈춰 있었다.

대기줄은 점점 길어지는데 별다른 안내는 없었다. 사람들은 서서히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리프트를 탈 때마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한다. 만약 저게 갑자기 멈추면 어떡하지. 중간에서 덩그러니 매달린 채 얼마나 무서울까.

마침 그 순간 리프트 위에 멈춰 선 사람들이 보였다. 몇몇은 고개를 돌려 슬로프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가슴을 한번 쓸어내렸다.

다행히 내가 올라가 있을 때 멈춘 건 아니었다.

한참을 서 있다가 결국 다른 리프트로 옮겼다.

나중에 보니 레드는 아예 운행을 중단한 모양이었다.

가장 인기 있는 리프트가 멈추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다른 쪽으로 몰린다. 우리는 비교적 한산한 블루 슬로프에서 남은 시간을 연습하며 보냈다.

설질은 괜찮았지만 몸은 아침과 달리 점점 둔해졌다.

점심을 먹고 나니 기운이 눈에 띄게 떨어졌다. 낮잠을 자도 개운하지 않았다.

결국 읍내 병원으로 향했다.


가정의학과는 한 곳뿐이라 대기실이 붐볐다.

의사는 예상 밖의 분위기를 가진 여자였다. 목소리는 지드래곤을 닮았고 설명은 직설적이었다.

입을 열어보라더니, “목구멍에 세균이 득시글합니다.”

사흘 약을 먹고도 낫지 않으면 엑스레이를 찍자고 했다.

처방은 엉덩이 주사 두 방.

순간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가 떠올랐다.

봉투 가득 약을 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어제 먹다 남은 소고기를 볶아 저녁을 해결했다.

쉬려다 잠깐만 하고 노트북을 열었는데 에세이 수정에 다시 빠져들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세 시간이 지나 있었다.

이러니 허리가 망가지는 거겠지.

오스씨의 항의에 불을 끄고 누웠지만 쉽게 잠들지 못했다. 낮잠 때문인지 약 때문인지, 아니면 목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새벽 여섯 시까지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눈을 떴는데도 피로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돌팔이 의사가 이상한 약을 준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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